Archives of Design Research
[ Article ]
Archives of Design Research - Vol. 31, No. 2, pp.171-179
ISSN: 1226-8046 (Print) 2288-2987 (Online)
Print publication date 31 May 2018
Received 02 Jan 2018 Revised 12 Mar 2018 Accepted 12 Mar 2018
DOI: https://doi.org/10.15187/adr.2018.05.31.2.171

The Emergence of Public Design and Its Popularization

OhChang Sup ; 오창섭
Department of Industrial Design, Konkuk University, Seoul, Korea 건국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 서울, 대한민국
공공디자인의 출현과 사회적 확산

Correspondence to: Chang Sup Oh changsup@konkuk.ac.kr

Background So far, public design has been understood as a concept created by subjects of the design community. It has also been talked about as a social interest due to the activities and efforts of the design subjects.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reveal how the term and concept of public design came into being and how they were spread in society.

Methods In order to clarify when public design emerged, a method of ascertaining the related documents was used in this paper. I tracked newspaper data to reveal how public design has spread socially. The identified contents were analyzed in the context of the current age and design culture. Overall, the conclusions were derived by describing the contents critically in relation to the purpose of the research.

Results The results of the study are as follows. First, the term “public design” was first used in the exhibition "de-sign korea: Imagining the publicness of design," which was held at the Design Museum in December 2001. The term “public design” was first used in this exhibition. In addition, public goods and public facilities, which are accepted as the target areas of public design today, were treated as objects of public design for the first time. Second, the concept of public design spread to the public through the car license plate design scandal that brought about great resistance from citizens. Third, netizens played an important role in spreading the concept. In addition, the traditional media including the Dong-A Ilbo, a mainstream newspaper, actively discussed the contents, which contributed to the spread of public design. Fourth, as a result of the license plate design case, the government began to pay full attention to public design. Related organizations were created within the government, and public design projects began to be dealt with in organizations.

Conclusions Through this research, we have been able to identify when and how the terms, concepts, and objects of public design came into being and how they were transformed and popularized.

초록

연구배경 지금까지 공공디자인은 나름의 문제의식을 가진 디자인계의 주체들에 의해 만들어진 개념으로 이해되어 왔다. 또한 그것은 디자인계 주체들의 활동과 노력으로 사회적 관심이 된 것처럼 이야기되어 왔다. 본 연구는 이러한 이해에 의문을 제기하며, 공공디자인이라는 용어와 개념이 어떠한 계기로 출현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사회적으로 확산되었는지를 밝히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연구방법 공공디자인이 언제 출현했는지를 밝히기 위해 본 논문에서는 관련 문헌자료를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리고 공공디자인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확산되었는지를 밝히기 위해 신문 자료를 추적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렇게 파악된 내용들을 해당 시대상황과 디자인문화의 맥락에서 분석했고, 전체적으로는 연구 목적과의 관계성 속에서 해당 내용을 비평적으로 서술하는 방법을 통해 결론을 도출하였다.

연구결과 <de-sign korea: 디자인의 공공성에 대한 상상> 전시에서 처음으로 공공디자인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고, 공공재와 공공시설물이 공공디자인의 대상 영역으로 다루어졌다. 이렇게 등장한 공공디자인의 개념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킨 것은 2004년 시행되어 시민들의 거센 저항을 불러온 자동차 번호판 디자인 사건이었다. 개념의 확산에는 네티즌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동아일보>를 비롯한 전통적인 매체도 해당 내용을 적극적으로 다루었는데, 이러한 움직임이 공공디자인 확산에 기여했다. 더불어 이 사건은 정부가 공공디자인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기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결론 본 연구를 통해 공공디자인이라는 용어와 대상이 언제 어떻게 구체화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변용되며 대중적으로 확산되어 갔는지를 밝혔다.

