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s of Design Research
[ Article ]
Archives of Design Research - Vol. 34, No. 3, pp.243-257
ISSN: 1226-8046 (Print) 2288-2987 (Online)
Print publication date 31 Aug 2021
Received 26 May 2021 Revised 09 Jul 2021 Accepted 13 Jul 2021
DOI: https://doi.org/10.15187/adr.2021.08.34.3.243

해방 이후 1960년대 말까지 서울대학교 디자인 교육에서 이순석의 역할

Hyeon Joo Kang강현주
Department of Design Convergence, Professor, Inha University, Incheon, Korea 인하대학교 디자인융합학과, 교수, 인천, 대한민국
The Role of Lee Sun-suk in Design Education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from 1946 to the End of the 1960s

초록

연구배경 이순석(1905~1986)은 초창기 한국 디자인 교육 및 디자인 진흥정책 마련에 초석을 놓은 디자인 교육자다. 국내 최초 디자이너 개인전(1931)을 개최하기도 한 이순석은 그동안 디자인계에서 잊힌 존재였으나 그의 활동은 응용미술이 현대디자인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함의를 지니기에 한국 디자인사 맥락에서 재고찰될 필요가 있다.

연구방법 본 연구는 문헌연구를 중심으로 진행됐다. 선행연구들을 검토하고 이순석이 남긴 작품과 글을 살펴보았다. 1960년대에 이순석의 수업을 들었던 정시화의 인터뷰 글을 참고하고 초창기 서울대학교 디자인 교육 관련 자료도 조사했다.

연구결과 해방 이후 1960년대 말까지의 서울대학교 디자인 교육은 세 시기로 구분된다. 첫째, 1946년부터 1958년까지로 주로 일본의 영향을 받아 응용미술로서의 디자인 교육이 이루어졌다. 둘째, 1959년부터 1965년 사이에 교수진이 다양해지고 서구 디자인의 영향이 본격화되었다. 셋째, 1966년 이후 정부의 디자인 진흥정책 시행과 사회 변화를 반영해 디자인과 공예가 세부전공으로 나뉘어 구분되었다. 이순석은 서울대학교 개교 당시 디자인 교육의 기본 틀을 마련하는 역할을 했고 6.25 전쟁 후 1958년까지 응용미술과의 유일한 전임교수였다. 그러다 1959년부터 1965년 사이에 미국에서 유학했거나 본교 출신인 교수들이 임용되어 디자인 교수진이 안정화되면서 공예에 전념했다. 이순석은 1966년에 서울대학교 부설 기관으로 설립된 한국공예디자인연구소(한국디자인진흥원의 전신)의 초대 소장을 맡고 상공미전 심사위원장으로 활동하며 국가 디자인 진흥정책 수립과정에 영향을 미쳤다.

결론 일제강점기에 응용미술을 공부한 이순석은 말년에 공예가로서 생애를 마쳤다. 하지만 그의 초창기 디자인 교육 활동과 사회적 역할은 해방 이후 1960년대 말까지 한국 디자인계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1970년대에 들어 후속 세대 디자이너들은 이순석의 영향력과 한계에 도전하며 한국 디자인의 산업화와 현대화를 이끌었다.

Abstract

Background Lee Sun-suk (1905~1986) is a design educator who laid the foundation for design education and design promotion policy in Korea in the early days. The exhibition (1931) he held after studying abroad in Japan is considered as the first solo designer exhibition in Korea. Lee Sun-suk started design education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SNU) in 1946. In his later years, he devoted himself to crafts and was gradually forgotten in the design field. However, his life and activities have important implications for the advancement of applied art to modern design, and thus, need to be reconsidered in the context of Korean design history.

Methods This research was mainly carried out by reviewing literature. Previous studies on Lee Sun-suk's life and activities, and his works and writings were reviewed. Interviews with Chung Si-hwa, who attended Lee Sun-suk's class in the 1960s, were referred to. The research also surveyed materials related to design education at SNU in the early days.

Results From 1946 to the end of the 1960s, design education at SNU was divided into three periods. First, from 1946 to 1958, design education as applied art was mainly influenced by Japan. Second, between 1959 and 1965, the faculty was diversified and the influence of Western design began in earnest. Third, the government's implementation of the design promotion policy in 1966 and social change divided the fields of design and crafts into individual majors at SNU. Lee Sun-suk played a role in preparing the basic framework for design education when SNU opened in 1946. During the period from 1959 to 1965, he expanded the faculty by appointing professors who studied in the United States or graduated from SNU. In 1966, he became the first director of the Korea Craft Design Research Institute (predecessor of KIDP) affiliated with SNU. He also served as the chairman of the jury at the Korean Commercial & Industrial Art Exhibition that started in the same year and contributed to the national design promotion policy.

Conclusions Lee Sun-suk studied applied art in the Japanese colonial era and chose his identity as a craftsman in his later years. However, his activities and role as a design educator at SNU in the early days helped us to understand the situation in which Korean design faced from 1946 to the end of the 1960s. The younger generation of designers who newly emerged in the 1970s, challenged the influence and limitations of Lee Sun-suk and led the industrialization and modernization of Korean design.

Keywords:

Lee Sun-suk, Applied Art, Design Education, Korean Design History, 이순석, 응용미술, 디자인 교육, 한국 디자인사

1. 서론

1. 1. 연구 배경 및 목적

이순석(1905~1986)은 초창기 한국 현대 공예를 이끈 선구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해방 이후 1960년대 말까지 디자인 교육과 디자인 진흥정책 형성 과정에 영향을 미친 디자인 교육자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개최한 <이순석 도안전>(1931)이 국내 최초 디자이너 개인전이라 평가되면서도 한국 디자인사 담론에서 그에 대한 고찰이 미미했던 것은 말년에 이순석이 석공예에 전념해 공예가로서의 정체성이 굳어졌기 때문이다.1) 1970년대 초반, 디자인에 대한 사회적·산업적 수요가 커지고 응용미술이 현대디자인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후속 세대는 이순석의 도안 및 응용미술과 차별화되는 디자인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추구했다(Chung, 2011). 이순석이 공예가로서 생애를 마친 것은 그의 선택이지만 또한 당대 한국 디자인계가 처했던 사회문화 조건과 세대 역할의 한계가 투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해방 이후 1960년대 말까지 이순석 활동의 기반이었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의 위상 및 역할 변화에 대한 고찰을 통해 초창기 국내 디자인 교육과 국가 디자인 진흥정책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1. 2. 연구 방법 및 범위

