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s of Design Research
[ Article ]
Archives of Design Research - Vol. 34, No. 4, pp.285-303
ISSN: 1226-8046 (Print) 2288-2987 (Online)
Print publication date 30 Nov 2021
Received 23 Jul 2021 Revised 16 Aug 2021 Accepted 16 Aug 2021
DOI: https://doi.org/10.15187/adr.2021.11.34.4.285

지펠과 디오스의 냉장고 디자인 연구 :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Haecheon Park박해천
Department of Design, Professor, Dongyang University, Donducheon, Korea 동양대학교 디자인학부, 동두천, 대한민국
Changes in Refrigerator Design of Zipel and Dios from the late 1990s to the mid-2000s

초록

연구배경 1990년대 후반 삼성전자와 LG전자는 고급 양문형 냉장고 브랜드로 각각 “지펠”과 “디오스”를 출시했다. 이 두 브랜드는 기존의 고급화 전략과는 근본적으로 방향을 달리하면서, 독특한 경로를 경유해 생활가전 시장의 지형을 재편하고 일반 가정의 주방 경관을 변모시켰다.

연구방법 본 연구는 문헌연구를 중심으로 진행됐다. 지펠 첫 출시 이후 10년 동안, 그러니까 1997년 IMF 외환위기 직전부터 2007~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전까지 진행된 국산 양문형 냉장고의 변화 과정을 디자인 전략과 연관해 살펴보고, 그 변화 과정을 가능하게 한 사회문화적 요인들을 알아보고자 했다.

연구결과 양문형 냉장고 디자인의 변화 과정은 크게 세 가지 시기로 구분해볼 수 있다. ① 1997년부터 1999년까지 지펠과 디오스 브랜드의 냉장고가 출시되어 수입 제품과 경쟁을 벌이며 시장에 안착하는 단계, ② 2000년부터 2004년까지 양문형 냉장고가 “인테리어형 가전”과 “시스템 가전” 등으로 디자인의 변화를 시도하면서 생활가전의 고급화를 선도하고 점차적으로 시장 점유율을 높여가는 단계, ③ 2005년부터 2006년까지 양문형 냉장고가 “패션 가전” 대 “아트 가전”의 대결 구도를 형성하면서 냉장고 시장의 주류 모델로 부상하는 단계 등이다. 위와 같은 변화 과정은 매 단계마다 소비의 양극화, 주부 정체성의 전환, 아파트 주방 공간의 재편, 대형 할인점의 증가 등과 같은 사회문화적 요인들과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면서 나름의 동력을 확보했다.

결론 지펠과 디오스의 양문형 냉장고는 IMF 외환위기 이후 소비 양극화의 흐름 아래 시장의 중심부로 진입할 수 있었다. 그 이후에는 소비 주체, 사용 공간, 저온 유통 시스템 등의 변화와 역동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주방 공간의 질서를 재구성하고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제시할 수 있었다.

Abstract

Background In the late 1990s, Samsung Electronics and LG Electronics launched "Zipel" and "Dios" as premium double-door refrigerator brands. While fundamentally different from the existing premium strategy, these two brands reorganized the topography of the home appliance market and transformed the kitchen landscape of ordinary households through a unique route.

Methods This study was conducted mainly on literature research. We tried to examine the change process of domestic double-door refrigerators for 10 years since the first release of Zipel in relation to design strategies, and to find out the socio-cultural factors that made the process possible.

Results The process can be divided into three main periods. ① From 1997 to 1999, double-door refrigerators of Zipel and Dios were launched, competing with imported products and settling down in the market ② From 2000 to 2004, they attempted to change their design with "interior-type home appliances" and "system home appliances", gradually increasing their market share and leading to the advancement of home appliances. ③ From 2005 to 2006, they emerged as a mainstream model in the market, forming a confrontation between "fashion appliances" and "art appliances”. This above process secured its own driving force by closely interacting with socio-cultural factors such as polarization of consumption, transformation of housewife identity, reorganization of apartment kitchen space, and increase of large discount stores at each stage.