Keywords:

Public Design, Publicity, Publicity of Design, Design Culture, 공공디자인, 공공성, 디자인의 공공성, 디자인문화

1. 서론

1. 1. 연구 배경 및 목적

공공디자인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중반 무렵의 일이다. 바로 그 무렵에 공공디자인문화포럼, 공공디자인학회, 공공디자인협회와 같은 단체들이 만들어졌고, 공공디자인이라는 이름을 내건 사업들도 본격화되었다. 공공디자인의 열기는 급속히 끓어올랐다. 하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공공디자인에 대한 비판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2010년대 초부터 뜨거웠던 열기는 급속히 식어갔다.

그렇게 열기가 식어가던 2016년, ‘공공디자인의 진흥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법 제정의 움직임은 있었지만 부처 간의 알력과 디자인계 내부의 분열 등으로 인해 성공하지 못했다. 2016년 ‘공공디자인의 진흥에 관한 법률’ 제정을 계기로 공공디자인은 또 다시 디자인계의 관심 대상으로 부상하고 있다. 그에 따라 공공디자인에 대한 기대와 우려도 함께 늘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디자인을 통해 공공성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이전의 공공디자인이 범했던 오류를 다시 한 번 반복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가 함께 증폭되고 있는 것이다. 향후의 공공디자인 실천이 기대를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되기 위해서는 지난 공공디자인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필요하다. 그것이 우려하는 상황을 피할 수 있는 길을 알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공공디자인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특히 공공디자인이 어떻게 등장하여 유행하게 되었는지를 밝히고, 그 전개과정을 이해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금까지 공공디자인은 2000년대 중반 무렵 나름의 문제의식을 가진 디자인계의 주체들에 의해 만들어진 개념으로 이해되어 왔다. 또한 그것은 학회나 협회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활동과 노력으로 사회적 관심이 된 것처럼 이야기되어 왔다.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사실처럼 보였고, 그래서 누구도 그러한 이해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강연이나 출판물을 통해 스스로를 공공디자인의 창시자처럼 이야기하는 일부 디자인계 인사들의 행태도 이러한 이해를 확대 재생산하는데 기여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과연 공공디자인은 2000년대 중반에 등장한 개념이고, 학회나 협회를 중심으로 한 디자인계의 노력으로 대중화된 것일까?

본 연구는 바로 이러한 물음 속에서 공공디자인이 언제, 어떠한 계기로 출현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사회적으로 확산되게 되었는지를 새롭게 밝힘으로써 한국 공공디자인의 기원에 대한 이해를 돕는데 그 목적이 있다.

1. 2. 연구 범위 및 방법

본 연구는 공공디자인이 어떻게 출현하여 확산되었는지를 밝히고 있다. 특히 공공디자인이라는 개념이 언제 출현했는지, 어떠한 변용을 거치며 확산되어 갔는지를 다루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다룬다고 해서 본 연구가 담론적 차원에서만 접근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담론은 물리적인 현실과 긴밀한 관계성을 갖는다. 때로는 하나의 담론이 구체적인 현실을 생산해내기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현실의 구체적 사건이나 실천이 담론을 만들어 내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 연구는 공공디자인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현실적인 사건들과 관계를 맺으며 등장했고 확산되어 갔는지를 다루고 있다.

본 논문은 크게 다음 두 가지 하부문제에 답하고 있다. 첫째, 공공디자인은 언제 출현했는가?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 연구자는 관련자 인터뷰와 문헌자료 고찰 방법을 사용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2장에서 다루었다. 둘째, 공공디자인은 어떻게 사회적으로 확산되었는가? 이 문제는 공공디자인의 대중화 과정을 밝히는 것이기 때문에 대중매체, 특히 신문 자료 검색을 통해 내용을 파악했다. 그리고 파악된 내용들을 해당시기의 상황과 디자인문화의 맥락에서 분석하였다. 두 개의 하부문제를 다룸에 있어 연구자는 연구 목적과의 관계성 속에서 관련 내용을 비평적으로 서술하는 방법을 통해 결론을 도출하였다.