본 연구는 문헌연구를 중심으로 진행하였다. 이순석과 관련된 선행연구와 신문 및 잡지 기사를 검토해 그의 생애와 활동, 그리고 작품을 조사했다. 이순석 작고 7년 후 출간된 『하라 이순석 작품집』(1993)과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디자인·공예교육 50년사: 1946~1996년」(1996), 「이순석의 생애와 작품 연구」(1999)를 기초 자료로 검토하고, 「미술로서의 디자인: 이순석의 1946~1959년 응용미술교육」(2010),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시각디자인교육, 1965~1994: 디자이너-교수 3인의 활동을 중심으로」(2013), 『한국의 디자인』(2013),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70년사』(2016) 등을 참고했다. 이와 함께 대학 재학시절 이순석으로부터 응용미술로서의 디자인 교육을 직접 받았고, 생전에 그와 대담을 나누었던 정시화(1942년생, 61학번)의 인터뷰 글을 통해 디자인 교육자이자 디자인 정책가로서 이순석의 면모를 파악했다. 또한 안정언(1942년생, 60학번)과의 인터뷰도 진행했다. 본 연구에서는 이순석이 서울대학교 도안과 설립에 기여하고 교수로 부임했던 1946년부터 1970년의 정년퇴임까지 약 25여 년간의 시기를 다루었다.


2. 이순석의 생애와 주요 활동

이순석은 1905년 충청남도 아산에서 태어나 1986년에 타계했다. 어릴 적 프랑스인 가톨릭 신부의 영향으로 서구의 문화예술을 접하게 된 그는 근대적 성격의 미술단체인 서화협회가 운영한 서화학원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 1925년에 일본 유학을 가서 동경 우에노미술학교(현 동경예술대학 미술학부) 도안과를 졸업하고 1931년에 귀국했다. 그해 동아일보사 강당에서 <이순석 도안전>을 개최해 유학 시절 작업한 상업미술, 공예미술, 실내장식 작품 30여 점을 선보였다. 이 개인전을 주목한 화신백화점 박흥식 사장의 권유로 그는 백화점 광고선전 관련 업무를 담당하게 됐다. 하지만 이듬해 건강상의 이유로 사직해 1932년부터 1935년까지 3년간 소공동에서 찻집 겸 개인 작업실인 <낙랑파라(樂浪parlour)>2)를 운영하며 다양한 분야의 문화예술인들과 교류했다. 이후 1936년부터 약 3년 동안 노고단에서 경성양호장3)을 경영했던 이순석은 1939년부터 친형이 운영하는 이명래고약집에서 일했다.

해방 후 미군정청 문교부 교화국 예술과 고문에 위촉된 그는 친분이 있었던 문교부 오천석 차관의 요청으로 국립종합대학교 내 예술대학(안) 구상에 참여했다. 서울대학교가 개교하자 예술대학 미술학부 도안과 교수로 부임해 1970년 2월에 정년퇴임했다.

이순석은 1949년에 동아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에서 두 번째 개인전인 <이순석 장식도안전>을 개최해 한국 전통문화를 모티브로 한 실내장식 소품 50여 점을 전시했다. 이후 1965년, 1970년, 1971년, 1973년에 개인전을 개최했고 1976년에는 일본에서 개인전을 열었는데 1960년대 중반 이후에는 대부분 공예 작품을 전시했다. 그의 주요한 디자인 작품으로는 대통령 무궁화대훈장(1949), 공군 모표 및 계급장(1949), 대법원 법복/법모/휘장(1953), 시민회관 내외부 장식(1960), 최고위원 휘장(1962), 진명여고 마크/교기(1965), 여의도 국회의사당 해태 석조상(1973) 등이 있다(Chung, 1978). 1966년에 서울대학교 부설 한국공예디자인연구소(현 한국디자인진흥원의 전신)의 초대 소장을 맡았다. 또한 같은 해 출범한 대한민국상공미술전람회(상공미전)의 초대 심사위원장이 되었다.


3. 이순석과 초창기 서울대학교 디자인 교육 및 디자인 진흥정책

3. 1. 서울대학교 디자인 교육의 출발과 1970년대 초반까지의 상황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은 1946년 예술대학 미술부로 출발해 1953년에 단과대학으로 승격되었다. 개교 당시 문리과대학, 사범대학, 법과대학, 상과대학, 공과대학, 의과대학, 치과대학, 농과대학, 예술대학(미술부, 예술부) 등 9개 단과대학은 예술대학 미술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해방 이전에 관련 분야의 근대적 교육기관이 있었다. 한불수교조약(1886) 무렵 프랑스와 공예미술학교 설립에 대한 협의가 있었으나 러일전쟁(1904~ 1905) 이후 일본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더 이상의 논의가 진척되지 못했다. 일제강점기에 근대적인 미술 교육을 전문적으로 받으려면 외국에 나가야 했고 유학생 중 대다수가 일본을 선택했다. 설립 초기 미술부 교수진의 대다수가 일본 유학파였던 데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다. 개교 당시 미술부에는 제1 회화과(동양화), 제2 회화과(서양화), 조소과, 도안과 등 네 개 학과가 있었고 9명의 교수 중 8명이 일본에서 유학했다(Kim, 2016).

Faculty of Fine Arts (1946)

도안과 및 응용미술과 내 세부전공으로는 1968년에 상업미술과 공예미술이 먼저 도입됐고 1972년에 다시 상업미술, 공업미술, 공예미술로 나뉘었다. 1983년에 응용미술과가 산업미술과와 공예과로 분리가 되었고, 1989년에 산업미술과가 산업디자인과로 개칭됐다. 1998년 학부제 도입 이후 현재까지 디자인학부로 운영되고 있다.4)

Changes in the Names of Design Departments and Majors

학과 입학생 수는 매년 변동이 있다가 1962년에 회화과 30명, 조소과 20명, 응용미술과 20명이 되었다. 1968년에 미술대학 정원은 70명 그대로였으나 회화과와 조소과에서 각각 5명씩 넘어가 응용미술과 학생정원이 20명에서 30명으로 증원되어 1981년 대학 졸업정원제 도입 전까지 유지됐다.

Number of Freshmen in the Dept. of Doan (1946~1950) and Dept. of Applied Art (1951~1970)

1968년에 응용미술과의 입학정원이 늘어난 것은 정부의 디자인 진흥정책 수립과 디자인 졸업생에 대한 사회적 수요 증가가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1960년대 중반 국내 디자인계 상황을 김교만(50학번)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1965년경부터 우리나라는 경제발전과 병행하여 인쇄술, 광고기술, 매스미디어의 다양화와 그래픽 교육의 전문화로 그래픽 디자인계의 급진적 발전과 변모를 가져왔다. (중략) 과학의 물결에 따라 출현한 사진은 매스커뮤니케이션과 광고계에 군림하여 사진 선풍 시대를 이루어왔다.5)

1966년부터 상공부 주관으로 대한상공미술전람회(상공미전)가 매년 개최되었고, 1967년에는 광고대행사의 전신인 합동통신 광고기획실6)이 서구적 개념의 광고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서울대학교 응용미술과에서 1965년 12월에 김교만과 조영제 두 사람을 함께 임용해 상업디자인 분야 강의를 담당하게 한 것은 이 무렵 막 활성화되던 디자인계의 변화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었다. 1968년에 응용미술과의 입학정원이 증원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고 볼 수 있다.