Conclusions Zipel’s and Dios’ refrigerators were able to enter the center of the market under the influence of polarization of consumption after the IMF financial crisis. After that, They could present a new lifestyle while establishing a dynamic relationship with changes in consumers, kitchen space, and cold chain systems.

Keywords:

Zipel, Dios, Double-Door Refrigerator, Design of Home Appliances, Polarization of Consumption, 지펠, 디오스, 양문형 냉장고, 생활가전 디자인, 소비 양극화

1. 서론

1. 1. 연구 배경과 목적

국산 냉장고가 첫 출시된 것은 1965년이었다. 도입 초기, 냉장고 보급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그 시기 경제 상황과 생활수준을 고려해보면 냉장고는 너무 일찍 당도한 가전제품이었다. 일반 가정에서 구입하기에 워낙 고가인 데다가, 그 용도 역시 당시 주부들의 음식 보관 방식과 거리가 있었다. 도시에는 동네마다 재래시장이 있어서 신선한 식자재를 구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매일 오후 시장에 들러 가족의 식사 준비를 위해 하루치 식자재를 구입하는 것은 주부의 중요한 일과 중 하나였다. 대부분의 주부들은 냉장고의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했고 저렴한 아이스박스를 대용품으로 사용하곤 했다, 냉장고를 보유한 가정에서조차 비싼 전기 요금이 부담스러워 전원을 꺼두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여름철에만 김치를 시지 않게 보관하는 용도로 활용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이런 연유로 이 시기의 냉장고는 마루나 거실, 입식 부엌의 한자리를 차지한 채 소유자의 경제적 윤택함을 드러내는 고가의 장식품 행세를 하곤 했다(Ham, 2007).

냉장고가 가정의 필수품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중후반 이후였다. 경제 성장과 생활수준 향상을 배경으로, 주거 공간의 현대화가 도시 중산층의 증가와 저온 유통(cold chain) 시스템의 확산 등과 겹쳐진 결과였다. 1960년대에 ‘입식 부엌’으로 명명되었던 현대식 부엌은 1970년대를 거치면서 ‘주방’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주방은 부엌과 식당이 결합된 것으로 거실과 동일한 평면에 자리잡은 공간을 의미했다. 즉 주방은 기존의 부엌과 달리 집안의 다른 공간과 분리되지 않았고 주부만이 아니라 다른 가족 구성원들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주방의 확산세는 기존의 개량 한옥과 단절한 단독주택을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1970년대 중반 이후에는 서울 주요 지역을 중심으로 건설된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통해 더욱 확대되었다. 당시 단독주택이나 아파트를 주거 공간으로 선택한 이들 상당수는 경제 성장과 함께 성장한 도시 중산층이었다. 일정 수준 이상의 구매력을 갖춘 이 계층의 주부들은 현대적인 주방에 당도한 이후, 식탁과 싱크대를 중심으로 주방 가구를 효율적으로 배치하고, 저온 유통 시스템의 말단에 위치한 슈퍼마켓에서 다양한 먹거리를 구입했다. 여기에서 냉장고는 주방에서 식사를 준비하고 음식을 소비하는 일련의 행위에서 구심점 역할을 담당했다(Ham, 2005). 없어도 그만인 처지에서 벗어나 식생활의 현대화를 성취하기 위한 주방의 필수품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흐름에 힘입어 냉장고 보급률은 1980년에는 58퍼센트, 그리고 1990년에는 106퍼센트를 기록했다.