2. 공공디자인의 출현

2001년 12월, 디자인미술관에서 <de-sign korea: 디자인의 공공성에 대한 상상> 전시가 열렸다. 전시의 구조는 간단했다. 참여 디자이너들 각자가 공적 영역에 자리하는 공공재나 시설물들을 디자인하고, 그렇게 디자인한 대상물을 디자인 모형이나 이미지의 형태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 모형이나 이미지는 전시를 위해 디자인된 것이었지, 실제 현실에 적용하기 위해 디자인된 것은 아니었다. 바로 그 때문에 전시는 ‘상상’이라는 용어로 표현된 것으로 보인다.

<de-sign korea: 디자인의 공공성에 대한 상상> 전시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부분은 오늘날 공공디자인의 대상으로 이야기되고 있는 각종 증명서, 교과서, 거리상점, 공공화장실, 정류장, 공개공지, 공공기관의 홈페이지 등을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당시에 그러한 사물, 이미지, 공간 등을 디자인의 이름으로 불러들인 것은 공공디자인의 대상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 전시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공공디자인’이라는 용어가 나름의 문제의식과 명확한 의미 값을 가지며 처음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도록과 부대행사로 열린 심포지엄 자료집에서 기획자인 엄혁은 “공공영역을 메우고 있는 시각적 환경은 근대화 과정을 함축하고 있는 크고 작은 지문(指紋)”이라고 규정하면서, “de-sign korea 전은 바로 한국 사회의 지문을 탐구함으로써 공공디자인에 대한 상상을 시작한다”라고 밝히고 있다.(Design Museum, 2001)(Design Museum, 2002, p.27) 그는 공공영역의 대상들을 디자인과 관계시키면서 ‘공공디자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큐레이터인 이유섭 역시 심포지엄 자료집에서 ‘공공디자인의 새로운 출발’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공공디자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관이 주도하는 디자인문화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드러내었다.(Design Museum, 2001)

도록에 실린 성완경의 ‘공공영역과 디자인 행위의 문제들’이라는 글에도 ‘공공디자인’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그런데 그의 글에서 공공디자인은 공공미술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이것은 공공디자인과 공공미술을 명확히 구분하기보다는 공공성이 발현되는 “구체적 경험과 실천의 장”으로 보는 그의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Design Museum, 2002, p.182) 바로 이러한 인식 속에서 그는 ‘이나’와 ‘내지는’이라는 표현을 사이에 두고 공공미술 옆에 공공디자인이라는 용어를 병치시키고 있는 것이다. “공공미술이나 공공디자인”, “공공미술 내지는 공공디자인”과 같은 방식으로 말이다.(Design Museum, 2002, pp.182~183)

성완경은 공공미술에 관심을 가지고 관련 담론을 생산해왔다. 그는 1982년 출간된 <시각과 언어 1: 산업사회와 미술>의 편집자였을 뿐만 아니라, 1999년에 출간된 <디자인문화비평> 창간호에서 ‘한국 공공미술의 허상과 위기’라는 글을 통해 프랭크 스텔라의 작품인 아마벨의 비공공성을 지적했던 미술비평가다.(Design Culture Laboratory, 1999) 더욱이 그는 순수미술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토대로 시각문화 영역에서의 공공성에 대한 관심을 보여왔기 때문에 ‘공공디자인’을 어렵지 않게 ‘공공미술’과 병치해 사용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병치는 공공디자인이라는 용어가 당시 어떻게 등장했는지를 유추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을 떠올리게 한다. 그것은 바로 공공미술로부터의 파생 가능성이다. ‘공공’과 ‘미술’을 결합시켰던 방식으로 ‘공공’과 ‘디자인’을 결합시키며 공공디자인이라는 용어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고 추론할 수 있다는 말이다. 공공미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미술관련 인사들에게 ‘공공’과 ‘디자인’을 결합시키는 것은 물리적으로든 개념적으로든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실제로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기획자 엄혁(실험미술 전공)은 당시의 공공디자인이 공공미술에서 유래했음을 확인해주었다. ‘공공미술이라는 말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는데, 공공미술의 내용을 보면 미술보다 디자인에 가깝다고 이해했다. 때문에 공공디자인이라는 용어도 가능하다는 인식을 했고,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공공디자인이라는 용어를 당시에 사용했다’고 말이다.