Faculty Changes in the Dept. of Doan (1946~1950) and Dept. of Applied Art (1951~1970)

도안과 설립 당시 이순석과 함께 부임했던 이병현은 이듬해인 1947년에 사직했고 1948년에 부임한 유영국 역시 1950년에 그만두었다. 강사였던 김정환이 1954년부터 1960년까지 대우조교수 직으로 근무하기는 했지만, 1959년 김정자 부임 전까지 이순석은 응용미술과의 유일한 전임교수였다. 그러다가 1961년 권순형, 1963년 민철홍, 1965년 김교만과 조영제가 차례로 부임했고 1969년에 강찬균, 이순석이 퇴임한 해인 1970년에 양승춘이 임용되었다. 초창기 서울미대 디자인 교육은 일본의 영향을 크게 받았지만 미국에서 유학한 교수들이 부임하면서 변화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서구 디자인의 영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미대 학장인 장발은 응용미술과 교수는 아니었지만 미국 유학시절 쌓은 디자인 경험을 다양한 경로로 응용미술과 학생들에게 전달하고자 했다. 미국 유학파인 김정자가 응용미술과 교수로 부임하게 된 것은 장발 학장의 추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 국무성 산하 국제협력국(ICA)은 6.25 전쟁으로 피폐해진 한국의 산업화를 지원하기 위해 1957년에 한국공예시범소를 설립했다. 김정자는 이곳의 시설과 기자재를 활용하며 관계자들과 교류했다. 한국공예시범소는 1958년부터 ‘디자인 교수요원 해외 연수 프로그램’을 실시했는데 첫해 권순형이, 이듬해 민철홍이 이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에 다녀온 후 응용미술과 교수로 부임했다. 김정자와 달리 권순형(49학번)과 민철홍(54학번)은 본교 출신이었고 이후 부임한 김교만(50학번), 조영제(54학번), 강찬균 (57학번), 양승춘(59학번)도 모두 응용미술과 졸업생으로 이순석의 제자들이었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70년사』(2016) 집필진에 확인해 본 결과 대학에 1970년 이전 미술대학 교과목 자료들이 남아 있지 않아 초창기 교육과정을 문서로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에 집필진은 졸업생들의 시간표와 성적표를 대조하는 방식으로 초창기 교과목 기본 체계를 정리했다(Kim, 2016). Table 5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70년사』에 수록된 도안과 및 응용미술과 교과목을 다른 선행연구 자료들과 비교·검토해 재정리한 것이다.7)

Design Curriculum in the Early Period

도안과 출범 시기에 개설된 서예, 해부학, 구성, 도학 과목은 1960년대 중반까지 유지되었다. 1950년대에 사군자가 사라지고 사진이 개설됐으며 고등도학이 추가되었다. 디자인 전공실기에 해당하는 교과목은 1940년대 중반에는 미술, 고등미술이었다가 1950년대에 실기, 보통실기, 고등실기, 입체의장 등으로 바뀌었고 1960년대 초반에는 상업미술, 공예미술, 실내장치, 건축미술 등 보다 전문화된 명칭으로 개설되었다. 1968년 세부전공 도입 때 상업미술과 공예미술은 과목명이자 세부전공 명칭으로도 사용됐다. 1960년대 초반까지 1학년 기초과목 외에 다른 전공과목들은 학년 구분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상업미술과 공예미술의 경우 2, 3, 4학년 때 총 28학점(56시간)을 이수하면 됐고 실내장치는 3, 4학년 때 총 8학점(16시간), 건축미술은 4학년 때 4학점 (8시간)을 이수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수업을 운영한 것에는 강의실 부족도 한 원인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1963년 4월 연건동 캠퍼스로 이전하기 전까지 미술대학의 교육환경은 다른 단과대학보다 훨씬 열악한 조건이었다.

1960년 응용미술과에 입학해 1969년에 졸업한 안정언은 4학년 때인 1968년에 세부전공이 생겼다고 말했다.8) 하지만 전공 도입 초기에는 공예미술 수업에서 공업미술을 가르치는 등 디자인과 공예 수업의 차별화가 잘 이루어지지 못했다. 1969년에 응용미술과 석사과정이 신설돼 1971년에 첫 대학원 졸업생이 배출되고9) 1972년에 공업미술이 세부전공으로 추가되면서 디자인과 공예, 상업미술(시각디자인)과 공업미술(공업디자인)의 관계가 비로소 정립되기 시작되었다. 응용미술과 교수들의 전공 분야도 점차 뚜렷해졌다. 상업미술은 김교만, 조영제, 양승춘 세 교수가 맡고 공업미술은 민철홍, 공예미술은 권순형과 강찬균이 담당했다. 김정자는 미대 공통과목이나 기초과목을 주로 맡았다. 1976년에 상업미술이 상업디자인(1981년 다시 시각디자인으로 개칭)으로, 공업미술이 공업디자인으로 바뀌어 전공 명칭에 디자인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10) 1학년에서는 학과 전공과목 없이 교양과목과 미술대학 기초과목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2학년 때 학과 공통 전공과목이 개설되었고 3학년 때 세부전공 교과목 교육이 시작됐다.

3. 2. 초창기 디자인 교육과 디자인 진흥정책 수립과정에서 이순석의 역할

서울대학교 응용미술과는 시대 흐름과 디자인에 대한 사회 요구를 반영해 교수진 구성과 교과과정 편성을 개선해 나갔다. 무엇보다 응용미술과의 세부전공 도입은 정부 디자인 진흥정책 수립과 연관이 있었다. 1965년 9월 청와대 수출확대회의에서는 정부의 수출 증진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산학협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합리적이면서 디자인이 우수한 제품을 생산하기 위한 기구 설치를 의결했다(Oh, 2020). 그 결과 이듬해인 1966년에 서울대학교 부설 기관으로 한국공예디자인연구소가 설립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7년 9월 1일에 이 연구소를 방문해 ‘미술수출’이라고 쓴 친필 휘호를 남겼다.11)

Figure 1

President Park Chung-hee's Handwriting on Art Export (1967)

하지만 한국공예디자인연구소는 1969년에 한국디자인센터로, 곧 다시 한국수출디자인센터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1970년에 한국포장기술협회 및 한국수출품포장센터와 통합되어 한국디자인포장센터가 됐다. 그해 상공부에서는 디자이너 등록요령을 고시했고 1971년에 처음으로 전국디자이너대회를 개최했다. 이후 한국디자인포장센터는 1972년에 국제그래픽디자인단체협의회(ICOGRADA), 1973년에 국제산업디자인단체협의회(ICSID)에 가입해 국제교류를 시작했다. 한편, 민간영역에서도 한국그래픽디자인협회(KSGD, 후에 KSVD로 명칭 변경), 한국인더스트리얼디자이너협회(KSID), 한국디자이너협의회(KDC) 등이 1972년에 창립되어 디자이너들이 상호 소통하고 교류하는 장이 만들어졌다.