가전업체 간에 냉장고 디자인 경쟁이 심화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 이후였다. 박스 형태의 단순한 외형에도 불구하고 디자인을 통해 차별화를 시도하는 사례가 증가했다. 손잡이를 강조한 디자인이 우세하다가 손잡이를 문 안에 감추는 디자인이 유행하기도 했고, 주요 기능의 제어 패널을 문 위에 부착한 디자인이 등장하기도 했다. 냉장고 색상 역시 젊은 소비자층을 고려해 백색 일변도에서 벗어나 다양화되기도 했다. 이러한 시도를 거치면서 대표적인 디자인 경향으로 자리잡은 것은 표면 처리를 통한 고급스러운 재질감 표현이었다(Kim, 1995).

냉장고 시장이 사실상 포화 상태나 다름없던 1995년, 가전 3사는 이전보다 더욱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후발 주자인 대우전자는 좌우 벽면과 뒤쪽 벽면, 3면에서 냉기를 발산하는 “입체냉장고 탱크”를 선보이며 LG전자와 삼성전자의 양강 구도에 맞서고자 했다. 한편, LG전자와 삼성전자는 사용자들이 냉장고에서 가장 빈번하게 꺼내는 것이 식수라는 점에 착안해 신제품 개발에 나섰다. 삼성전자는 냉장고 문에 급수대를 설치한 “문단속 냉장고”를 내놓았다. 냉기 유출을 최소화하기 위해 문을 열지 않고도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디자인된 제품이었다. LG전자는 냉장고 내부에 육각수 발생 장치와 특수 물통을 설치한 “육각수 냉장고”를 선보였다. LG전자에 따르면, 육각수는 콜레스테롤 수치 감소에 효과가 있는 “건강에 좋은 물”이었다. 대우전자와 삼성전자가 냉장·냉동 기능에 초점을 맞춰 성능 위주의 제품 개발에 주력했던 반면, LG전자는 당시 잦은 물 파동으로 인해 확산되던 식수에 대한 불안감을 역이용해 경쟁사와의 차별화에 나섰던 것이다(Kang, 2007). 이와 같은 제품 개발 전략은 실제로 주효해 “육각수 냉장고”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한편, 이 시기에 기존의 냉장고와는 성격이 완전히 다른 신제품이 등장하기도 했다. 바로 만도 위니아가 한국인의 독특한 식생활 문화에 천착해 ‘한국형 가전’으로 야심차게 내놓은 김치 보관 전용냉장고 “딤채”였다.

이와 같이 뜨겁게 달아올랐던 냉장고 시장의 과열 경쟁 양상은 IMF 외환위기 직전인 1996년을 기점으로 주춤거렸다. 그해 가전제품은 국내 시장에서 사상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텔레비전과 VCR, 냉장고, 세탁기, 전자레인지 등 5대 가전의 내수 판매 실적은 양적으로는 약 10퍼센트, 그리고 매출액에서는 5퍼센트 감소했고, 특히 냉장고 시장의 규모는 1조 1천억 원에서 1조 3백억 원대로 6.3퍼센트 줄었다(『경향신문』, 1998년 1월 3일). 1990년대 초중반 연간 200만대 규모였던 냉장고의 총수요 역시 190만대 규모로 줄어들어 감소세가 뚜렷했다(Her, 1999). 그럼에도 가전 3사는 경쟁에서 뒷걸음질치지 않기 위해 신제품을 발표하고 광고전을 지속했다. 1997년, LG전자는 “싱싱특급 냉장고”, 삼성전자는 “따로따로 냉장고”, 대우전자는 "신선은행 냉장고"를 출시하고 각각 급속 냉각기능, 독립 냉각방식, 에어커튼 기능 등 신선보관을 위한 새로운 기능을 선보였다. 문제는 신제품 디자인이 별다른 차별화 없이 기존 냉장고 형태를 답습하는 선에서 그쳤다는 점이다. 이런 식의 신제품 경쟁은 총수요 증대를 통해 시장의 돌파구를 마련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Figure 1