<de-sign korea: 디자인의 공공성에 대한 상상> 전시는 2001년 9월부터 진행한 3차례의 심포지엄을 통해 관련 내용을 공유하며 진행되었다. 이 심포지엄을 준비하면서, 그리고 심포지엄 과정에 기획자 엄혁은 공공성과 공공디자인에 대한 인식을 큐레이터인 이유섭, 권혁수와 공유했다. 엄혁에 따르면 그를 포함한 큐레이터들은 동년배로, 자주 만나 의견을 교환했다고 한다. 당시 공유한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는 도록은 물론, 별도로 발행된 심포지엄 자료집에 잘 나타나 있다.

심포지엄은 ‘디자인’, ‘공공성’, ‘상상’이라는 3가지 주제로 3회에 걸쳐 진행되었다. 자료집에 실린 ‘공공디자인의 새로운 출발’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유섭은 “‘공공디자인은 아무런 문화적 동기도 갖고 있지 않은 공무원과 시설업자 그리고 거기에 쉽게 동조하고 가담하는 순진한 디자이너의 의식 없는 손놀림에 의해 결정되고 만다. 다른 한편으로는 관공서의 공모나 입찰이라면 지레 움츠리고 일찌감치 외면해버리는 순수파 디자이너들도 오늘의 왜곡된 공공디자인의 현상에 대한 사회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어쨌든 이제라도 시작해야 할 바람직한 공공디자인의 출발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공공디자인을 바라보는 잘못된 시각을 바로잡는 일이다.”라고 지적하면서 공공디자인에 대한 새로운 접근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다.(Design Museum, 2001)

<de-sign korea: 디자인의 공공성에 대한 상상> 전시를 진행하는 주체에게 중요한 것은 공적 영역에 디자인이 부재하다는 문제의식이었다. 이러한 문제인식은 도록에도 등장한다. 도록 서두에는 2001년 11월 30일에 열린 기획자와 큐레이터의 좌담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전시 기획자인 엄혁은 한국 디자인 역사에서 디자인과 사회, 디자인과 공공영역의 만남이 없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디자인은 우리의 일상과 일상의 공간을 구성하는 결정적인 매개체인데 실제로 디자인에 대한 디자이너들의 자기 인식은 그렇지 못하다”고 지적한다.(Design Museum, 2002, p.14) 큐레이터인 이유섭은 “우리나라에 디자인이라는 개념이 생기고 디자이너라는 직업이 정착된 이래 대부분의 디자이너들은 개인의 욕망이라든지 기업의 욕망 또는 다른 어떤 집단의 사적 이익을 충족시키기 위해 일 해왔다”고 성찰하며 공적 영역에서의 디자인의 필요성을 주장한다.(Design Museum, 2002, p.10) 또 다른 큐레이터인 권혁수 역시 “이 전시가 공공영역의 디자인 환경에 걸 맞는 새로운 디자인, 디자이너 주체를 발견하고 그 주체의 인식적 관점과 실천적 행동을 모색하는 자리”라고 의미를 부여했다.(Design Museum, 2002, p.10)

전시의 문제의식은 분명했고, 전시 내용 또한 그러한 문제의식을 잘 보여주었다. 하지만 전시를 통해 드러난 상상이 공공디자인이라는 이름 아래 현실의 실천으로 구체화하는 데는 몇 년의 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자인의 역량으로부터 소외되었던 공적 영역을 주목했고, 공공디자인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며 변화의 필요성을 언급했으며, 구체적인 디자인으로 그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이 전시는 한국 공공디자인 역사의 출발점에 자리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3. 공공디자인의 확산