이순석은 해방 후 도안과 출범과 응용미술과의 초창기 디자인 교육에 초석을 놓는 역할을 했지만 디자인과 공예가 분리되는 과정에서 공예 교수가 되었다. 하지만 서울대학교를 필두로 국내 대학 디자인 교육 수준이 전반적으로 향상되고 이를 기반으로 국가 디자인 진흥정책이 수립되는 과정에서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다. 이러한 이순석의 생애와 활동은 8.15 광복 후 미 군정기를 거쳐 정부 수립기, 4.19혁명, 5.16쿠데타, 그리고 10월 유신에 이르기까지 격변해온 한국 사회와 디자인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그의 서울대학교 재임기간동안 한국 사회와 디자인계의 주요 변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Changes in Korean Society and Lee Sun-suk’s Activities

미 군정청은 해방 후 교육업무를 담당해온 학무국을 문교부로 승격시키고 “국립서울대학교설립안”(약칭 국대안)을 발표했다. 국대안의 주요 내용은 일본이 설립한 경성제국대학의 명칭을 서울대학으로 변경하고 기존 3개 학부 외에 일제강점기에 설립된 다른 국·공립 및 사립 전문학교들을 통합해 국립종합대학교를 만든다는 것이었다. 군정청은 기존 학교 건물과 설비, 전문 인력을 활용할 수 있어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방안이라고 했지만 해당 교육기관의 교수와 학생들만이 아니라 사회 각계 인사들도 국대안반대운동을 치열하게 벌였다. 이에 미군정은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1947년 5월에 “국립대학안에 관한 수정법령”을 공포했다. 국대안에 따라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이 추진되고 있을 때 이순석은 문교부 교화국 예술과 고문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는 경향신문에 12회에 걸쳐 연재한 「정년퇴임한 석학들의 회고기: 노교수와 캠퍼스와 학생」(1974)이라는 글에서 국립서울대학교 창설을 주도한 오천석12)과의 인연을 언급하며 당시 상황과 자신의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당시 문교부 장관에 유억겸 씨, 차관에 오천석 씨였는데 오 차관댁이 역시 북아현동이어서 출근할 때 오 차관의 차로 같이 갈 때가 많았다. 하루는 오 차관이 출근하는 차 안에서 절대 비밀이라고 전제하고 “서울대를 국립종합대학으로 하는데, 미술대학을 두어야겠는데 그 계획을 구상해보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나는 평소 절실히 느끼던 것이 실행될 기회라고 생각, 곧 학과, 실기교수진, 시간배정 등 세부계획을 짜서 오 차관에게 주었다. 오 차관이 이 계획안을 보고 “학장을 누구로 했으면 좋겠느냐”고 추천을 해달라고 해서 나는 고희동, 이종우, 장발 씨 등 4~5명의 인사를 얘기했더니 “이렇게 많이 얘기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웃으면서 그중에서 한 사람만 추천하라고 해서 마지막으로 장발 씨를 천거했다. (중략) 그랬더니 오 차관이 좋다고 하면서 한번 장 씨를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장 씨를 찾아가 이런 내용을 이야기했더니 “미대가 되나?” 하면서 의문을 표시했다. 나는 좌우간에 근일 중 오 차관을 만나 수락하라고 권하고 나왔다. 며칠 후 오 차관을 만나고 미대를 맡기로 했다고 해서 둘이서 교수진을 짜고 교사 문제 등을 의논하여 오늘의 서울대 미대를 탄생시켰다. 그 당시 서울대 미대가 독립된 단과대학으로 설립되지는 않고 예술대학 미술부로 발족했다13)

1945년 12월부터 미 군정청 학무국 학무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장발이 예술대학 미술부 부장이 된 것은 그가 일본과 미국에서 유학을 한 경험이 있고 당시 미 군정청이 한국인을 요직에 발탁할 때 선호했던 기독교 신자, 중산 지주, 고등교육 이수자 등과 같은 자격조건을 충족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Kim, 2016). 장발은 미국형 종합대학교 형태의 국립대학을 설립하려는 미군정의 취지를 잘 이해하고 실천할 인물로 평가됐다. 하지만 미술부 교수진 대부분이 일본 유학파로 네 개 학과에 모두 동경미술학교 출신의 교수들이 있었기 때문에 미술부의 실제 교육과정과 운영은 일본의 영향을 주로 받았다.

Change in the Number of Faculty (1946~1970)

전임교수 수는 6.25 전쟁으로 일시 감소했다가 다시 늘었는데 주목할 시기는 1961년과 1965년, 그리고 1969년이다. 1961년에는 15년간 학부장과 학장을 지낸 장발이 물러났고, 응용미술과에 본교 졸업생 출신의 첫 전임교수로 권순형이 부임했다. 이후 민철홍에 이어 김교만과 조영제가 임용되면서 응용미술과와 서양화과 전임교수 수가 6명씩으로 동일해졌다. 강찬균이 부임한 1969년에는 처음으로 응용미술과 전임교수 수가 서양화과보다 많아졌다. 개교 후 줄곧 전임교수 수에서 우위를 보여온 서양화과보다 응용미술과의 전임교수 수가 많아진 것은 제3공화국이 국가 정책 차원에서 디자인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영향이 컸다. 이순석은 정시화와의 인터뷰(1978)에서 1960년대 중반의 디자인계 상황과 본인의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나라에 디자인센터가 꼭 있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미술 대학을 졸업한 우수한 전문 디자이너들을 흡수해서 우리나라의 디자인 진흥을 위해서 연구하는 전문연구기관이 꼭 필요했고, 특히 산업과 학문을 연결, 관장하는 기관으로서의 센터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센터가 설립되기 직전, 그러니까 약 15년 쯤 전에 국제기능올림픽 관계로 일본에 갔을 때 보고 온 대만의 염직물만을 취급하는 디자인센터, 그리고 인도 뉴델리의 디자인센터를 보고 더욱더 그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귀국 후 어느 날 박정희 대통령과 점심식사를 함께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디자인센터 설립에 관한 문제와 상공미전 신설에 관한 건을 강력히 요청해서 급기야 당시의 상공부 장관이던 박충훈 씨와 본격적인 준비에 착수하게 되었지요. 예산 관계로 신축 부지의 매입이 어려워 궁리 끝에 우선 당시 서울미대의 땅을 300평 가량 빌리기로 하고 건물 신축은 상공부가 맡아서 자금이 생기는 대로 조금씩 조금씩 지어서 근 3년이나 걸려 2층 건물이 서게 되었던 겁니다. 이렇게 해서 1966년 8월에 사단법인으로 출발되어 이사장에 박갑성(당시 서울미대 학장) 씨, 소장에 제가 취임했습니다. 어쨌든 응용미술계의 숙원이었던 센터 설립은 우리나라 산업디자인의 획기적인 전환점이 된 것으로 압니다. 그 후 센터는 한국포장기술협회와 한국수출포장센터를 흡수해서 현재의 한국디자인포장센터로 확대되었습니다. 초대 소장으로서 나는 당시 디자이너들의 대우 문제나 시설 확장 문제 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기억이 납니다.14)