Refrigerator advertisements by major home appliance companies in 1995

Figure 2

Refrigerator advertisements by major home appliance companies in 1995

Figure 3

Refrigerator advertisements by major home appliance companies in 1995

바로 이 시점, 1997년 4월 삼성전자는 고급 양문형 냉장고 “지펠”을 출시했다. 1998년 9월, LG전자도 한발 늦게 “디오스”를 브랜드로 내걸고 고급 양문형 냉장고 시장에 뛰어들었다. 이 두 브랜드는 리디자인(redesign)을 반복하며 대형화와 성능 개선에 초점을 맞추던 기존의 고급화 전략과는 근본적으로 방향을 달리하면서, 독특한 경로를 경유해 국내 생활가전 시장의 지형을 재편하고 일반 가정의 주방 경관을 변모시켰다. 본 연구는 지펠 첫 출시 이후 10년 동안, 그러니까 1997년 외환위기 직전부터 2007~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전까지 진행된 국산 양문형 냉장고 디자인의 변화 과정을 검토하고, 그를 둘러싼 사회문화적 요인들과의 관계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1. 2. 연구 대상과 방법

본 연구는 문헌 연구를 중심으로 진행하면서 다음과 같은 연구 방법을 적용하고자 한다. 첫째, 고급 양문형 냉장고 브랜드인 지펠과 디오스의 등장과 성장 과정을 가전업체의 디자인 전략과 연관해 설명할 것이다. 이를 위해 연구 대상이 되는 시기를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세 시기는 ① 1997년부터 1999년까지의 시기로 국산 양문형 냉장고가 고급 브랜드 전략을 내세워 시장에 모습을 드러내고 기존 시장을 장악한 수입 제품과 경쟁을 벌이는 단계, ② 2000년부터 2004년까지의 시기로 가전업체들이 주방 공간의 재편을 고려하면서 다양한 디자인 접근법을 시도하고 양문형 냉장고의 시장 점유율을 높여가는 단계, ③ 2005년부터 2006년까지 시기로 양문형 냉장고가 꽃그림 같은 화려한 장식 표현을 통해 독특한 경쟁 구도를 만들고 기존 일반형 냉장고의 강력한 경쟁자로 본격적으로 부상하는 단계 등이다.

둘째, 위와 같은 세 단계의 변화 과정을 가능하게 한 사회문화적 요인들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본 연구는 가계 소비의 양극화, 중산층 주부의 정체성 전환, 아파트 주방 공간의 재편, 대형 할인점의 증가 등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되, 양문형 냉장고가 시기별로 어떻게 이 요인들과 상호작용하면서 시장의 변화를 추동했는지 살펴볼 것이다. 또한 양문형 냉장고의 위상이 이 과정에서 어떻게 변모했는지도 주목할 것이다.


2. 양문형 냉장고 디자인의 시기별 변화

먼저 1997년 지펠 냉장고 출시 이후 10년의 기간을 세 시기로 구분해 디자인을 중심으로 양문형 냉장고의 구체적인 변모 과정을 살펴보자.

2. 1. 1997~1999년, 국산 양문형 냉장고의 시장진입기

1997년 5월, 삼성전자는 ‘지펠’이라는 새로운 브랜드를 내세워 670리터급과 650리터급의 고급 양문형 냉장고를 시장에 내놓았다. 가격은 각각 2백58만원과 1백58만원으로, 당시 시장의 표준이던 일반형 냉장고 가격의 두세 배에 달하는 고가였다. 지펠 브랜드는 삼성전자가 영업마케팅 부서의 주도로 틈새시장이나 다름없던 양문형 냉장고 시장 공략을 목표로 내걸고 고급화 전략을 추진한 결과였다. 1996년 시점에 연간 4만 5천대 판매 규모였던 이 시장은 제너럴일렉트릭(GE)이나 월풀(Whirlpool) 같은 미국산 제품의 독무대였다. 삼성전자의 시장조사에 따르면, 수입 양문형 냉장고의 주요 소비자층은 “35~50대의 연령층, 월 300만 원 이상 고소득층, 40평 이상의 아파트 거주자”라는 인구통계적 특성을 보였으며, 라이프스타일의 측면에서 “자기 연출 욕구가 강하여 집안을 꾸미는 데 비용을 아끼지 않고 과시 욕구 역시 강해 유명 브랜드의 의류를 선호”하는 경향을 지녔다. 실제로 수입 양문형 냉장고를 구입한 이유로는 “가장 사고 싶은 냉장고이며 흔하지 않은 냉장고”이기 때문이라는 응답이 많았다. 인테리어를 통한 자기 연출에 능하며 남다름을 추구하는 아파트 거주의 고소득 상위 중산층 이상 집단, 삼성전자는 수입 양문형 냉장고의 주요 소비자층이던 이 집단을 새로운 고급 냉장고 브랜드의 소구집단으로 설정했다(Her, 1999).