3. 1. 자동차 번호판 디자인 사건

2001년 말, <de-sign korea: 디자인의 공공성에 대한 상상> 전시 이후 디자인미술관에서는 매년 공공디자인 관련 전시를 이어갔다. 2002년에는 <간판과 디자인>, 2003년에는 <디자인이 있는 거리>라는 전시가 열렸다. 하지만 그러한 전시는 <de-sign korea: 디자인의 공공성에 대한 상상> 전이 그랬듯이 말 그대로 상상에 머물렀다. 다시 말해 디자인계 내부의 제한적인 행사에 불과했다는 말이다. 그것이 사회적 실천의 장으로 뻗어나가기 위해서는 결정적인 계기라 불릴만한 무엇이 필요했다.

2004년, 그런 계기가 우연히,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찾아왔다. 그해 1월, 건설교통부(이하 건교부)는 기존 자동차번호판에서 등록지역 표시를 없앤 새로운 전국번호판제도를 시행했다. 그 이전에는 자동차번호판에 지역 이름이 명기되어 있어서 자동차 소유자가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면 번호판을 바꿔야만 했다. 이사 때마다 자동차 번호판을 바꾸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다. 건교부에서는 이러한 시민들의 불편함을 없앤다는 취지에서 지역 이름을 뺀 새 자동차 번호판 제도를 시행했던 것이다.

이 제도가 시행된다고 했을 때 시민들의 반응은 매우 긍정적이었다. 그런데 2004년 1월, 실제로 제도가 시행되자 긍정적이었던 시민들의 태도는 부정적인 방향으로 급변했다. 문제는 번호판 디자인이었다. “60년대 지프에나 어울릴 디자인”, “촌스런 번호판 때문에 차를 못 사겠다”, “진짜 촌스럽지만 운전할 땐 보이지 않으니 그나마 다행”, “마치 놀이동산 범퍼카 번호판 같다” 등과 같은 디자인에 대한 불만들이 쏟아져 나왔다.(Kim, 2004) 비판들은 인터넷 공간을 중심으로 들끓었고, 신문이나 방송 매체도 그러한 시민들의 불만을 앞 다퉈 보도했다. 그 열기 때문에 정부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새 번호판 제도를 시행한 지 10여 일만에 건교부는 번호판을 다시 디자인하겠다고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로부터 두 달 후, 건교부에서는 한양대학교 디자인 기술공학연구소의 자문을 거쳐 여백과 글자 크기 등을 수정한 2개의 새로운 번호판 시안을 제시했다. 건교부에서는 디자인 전문기관의 자문을 거쳤으니 개선안에 대한 반응은 괜찮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을지 모른다. 만일 개선안에 대해서 또 다시 비난이 쏟아진다면 정말 난처한 상황에 처할 수 있기 때문에 불안이 더 컸을 것이다. 그러한 불안이 건교부로 하여금 조심스럽게 2개의 디자인 안을 내밀게 했고, 부처 홈페이지를 통한 인터넷 투표와 500여명의 전문가 의견을 수렴한 후에 최종안을 결정하겠다고 발표하도록 했다.(Hong, 2004) 건교부는 그렇게 나름의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여기서 눈에 띄는 부분 중의 하나가 의견을 수렴하겠다는 전문가의 수다. 정말 전문가 500명에게 자문을 구했는지 알 수 없으나, 500이라는 수는 아마도 정부가 관리하는 공공재의 디자인을 결정하는데 동원된 디자이너 수로는 전무후무한 숫자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제시한 개선안 2개도 비판에 휩싸였다. 인터넷 투표가 실시되자마자 “개선된 번호판을 기대했는데 색상, 문자, 디자인 모두 똑같다”, “이럴 바에는 아예 번호판을 떼고 다니자”, “번호판이 죄수번호 닮았다”, “그동안 뭘 했는지 모르겠다”와 같은 비난들이 쏟아졌다. 심지어 건교부 홈페이지가 다운되기까지 했다.(Eom, 2004) “우리 국민들을 거의 조삼모사에 나오는 원숭이 수준으로 생각하는 듯한 건교부의 알량한 일처리 방식”을 비판하는 시민들의 목소리는 더욱 커져갔다.(Lee, 2004) 시민들은 개선안 2가지를 모두 싫어했고, 인터넷 투표 결과도 그렇게 나왔다. 건교부는 결국 논란이 된 번호판을 폐기하고 다시 디자인하기로 결정한다.