상공미전 초대 심사위원장이자 심사위원이었던 이순석은 1970년대 초반까지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Table 8에 나타나 있듯 제1회 상공미전 심사위원 23명 중 17명이 그의 제자였고(Kim, 2020), 제6회 때까지 대통령상 수상자 6명 중 5명이 서울대학교 응용미술과 출신이었다.15)

The List of Judges for the 1st Commercial and Industrial Design Exhibition (1966)

The List of Presidential Award Winners at the Commercial and Industrial Design Exhibition from 1966 to 1971

제3공화국의 국가 디자인진흥정책은 상공미전 개최와 한국디자인포장센터 운영이 두 축을 이루었는데 초기 정책 수립 및 시행 과정에서 이순석을 비롯해 서울대학교 응용미술과 교수와 졸업생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디자인계는 디자인실무 현장보다 대학 디자인 교육 중심의 디자이너 생태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4. 결론

한국 디자인사의 맥락에서 이순석을 재조명해야 하는 이유는 그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고찰이 1970년대 이전의 국내 디자인 상황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있어 하나의 실마리가 되기 때문이다. 이순석의 사례는 디자인 발전과정에서 사회적 조건과 디자이너의 세대 역할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해방 후 디자인 교육자로서 이순석의 역할 변화는 다음과 같이 세 시기로 구분해볼 수 있다.

첫 번째는 1946년부터 1958년까지로 이순석은 도안과 출범과 초창기 응용미술과 교육과정 수립을 주도했다. 이병현과 유영국이 잠시 재직하기는 했지만 기간이 매우 짧았고 김정자 부임 전까지 이순석은 학과의 유일한 전임교수였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유학을 다녀온 그에게 디자인은 일본식 도안이자 장식의 개념으로 받아들여졌고 공예와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는 응용미술이었다. 1949년부터 1955년까지 응용미술과에 재학하며 그의 수업을 들었던 박대순과 권순형은 이순석이 십장생을 이용한 담배갑 도안이나 포스터, 책표지, 방석무늬 도안 등 장식적 성격의 과제를 주로 내주었다고 밝혔다(Hong, 1993). 1960년부터 1969년까지 응용미술과를 다닌 안정언에 따르면 1960년대에도 이순석의 수업내용은 1950년대와 큰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16)

두 번째 시기는 1959년부터 1965년까지로 미국에서 공부한 김정자, 권순형, 민철홍이 차례로 부임하면서 응용미술과에 서구식 디자인 교육 개념 및 수업방식이 도입되었다. 이후 김교만과 조영제가 상업미술을 전담하는 전임교수로 부임하면서 디자인과 공예 수업이 차별화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 또 한 가지 중요한 변화는 폐소된 한국공예시범소의 디자인 설비와 기자재가 서울대학교에 기증되어 디자인실습실이 갖추어진 점이다. 디자인 전임교수 수가 늘어나고 공간과 시설이 안정되면서 이순석은 점차 공예 작업에 몰두했다.

세 번째는 1966년부터 1970년까지로 이순석은 한국공예디자인연구소의 초대 소장이자 상공미전의 심사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이 시기에 디자인계 안팎에서 이순석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개인적 역량과 의지에 기인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그보다는 해방 이후 국내 디자인 교육을 선도하며 다른 대학보다 일찍 디자인 졸업생을 배출할 수 있었던 서울대학교 응용미술과의 선도적 위상과 디자인 교육자 1세대로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던 이순석의 세대 역할이 더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1960년대 중반에 국가 차원의 디자인 진흥정책이 수립되는 데 있어서 디자인계 원로로서 이순석은 매우 중요한 존재였지만 그 과정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한국공예디자인연구소의 경우 전문 연구 인력의 부족, 연구소 기능을 둘러싼 상공부와의 인식 차이, 경제적 지원의 지연, 사회 전반의 디자인 여건 미비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Choi, 2015). 그러다가 1969년에 비로소 기관지이자 국내 최초의 디자인 전문지인 『계간 디자인』17) 창간호를 발간하며 연구소의 설립취지와 연혁, 사업내용, 조직 구성 등을 체계화했는데 이듬해인 1970년에 한국포장기술협회, 한국수출품포장센터와 통합돼 한국디자인포장센터가 됨으로써 그 흐름을 이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상공미전의 경우에도 출범 초기부터 공모전의 정체성과 운영방식을 둘러싸고 혼선이 빚어지다가 1971년 제6회 때부터 행사주관이 상공회의소에서 한국디자인포장센터로 바뀌었다. 이러한 변화가 이순석의 정년퇴임 직후에 이루어진 것은 우연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당대 디자인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과 새로운 비전을 갖춘 후속 세대의 약진과 직·간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말년에 이순석은 국가 디자인 진흥정책 수립과정에 관여하면서도 개인적으로는 석공예에 매진했고 작품활동이나 디자인 교육에 있어서 도안과 장식, 그리고 응용미술을 넘어 현대디자인으로 나아가지 못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김교만, 박대순, 민철홍, 조영제, 한도룡 등 그의 초창기 제자들은 1970년대 급속한 경제성장과 더불어 개선되는 국내 디자인 여건 속에서 디자인 개념을 현대화하고 활동영역을 세분화시켜 전문화를 추구해 나감으로써 디자인산업의 토대를 빠르게 구축해 나갔다.18) 또한 홍익대, 중앙대, 국민대를 비롯한 다른 대학 출신 디자인 졸업생들도 점차 배출돼 디자인산업 현장에서 활발히 활동하게 되면서 국내 디자인계의 지형이 확장되고 다양성이 생기게 되었다.

Glossary

1) 이순석과 동시대에 활동했던 한홍택(1916~1994) 역시 말년에 회화에 전념해 디자인계에서 점차 잊혀갔다. 한홍택의 생애와 활동에 관한 선행연구로는 「한홍택 디자인의 특징과 의미: 한국 그래픽 디자인의 전사(前史)」(Kang, 2012)가 있다.