Figure 4

A positioning map for Zipel at the planning stage (Her, 1999)

브랜드 개발 당시, 삼성전자는 협업 중이던 제일기획이 제안한 브랜드명 후보 중 “기펠(Gipfel)”을 선택했다. 당시 브랜드 전략 실무를 담당하던 국내영업사업부 광고과장 구자익은 “영어, 불어 브랜드명도 있었는데” “‘기펠’이 돋보였다”고 평했다. “외제품이 장악하고 있던 프리미엄급 가전시장에서 처음 출시되는 국산품”이어서 고급스러움과 독특함을 브랜드명 선정의 기준으로 삼았는데, “기펠”이 그 기준을 충족시켰다는 것이다. 이후 실무진은 동일한 뜻을 갖고 있으면서 철자만 조금 다른 지펠(Zipfel)이라는 단어로 기펠(Gipfel)을 대체했다. G보다는 Z로 시작하는 단어가 좀 더 고급스럽고 독특하게 들린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사내 공론화 과정에서 “Zipfel”이 속어로 “남성의 은밀한 부분”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선 f를 빼고 “Zipel“로 최종 결정했다. “최고의 냉장고”라는 본래의 뜻을 살리되 제품 콘셉트를 표현하는 키워드의 알파벳 첫 글자를 조합해 대문자로 “ZIPEL”로 표기했다. 이 작명 방식에 따르면 지펠은 “완벽한 품질(Zero defect)로 지성(Intelligent)과 명예(Prestige)를 중시하는 고객에게 우아하고(Elegant) 품격 있는 생활(Lifestyle)을 약속하는 프리미엄 브랜드”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한겨레 21』, 2006년 6월 29일).

한편, 지펠 디자인팀은 본격적인 제품개발에 앞서 소구집단의 주부들을 대상으로 사전조사를 진행했다. 조사 결과, 해당 집단은 가치 중심 고객과 기능 중시 고객, 두 유형의 하위 집단으로 나뉘었는데, 이 두 집단 모두 제품을 구입할 때 가장 중요한 결정 요인으로 디자인을 꼽았다. 이런 결과 덕분에 디자이너들은 ‘기술이 먼저이고 디자인은 나중’이라는 식의 당시 일반적이던 제품 개발 방식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개발 프로세스의 초기 단계부터 참여해 주요 의사 결정에서 자신의 견해를 반영할 수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결정된 디자인 콘셉트의 방향은 냉장고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탈피해 조형적인 측면에서 부드러운 형태와 표면 재질감을 강조하는 것이었다(Jin, 1998).

삼성전자는 지펠의 첫 제품을 출시하면서 제조사 명칭인 ‘삼성’을 제품에서 찾아볼 수 없도록 의도적으로 누락했다. 이것은 한편으로 기업 이미지의 위계적 질서에서 탈피해 사업부 본연의 전문화된 이미지로 고객과 소통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펠을 수입 냉장고 브랜드처럼 보이도록 연출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일반 소비자들에게 삼성전자의 기업 이미지가 가전시장의 만년 2인자로 각인되어 있는 데다가, 양문형 냉장고 시장에서 수입 제품에 대한 선호도가 압도적으로 높은 상황이라 국산품 이미지로는 시장에 안착하는 것이 쉽지 않으리라 판단한 결과였다. 실제로 이러한 전략은 나름 성공적이어서 출시 초기에는 지펠을 독일 브랜드로 인지한 소비자들이 적지 않았다.