당시 건교부 관계자들은 전문가 자문까지 구하며 진행했는데 왜 그러한 반응이 나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디자인이라고 해서 다 같은 디자인이 아니라는 것을, 디자이너라고 해서 다 같은 디자이너가 아니라는 사실을 당시의 공무원들은 몰랐던 것이다. 이후 자동차 번호판 디자인에 대한 시민들의 비판은 그것을 진행한 공무원들에 대한 비난으로 확대되어갔다.

“나라가 발전하려면 공무원이 누구보다 앞서가야 하고 늘 깨어 있어야 하는데 그 수준이 일반 국민보다 못한 것 같아 실망이다. … 공무원들이 시간이 날 때 박물관이라도 찾아가 우리 선조들의 미적 감각을 익힌다면 우리만의 독창적인 디자인을 키우는 데 최소한 걸림돌은 되지 않을 것이다.”(Hong, 2004)

공무원이 박물관을 찾아가 선조들의 미적 감각을 익히면 디자인을 보는 눈이 달라질지는 모르겠지만, 위 글은 자동차 번호판 디자인으로 촉발된 비판이 디자인에 대한 안목이 없는 공무원들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자동차 번호판 논란이 한창이던 시기에 새롭게 발표된 국가대표 축구팀 유니폼 디자인도 논란에 휩싸였다. 유니폼 앞면에 동그라미가 있었는데 이를 두고 “로또공 같다” “버스번호판 같다”는 비판이 쏟아진 것이다.(Lee, 2004)

3. 2. 공공디자인을 주목한 매체들

이 두 사건, 무엇보다 자동차 번호판 디자인 사건은 사회적으로 공공디자인에 대한 관심과 해당 용어를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디자인 대국은 언제, 촌티나는 차번호판‧로또공 같은 축구팀 유니폼”이라는 제목의 <국민일보> 기사에서는 ‘공공디자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자동차 번호판의 문제를 다루었다. 이 기사가 나가고 한 달 후인 2004년 3월, 우리나라가 제안한 6종의 안전표지가 국제표준으로 채택된 일이 있었다. 이를 알리는 <서울경제> 기사(Seoul Economics, 2004)에서도 자동차 번호판 사건을 언급하며 ‘공공디자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렇게 공공디자인을 언급하는 기사들이 하나 둘 매체를 장식하고 있던 2004년 5월, 소위 4대 일간지 중의 하나인 <동아일보>는 ‘공공디자인 도시를 바꾼다’라는 이름의 시리즈 기사를 내보낸다. 총 5회로 마련된 이 시리즈 기사는 ‘1. 움직이는 디자인: 차량과 차량번호판’, ‘2. 기능과 미관의 조화: 거리의 가구들’, ‘3. 도시의 표정: 간판과 도시 색채’, ‘4. ‘속옷’같은 미학: 신분증과 서식’, ‘5. 상징과 생산성: 지자체 등 공공기관의 CI’로 구성되었다. 이 시리즈 기사는 비중 있는 매체에서 일정한 기획을 통해 우리 공공디자인의 문제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와 파장이 적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시리즈 기사가 등장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직접적인 계기는 자동차 번호판 디자인 사건이었다. 시리즈 기사의 첫 대상이 자동차 번호판인 것은 그것이 직접적인 배경이었음을 드러내는 증거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몇 달간의 번호판 디자인 논란을 거치며 공공디자인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어느 정도 무루 익었다는 현실 인식도 기사를 기획한 중요한 배경이었을 것이다.