2) 이순석은 낙랑파라가 “프랑스 파리에서 유행했다는 살롱과 비슷해서 문인, 화가 등 예술가나 예술가 지망생들이 주로 모여 고전음악을 감상하면서 예술을 논하고 작품 구상을 하는 등 일종의 예술가들의 집회소 구실을 했다”고 밝혔다. 『하라 이순석』(1993), 193쪽 참조.

3) 이순석은 자신이 여우를 기르는 목장인 양호장을 시작한 이유는 “생활과 미술을 두 가지 측에서 만족시키려면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하라 이순석』(1993), 194쪽 참조.

4) 『서울대학교 학생모집요강안내』, 『서울대학교 신입학생모집안내』, 『서울대학교현황-입학요강』을 참고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70년사』 56쪽의 학과구조 표에는 1968년에 상업미술, 공업미술, 공예미술 등 세 개 전공이 표시되어 있으나 이는 집필과정에서의 오류로 보인다. 왜냐하면 1960년도부터 1969년까지 응용미술과에 재학했던 안정언은 1968년에 두 개 전공이 도입된 것으로 기억하고 있고, 현재 남아 있는 1971년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수업시간표에도 상업미술과 공예미술만 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5) 김교만, 「BIM일러스트레이션展 소고」, 『월간 디자인』, 1979년 6월호, 17쪽.

6) 합동광고는 1975년에 만보사(1969)와 합병 후 1979년에 오리콤으로 사명이 바뀌었다.

7) 「한국 대학 디자인교육의 역사적 전개에 관한 연구」(1993),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디자인·공예교육 50년사: 1946~1996년」(1999),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시각디자인교육, 1965~1994: 디자이너-교수 3인의 활동을 중심으로」(2013)에 제시된 졸업생 성적표 등을 참조했다. 디자인 분야 취업이 어렵던 1950, 60년대에 응용미술과 학생들은 교직을 이수해 졸업 후 중고등학교에서 미술교사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8) 2020년 10월 24일과 11월 14일 안정언 인터뷰, 용인시 수지 자택.

9) 이정숙, 「한국 신문광고 디자인의 변천에 대한 소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논문, 1971.

10) 학과 명칭에 디자인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은 1989년 산업미술과가 산업디자인과로 변경되면서부터다. 이전까지는 국립대학교 학과 명칭에 외래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으나 88서울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세계화, 개방화 분위기가 확산이 되면서 정책 변화가 생겼다.

11) 박정희 대통령은 1966년 8월 3알부터 8월 22일까지 경복궁 국립미술관에서 개최된 제1회 대한민국상공미술전람회 개막전에 참석해 개관 테이프를 끊고 기념사진도 찍는 등 초창기 디자인 진흥에 관심을 보였다.

12) 오천석(1901~1987)은 일제강점기에 미국 유학을 가서 컬럼비아대학에서 철학박사(1931)를 취득한 교육학자다. 해방 후 미군정청 문교부 차장과 부장을 역임하고 제2공화국에서 문교부 장관을 역임했다.

13)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응용미술학과 동문회(1993). 『하라 이순석』, 194~195쪽에서 재인용.

14) 정시화(1978). 석공예가 이순석: 선구적 생애와 작품. 꾸밈 11호, 1978년 8/9월호.

15) 서울대 중심의 상공미전 운영에 대한 반발로 제3회 때는 홍대 출신들의 출품거부와 심사위원이던 한홍택의 사퇴로 진통을 겪은 끝에 홍대에 재학 중이던 권명광이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한국디자인공모전의 태동과 역할: 상공미술전람회를 중심으로」(KIM, 2015) 참조.

16) 2020년 10월 24일과 11월 14일 안정언 인터뷰, 용인시 수지 자택.

17) 『계간 디자인』은 정시화가 편집연구원으로 참여해 1969년 8월에 창간호가 나왔고 같은 해 11월에 2호, 그리고 12월에 마지막 호인 3호가 발간되었다. 한국디자인포장센터 출범 이후 1970년 11월에 새로운 기관지로 『디자인·포장』 창간호가 발간되었다.

18) 이순석이 심사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초창기 상공미전에서 김교만(50학번)과 조영제(54 학번)는 제1부 상업미술에서, 그리고 박대순(49학번), 민철홍 (54학번), 한도룡(54학번)은 제3부 공업미술에서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이들은 대학교수이자 디자이너로 활동하며 김교만은 한국 전통 소재를 활용한 그래픽 캐릭터로 일러스트레이션 분야를 개척했고, 조영제는 아이덴티티 디자인 비즈니스를 활성화시켰다. 박대순은 한국디자인학회 초대 회장을 역임하며 디자인학 연구에 기여했고 민철홍은 공업디자인 분야를, 한도룡은 환경디자인 분야를 개척하고 체계화시켰다.

Acknowledgments

This work was supported by INHA UNIVERSITY Research Grant.

Notes

Citation: Kang, H. J. (2021). The Role of Lee Sun-suk in Design Education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from 1946 to the End of the 1960s. Archives of Design Research, 34(3), 243-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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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1

Figure 1
President Park Chung-hee's Handwriting on Art Export (1967)

Table 1

Faculty of Fine Arts (1946)

학과 교수명 출신학교
제1 회화과
(동양화)
김용준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
장우성 낙청헌(이당 김은호 화숙)에서 동양화 습득, 육교 한어학원에서 한자 습득, 서숙 상서회에서 서예 습득, 조선미술전람회(선전) 수상
제2 회화과
(서양화)
이재훈 일본 조치대학 철학과
장발 동경미술학교 중퇴, 미국 국립디자인아카데미 양화과 수료, 컬럼비아대학교 미술과 수료
길진섭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
김환기 일본대학 미술학부
조소과 윤승욱 동경미술학교 조각과
도안과 이순석 동경미술학교 도안과
이병현 일본미술학교 도안과

Table 2

Changes in the Names of Design Departments and Majors

학년도 단과대학 학부 학과 세부전공
1946~1950 예술대학 미술부 도안과 -
1951~1952 예술대학 미술부 응용미술과 -
1953~1967 미술대학 - 응용미술과 -
1968~1971 미술대학 - 응용미술과 상업미술전공
공예미술전공
1972~1975 미술대학 - 응용미술과 상업미술전공
공업미술전공
공예미술전공
1976~1980 미술대학 - 응용미술과
(입시에 전공 명시)
상업디자인전공
공업디자인전공
공예전공
1981~1982 미술대학 - 응용미술과
(입시에 전공 명시)
시각디자인전공
공업디자인전공
도자공예전공
금속공예전공
1983~1988 미술대학 - 산업미술과 시각디자인전공
공업디자인전공
공예과 도자공예전공
금속공예전공
1989~1997 미술대학 - 산업디자인과 시각디자인전공
공업디자인전공
공예과 도자공예전공
금속공예전공
1998~2004 미술대학 디자인학부 - -
2005~현재 미술대학 디자인학부 - 디자인전공
공예전공