지펠이 출시된 지 1년 후인 1998년 9월, LG전자 역시 “디오스(Dios)”라는 브랜드로 양문형 냉장고 시장에 뛰어들었다. 출시 당시에는 공식 명칭은 “엘지-디오스”였는데, 경쟁사와 달리 제조사명과 브랜드명을 함께 표기한 것은 해당 업체에 대한 소비자의 높은 신뢰도를 반영한 결과였다. 디오스는 “디럭스(Deluxe)”, “인텔리전트(Intelligent)”, “옵티멈(Optimum)”, “사일런트(Silent)” 등의 영어 단어 첫 알파벳을 조합한 것으로, “외제보다 성능이 뛰어나고 더 조용한 최고급 냉장고”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삼성전자와 마찬가지로 LG전자도 영업마케팅 부서의 주도로 시장세분화 전략을 통해 브랜드 개발을 진행했다. LG전자가 소구집단으로 설정한 대상은 “월소득 3백만 원 이상, 30평형대 이상 아파트에 거주하며 과시 욕구를 가진 35세 이상 대졸 주부”였다. 디오스의 소구집단은 거주 아파트의 평형대를 제외하고는 지펠과 거의 동일한 인구통계적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다만 접근방식의 차이라면 디오스의 경우 국내 냉장고의 평균 사용 기간이 8년이라는 사실에 착안해 이 집단이 1990년대 초반에 생애 첫 냉장고를 구입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 주목했다는 것이다(Lee, 1999).

Figure 5

An advertisement named “Zipel Sinjak” in 1998

LG전자는 제품 출시와 함께 “자장 자장 자장”, “시끄러운 냉장고 소리, 조용히 잠재우겠습니다”라는 광고 문구를 내세워 디오스가 소음이 적은 “조용한 냉장고”라는 점을 강조했다. 출시 이듬해에는 우수 산업디자인 상품전(Good Design)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엘지전자는 수상을 자축하는 신문 광고에는 “디자인부터 시작합니다. 디자인으로 완성합니다”라는 문구를 내걸었다. 1993년 이후 1997년 한 해를 제외하고 매년 대통령상을 수상했던 자사의 디자인 역량에 대한 자신감이 담긴 메시지였다. 확실히 저소음 기술과 디자인은 시장에 먼저 진출한 지펠과의 차별화를 위한 핵심역량이었다.

삼성전자는 LG전자의 디오스가 출시되자 지펠의 내부 디자인을 한국인의 식생활에 맞게 개선했고 780리터 대용량 제품을 출시해 제품 라인을 다변화했다. 브랜드 슬로건 역시 “나만이 느끼는 행복이 있다”에서 “행복이라 불리는 작품”으로 변경해 자사 냉장고의 위상을 ‘제품’에서 ‘작품’으로 격상시켰다. 실제로 1998년 하반기의 신문 광고 <지펠新作>에서는 미술관에 비너스 조각상과 함께 전시된 지펠 냉장고의 이미지를 선보였다. 불과 1년 전, 신선보관 기술에 초점을 맞췄던 일반형 냉장고 광고와 비교해보면 확실히 이례적인 것이었다. 이 광고는 비록 과장이 뒤섞이긴 했지만, 양문형 냉장고의 의미를 기능적인 차원에 국한하지 않겠다는 선언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이제 먹거리를 신선하게 보관하는 저장고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미적 경험을 제공하는 오브제로서, 일상의 문화적 차원에서 새로운 의미망을 구축해야 하는 것이었다.