“‘공공 분야의 디자인은 사치인가?’ 최근 논란 끝에 폐기된 자동차 번호판에서부터 거리의 각종 구조물과 간판, 관공서의 로고와 서식 등에 이르기까지 관이 결정 또는 규제 권한을 갖는 이른바 공공디자인의 황폐함이 도마에 오르고 있다. 미적 감각은 물론 기능성마저 떨어져 ‘폐해’ 수준에 이르렀다는 목소리가 높다. 동아일보는 5회에 걸쳐 ‘세련된 도시환경에서 살고 싶다’는 시민들의 욕구가 실현 불가능한 것인지 짚어보고 대안을 모색한다.”(Na, 2004)

위 내용은 <동아일보>가 처음으로 내보낸 시리즈 기사의 첫 문단이다. 이 문단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무엇보다 다소 애매하기는 하지만 공공디자인에 대한 정의, 다시 말해 <동아일보> 기획팀이 공공디자인을 무엇으로 인식하고 있는지를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공공디자인은 관이 결정 또는 규제 권한을 갖는 거리의 각종 구조물과 간판, 관공서의 로고와 서식 등의 디자인을 말한다. 그리고 그 공공디자인은 세련된 도시환경에서 살고 싶다는 시민들의 욕구충족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 기사에서 이야기하는 공공디자인의 대상은 2001년 말, <de-sign korea: 디자인의 공공성에 대한 상상> 전시에서 다루어졌던 대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다르다. <de-sign korea: 디자인의 공공성에 대한 상상> 전시가 디자인에서 공공성의 문제를 매개로 공공디자인을 이야기했다고 한다면, <동아일보> 기획 기사는 도시 미화 활동으로 공공디자인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3. 3. 정부의 반응

기사가 나가고 1년 후인 2005년 8월, 문화관광부내 공간문화과라는 새로운 조직이 문화정책국에 신설되었다. 그것은 “디자인에 대한 시민의 요구수준이 높아지면서 관료사회도 이제는 공공디자인에 대해 눈을 뜨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와 같은 시민의 비판적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Na, 2004) 실제로 공간문화과는 문화적 공간환경 조성, 간판문화 개선, 공공시설물 등의 디자인 진흥, 공간문화 인식 제고 등을 담당 사업 영역으로 제시하였다. 사업 내용을 보면 이 조직이 공공디자인을 업무의 주요 대상으로 취했음을 알 수 있다.

공간문화과가 설립되기 몇 달 전인 2005년 5월, 문화관광부는 산하 독립 법인으로 <디자인 문화원> 설립을 추진 중이라고 밝힌다.(Park, 2005) <디자인 문화원> 설립은 물론 2004년에 발표한 ‘새로운 한국의 예술정책(새예술정책)’에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새예술정책에 공공디자인 지원센터 설립이나 공공디자인 박람회 개최 등과 같은 내용이 디자인 미술관 독립법인화와 더불어 중점 추진과제로 포함되어 있는 점이다. 왜 그랬을까? 물론 새예술정책 마련에 참여했던 이들이 공공디자인에 대한 인식을 별도로 하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새예술정책에 공공디자인관련 내용이 비중 있게 반영된 것은 자동차번호판 논란이 한창이던 2004년에 그것이 마련되었다는 사실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즉, 새예술정책의 마련 주체가 자동차 번호판 디자인 사건이나 국가대표 축구팀 유니폼 디자인 사건으로 촉발된 공공디자인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배경으로 <디자인문화원> 설립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는 말이다. 당시 새예술정책 마련에 참여했던 전문가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관료를 설득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명분은 없었을 것이다.