Table 3

Number of Freshmen in the Dept. of Doan (1946~1950) and Dept. of Applied Art (1951~1970)

Table 4

Faculty Changes in the Dept. of Doan (1946~1950) and Dept. of Applied Art (1951~1970)

학과명 도안과 응용미술과
연도 '46 '47 '48 '49 '50 '51 '52 '53 '54 '55 '56 '57 '58 '59 '60 '61 '62 '63 '64 '65 '66 '67 '68 '69 '70
이순석
이병현
유영국
김정자
권순형
민철홍
김교만
조영제
강찬균
양승춘
교수수 2 2 2 2 2 1 1 1 1 1 1 1 1 2 2 3 3 4 4 6 6 6 6 7 7

Table 5

Design Curriculum in the Early Period

구분 1940년대 중반 1950년대 1960년대 초반
기초/전공
실기
서예 서예 서예
사군자 - 소묘
조소 - 조소
해부학 해부학 해부학
- 사진 사진
- - 수채화
- - 판화
구성 구성 구성
도학 도학 도학
- 고등도학 고등도학
미술 실기 상업미술
고등미술 보통실기 공예미술
- 고등실기 실내장치
- 입체의장 건축미술
공통 이론 서양미술사 서양미술사 서양미술사
동양미술사 동양미술사 -
조선미술사 한국미술사 한국미술사
- 미술감상 미술감상
- 예술론 예술론
미학 미학개론 미학개론
교양 국어 국어 국어
영어 영어 영어
불어 불어 불어
- - 원서강독
국사 - -
철학 철학개론 철학개론
- 문화사 문화사
- 자연과학개론 자연과학개론
과학 과학개론 -
- 천문학 천문학
- - 심리학
체육 체육 체육
- 교련 교련
- - 보건학
교직 - 교육학 교육학
- 교육과정 교육과정
- 교육방법 교육방법
- 교육평가 교육평가
- 교육사 교육사
- 교육심리학 교육심리학
- 교사론 교사론

Table 6

Changes in Korean Society and Lee Sun-suk’s Activities

연도
(나이)
한국 사회 및 디자인계 변화 서울대 디자인 교육과 이순석의 활동
1945
(41세)
8.15광복. 미군정 시작. 조선일보/동아일보 복간, 서울신문/경향신문 창간. 조선산업미술가협회 창립. 이화여자전문학교 예림원 미술과 설치. 이순석 조선미술건설본부 공예부 위원장.
1946
(42세)
국립서울대학교 개교. 이화여자대학교 승격. 홍익대학관/국민대학 설립. 조선산업미술가협회 산업포스터 및 팜플릿전, 조선 광복전 개최. 이순석 미군정청 문교부 교화국 예술과 고문 위촉. 서울대학교 도안과 출범 및 이순석/이병현 부임.
1947
(43세)
이화여대 예림원 미술부 미술학부 승격. 이병현 교수직 사임.
1948
(44세)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제주 4.3항쟁. 국가보안법 제정.
숙명여대 미술과 신설. 조선산업미술가협회가 대한산업미술가협회로 개칭.
유영국 부임.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 도안과 학생 작품전 개최.
1949
(45세)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개최. 공병우 한글타자기 개발. 이순석 <이순석 장식도안전> 개최. 제1회 국전 공예부 추천작가(이후 1981년까지 참여).
대통령 무궁화 대훈장 및 공군 모표/계급장 디자인.
1950
(46세)
6.25전쟁 발발. 제1회 수출공예품전시회.
한홍택 대통령 휘장 디자인.
유영국 사임. 이순석 국방부 정훈국 기획전문위원 위촉.
1951
(47세)
이화여자대학교 예술학부와 미술학부 신설. 도안과를 응용미술과로 개칭.
1952
(48세)
장봉선 사진식자기 자판 고안. 홍익대학교 공예도안과 신설. 이순석 국방부 정훈감실 종군화가단 단장 위촉.
1953
(49세)
정전협정 체결. 제1차 화폐개혁. 한홍택 제1회 개인전 개최. 미술부에서 미술대학으로 승격.
이순석 대법원 휘장/법복/법모 디자인.
1954
(50세)
경제부흥5개년계획 수립. 국내 최초 민간 방송국/라디오 방송국 개국. 국정교과서 사진식자체 최초 사용. 이순석 제3회 국전 제4부(응용미술) 심사위원 위촉.
1955
(51세)
국내 최초 조립자동차 시발자동차 생산. 럭키치약 생산. 국내 최초 원색 동판인쇄 시작. 이순석 서울시 문화상 공예 부문 수상.
1956
(52세)
한국 최초 텔레비전 방송국 HLKZ-TV 개국 및 TV 광고 등장.
반도호텔 한국 최초 패션쇼 개최. 한홍택 도안연구소 설치.
이순석 제1회 한국미협전 출품.
1957
(53세)
한국공예시범소 개소. 한국수출포장공사 설립. 백태원 제1회 공예작품전 개최, 최경자 제1회 개인의상 발표회 개최. 이순석/김교만/권순형 벨기에 만국박람회 출품 작품전.
1958
(54세)
금성사 설립 및 디자이너 공채(박용귀, 최병태). KKM디자인연구소 설립(김교만, 권순형). AD 코리아 설립. 태평양화학 국내 최초 사외보 『화장계』 창간. 홍익대학 공예과 신설. 한국공예시범소 디자인 교수요원 해외 연수 프로그램 시작(권순형 선발).
1959
(55세)
금성사 국내 최초 라디오 생산. 최초 CM송(진로). 김한용 상업사진연구소 개업. 유강열, 한홍택 홍익대학 공예과 부임. 김정자 부임. 한국공예시범소 디자인 교수요원 해외 연수 프로그램(민철홍 선발).
1960
(56세)
4.19혁명. 내각책임제 개헌 및 제2공화국 출범.
한국공예시범소 폐소. 동양맥주 국내 최초 사보 『OB뉴스』 창간. 노먼 드 한 <공업미술전> 개최. 이화여대 생활미술과 출범.
권순형 작품전 개최.
이순석 시민회관 내외부 장식 디자인.
1961
(57세)
5.16쿠데타. KBS TV 방송국 및 MBC 문화방송 라디오 개국.
국제복장학원 국내 최초 스타일학과 신설. 한국응용미술가협회 창립.
장발 미대 학장 사임. 권순형 부임.
이순석 6개월간 한국국보전시회 관련 유럽 10개국 미술계 시찰.
1962
(58세)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 대통령 권한대행 취임. 제1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 발표. 국내 최초 단지형 마포아파트 준공. 한국공예시범소 기자재 서울대 기증.
이순석 문화훈장 대통령장 수상. 최고 위원 휘장 디자인.
민철홍 <아리랑> 담배 포장 디자인. 민철홍/조영제/한도룡 제1회 서울국제음악제 포스터.
1963
(59세)
제3공화국 출범. 제5대 대통령 박정희 취임. KBS TV 광고 방송 개시, 모나미 볼펜 생산. 삼양라면 발매. 애드세일 설립. 금성사 공업의장과 신설. 권명광 그래픽디자인전. 민철홍 부임. 연건동 캠퍼스로 이전. 디자인실습장 마련.
1964
(60세)
수출 1억불 돌파, 동양방송(TBC) 라디오/TV 개국. 해태제과 포장디자인실 신설. 조선일보 조일광고상 제정. 이순석 <한국예술총람> 공예부분 저술 및 제1차 세계공예가협회(WCC) 한국 대표 참가(뉴욕).
1965
(61세)
한일협정 조인. 청와대 수출확대회의 디자인기구 설치 의결.
한국포장기술협회 창립. 한국선전미술협회 발족.
중앙일보 창간 및 중앙광고대상 창설.
김교만/조영제 부임. <하라 이순석 선생 회갑기념 미술전>.
이순석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 취임. 진명여고 마크/교기 디자인.
1966
(62세)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발표. 제1회 상공미전 개최(심사위원장 이순석). 한국포장기술협회 창립 및 『포장기술』 창간. 『공간』 창간. 이순석 한국공예디자인연구소 소장 취임.
1967
(63세)
합동통신 광고기획실 출범(합동광고). 프리즘 창립전. 이화여대 장식미술과 신설. 민철홍 대한민국 국장 디자인. 김교만 한일은행 캘린더 디자인.
1968
(64세)
코카콜라 한국 상륙. 국제광고협회(IAA) 한국지부 창설. 애드코리아 광고대행사 설립. 국내 최초 패션 종합지 『의상』 창간. 응용미술과 입학정원 증원 (20명 -> 30명) 및 상업미술/공예미술 세부전공 도입. 조영제/민철홍 제1회 한국무역박람회 개최 포스터 디자인.
1969
(65세)
3선 개헌안 날치기 통과. 경인고속도로 개통.
광고대행사 만보사 창립.
강찬균 부임. 대학원 석사과정 신설. 한국공예디자인연구소를 한국디자인센터/한국수출디자인센터로 개칭. 계간 『디자인』 창간. 이순석 제1회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대통령상 수상. 인도 뉴델리 제3차 세계공예가협회(WCC) 아시아지역회의 참석.
1970
(66세)
새마을운동 시작. 경부고속도로 완공. 삼성전자 설립. 한국디자인포장센터 설립. 『디자인·포장』 창간. 상공부 디자이너등록요령 고시. 양승춘 부임. 계간 『디자인』 폐간. 이순석 정년퇴임 및 <하라 이순석 현대 석공예전> 개최.
1971
(67세)
제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발표. 전국디자이너대회 개최.
홍익대 공예학부 응용미술과/공업도안과 개설. 국민대학 생활미술과 신설.
대학원 석사과정 첫 졸업생 배출.
이순석 <하라 이순석 석공예전> 개최.
1972
(68세)
10월유신. 디자이너 등록제 실시. 한국인더스트리얼디자이너협회(KSID)/한국그래픽디자인협회(KSGD) 창립. 응용미술과 세부전공 상업미술/공업미술/공예미술로 세분화.