이후 <디자인문화원>은 <한국디자인문화재단>이라는 이름으로 2008년 3월에 설립되었다. <한국디자인문화재단>에서는 공공디자인뿐만 아니라 디자인관련 전시, 교육, 정책연구, 출판 등 다양한 사업들을 펼치며 디자인문화 활성화에 역할을 했다. 하지만 채 자리도 잡기 전인 2009년 12월, 석연치 않은 이유로 문을 닫고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으로 합병되어 버린다. 2009년은 서울시를 중심으로 시설물 중심의 공공디자인 사업들이 전국적으로 펼쳐지고 있던 때였다. 어쩌면 문화관광부가 생각하는 <한국디자인문화재단>의 역할은 서울시가 추진하고 있던 그런 사업들을 담당하는 것이었는지 모른다. 쉽게 말해 단기적이고 가시적이며 디자인스런 결과물들의 생산 말이다. 하지만 <한국디자인문화재단>의 관심은 거기에 있지 않았고, 사업의 내용도 그것과는 달랐다.

3. 4. 인터넷의 영향

만일 자동차 번호판 디자인 사건이 몇 년 앞서 일어났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당시처럼 그렇게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번호판이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마음에 들지 않음을 표현하는 인터넷과 같은 창구가 그 이전에는 없었거나 그렇게 발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인터넷은 자동차 번호판 디자인 사건을 국민적 사건으로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인터넷은 김대중 정부에서 정보통신부를 만들고 관련 인프라와 정책을 만들어가면서 급속히 대중화되었다. 2000년에는 인터넷 사용인구가 1,000만을 넘어선다. 그리고 자동차 번호판 디자인 사건이 있던 2004년에는 사용인구가 3,000만 명을 돌파했다.(Woo, 2004) 물리적 공간과 다른 새로운 사이버 공간이 생겼고, 그곳에서 활동하는 이들은 네티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의견들을 쏟아냈다.

2004년 1월, 자동차 번호판 디자인을 하나의 사건으로 만든 것은 바로 그 네티즌들이었다. 자유로운 의사표현이 가능한 이 공간에서 네티즌들은 자동차 번호판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했고, 공감하는 의견들을 퍼 날랐다. 전통적인 매체마저도 이들 네티즌의 의견을 토대로 방송과 지면에 내용을 소개했고, 바로 그러한 인터넷 매체의 속성 때문에 당시의 그 사건은 강한 폭발력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인터넷은 공공디자인의 개념과 용어를 사회적으로 확산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4. 결론

본 연구는 한국에서 공공디자인이 언제, 어떠한 계기로 출현했는지를 밝히고, 이후 그 개념이 어떻게 변용되며 대중적으로 확산되어 갔는지를 드러내는데 목적이 있다. 연구결과 2000년대 중반 학회나 협회를 중심으로 한 디자인계의 움직임이 본격화되기 이전에 이미 공공디자인이라는 용어와 개념이 출현했고, 관련 담론이 사회적으로 확산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공공디자인이라는 용어는 2001년 디자인미술관에서 열린 <de-sign korea: 디자인의 공공성에 대한 상상> 전시와 관련 심포지엄에서 처음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 전시는 공공디자인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공공디자인의 대상 영역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공공재와 공공시설물 등을 디자인의 대상으로 주목하였다.

둘째, 공공디자인의 개념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킨 계기는 2004년 시행되어 시민들의 거센 저항을 불러온 자동차 번호판 디자인 사건이었다.

셋째, 자동차 번호판 디자인 사건을 계기로 시민들의 디자인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다. 거기에는 인터넷의 확산에 따른 네티즌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동아일보>를 비롯한 전통적인 매체에서도 공공디자인을 다루면서 공공디자인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이해가 만들어 졌다.

넷째, 자동차 번호판 디자인 사건을 계기로 정부가 공공디자인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정부 내에 관련 조직이 만들어졌고, 그 조직에서 공공디자인 사업들이 추진되기 시작한 것이다.

Notes

Citation: Oh, C. S. (2018). The Emergence of Public Design and Its Popularization. Archives of Design Research, 31(2), 171-179.

This work was done by 2016 Konkuk University Research Fund.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