Table 7

Change in the Number of Faculty (1946~1970)

Table 8

The List of Judges for the 1st Commercial and Industrial Design Exhibition (1966)

구분 이름 출신 학교
심사위원장 이순석(1905년생) 동경미술학교 도안과 (1926년 입학, 1931년 졸업)
제1부
상업미술
심사위원
한홍택(1916년생) 동경도안전문학교 (1935년 입학, 1937년 졸업)
조병덕(1916년생) 일본 태평양미술학교
김교만(1928년생) 서울대 응용미술과 (1950년 입학, 1956년 졸업)
이명구(1929년생 추정) 서울대 응용미술과 (1951년 입학, 1955년 졸업)
봉상균(1932년생) 서울대 응용미술과 (1955년 입학, 1959년 졸업)
김수석(1933년생) 서울대 응용미술과 (1952년 입학, 1956년 졸업)
조영제(1935년생) 서울대 응용미술과 (1954년 입학, 1958년 졸업)
염인택(1935년생 추정) 서울대 응용미술과 (1954년 입학, 1958년 졸업)
김홍련(1935년생) 서울대 응용미술과 (1955년 입학, 1960년 졸업)
김명호(1936년생) 서울대 응용미술과 (1955년 입학, 1959년 졸업)
제2부
공예미술
심사위원
이순석(1905년생) 동경미술학교 도안과 (1926년 입학, 1931년 졸업)
박성삼(1907년생) 다케이시에게 사사 (1930년~1935년)
백태원(1923년생) 평안북도 태천칠공예소 나전과 (1941년 졸업)
유강렬(1920년생) 일본미술학교 공예도안과 (1944년 졸업)
백태호(1925년생) 서울대 응용미술과 (1946년 입학, 1951년 졸업)
임홍순(1925년생) 서울대 응용미술과 (1948년 입학, 1954년 졸업)
권순형(1929년생) 서울대 응용미술과 (1949년 입학, 1955년 졸업)
이신자(1931년생) 서울대 응용미술과 (1950년 입학, 1955년 졸업)
제3부
공업미술
심사위원
박대순(1929년생) 서울대 응용미술과 (1949년 입학, 1955년 졸업)
민철홍(1933년생) 서울대 응용미술과 (1954년 입학, 1958년 졸업)
한도룡(1933년생) 서울대 응용미술과 (1954년 입학, 1958년 졸업)
이우성(1933년생 추정) 서울대 응용미술과 (1952년 입학, 1956년 졸업)
권길중(1937년생 추정) 서울대 응용미술과 (1956년 입학, 1960년 졸업)

Table 9

The List of Presidential Award Winners at the Commercial and Industrial Design Exhibition from 1966 to 1971

구분 연도 수상자(나이) 작품명 출품분야 출신교
제1회 1966 강찬균(29세) 서울역 색채안내 실시 상업미술 서울대
제2회 1967 김길홍(27세) 오토라이너 공업미술 서울대
제3회 1968 권명광(26세) 양송이 재배 상업미술 홍익대
제4회 1969 부수언(32세) 택시 미터기 디자인 공업미술 서울대
제5회 1970 김철수(23세) 기와 디자인 공업미술 서울대
제6회 1971 신용태(31세) 건전복 수출을 위한 재료별 포장 상업미술 서울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