1999년 초, 지펠과 디오스의 경쟁이 본격화되면서 수입 제품의 시장 점유율은 빠른 속도로 감소했다. 지펠 출시 이후 50퍼센트대, 디오스가 출시된 1998년에는 30퍼센트대, 그리고 1999년 상반기에는 10퍼센트 초반대까지 떨어졌다. 이 시점에 지펠의 판매량 추이가 경제 동향을 보여주는 종합주가지수나 환율 같은 지표의 변화 추이와 정확히 일치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실제로 출시 이후 월 4천대 선의 판매량을 보였으나 IMF 외환위기 직후에는 월 2천대 선까지 감소했다가 1998년 8월을 기점으로 점차 증가 추세를 보였고 경기 회복세가 뚜렷해지던 1999년 1월에는 4천5백대가 판매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지펠 냉장고의 판매량을 보면 경기가 보인다”는 이야기가 회자되기도 했다(『한겨레신문』, 1999년 2월 25일). 이는 판매량이 경제 동향의 상징적인 지표 역할을 할 만큼 국산 양문형 냉장고의 위상이 이전과는 달라졌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출시 초기만 해도 고급 틈새시장을 장악한 수입 제품의 대체품에 가까웠으나, 이제는 소비자의 주목을 받으며 판매량을 늘려가면서 시장의 외연을 넓혀가고 있었다.

언론은 국산 양문형 냉장고의 시장 안착을 두고 IMF 외환위기 이후 소득 양극화에 뒤이어 소비 양극화가 진행된 결과로 분석했다(『조선일보』, 1999년 1월 5일). 실제로 이 시기에 대부분의 가구 소득은 감소했으나 상위 20%의 소득만큼은 증가했다. 이를 반영하듯이 한편에는 기본 기능 중심의 실속형 가전 모델이 출시되어 시장의 호응을 받았던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양문형 냉장고를 필두로 고급 가전제품이 점유율을 늘려가고 있었다. 고급화 경향은 가전제품뿐만 아니라 자동차와 패션의류 시장에서도 뚜렷했다.

2. 2. 2000~2004년, “인테리어형 가전”과 “시스템 가전”으로서 양문형 냉장고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양문형 냉장고의 브랜드들은 디자인 전략의 방향 전환을 모색했다. 단기간에 수입 제품을 퇴출 위기에 몰아넣을 정도로 큰 성과를 거뒀지만, 전체 냉장고 시장에 비해 양문형 냉장고 시장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경기 회복 흐름에 편승해 중산층 전반으로 시장을 확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이전과는 다른 수준의 전략, 즉 장기적 관점에서 주방 공간의 재편까지 고려한 새로운 접근법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이는 양문형 냉장고 디자인의 새로운 단계라고 할만 했는데, 그 출발점은 양문형 냉장고를 “인테리어형 가전”으로 재정의하는 것이었다. 1990년대 후반 분양가 자율화 이후, 신축 아파트를 중심으로 진행되던 주방 공간의 규모 확장과 빌트인 가구의 보급 등은 이러한 시도를 가능케 한 물질적 조건이었다. 사실 “인테리어형 가전”이라는 표현은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아파트 거실에 배치된 AV시스템이나 에어컨 등을 가구와 함께 단일한 ‘제품-공간 체계’로 재구성하려는 시도들이 "인테리어형 디자인"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차례 되풀이된 바 있었다.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이런 시도들은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신축 아파트의 주방 공간으로 활동무대를 옮겨가고 있었다.

2000년에 삼성전자가 출시한 “인테리어 지펠”은 신축 아파트에 붙박이 형태로 설치하기 위한 용도의 제품으로 인테리어형 가전의 첫 성과물이라고 할만 했다. 이 제품은 567리터 급으로 주방 가구의 라인과 일치하도록 제품 폭이 60cm로 슬림하게 디자인되었다(『국민일보』, 2000년 8월 8일). 1년 후에는 2001년형 “인테리어 지펠”이 출시되었는데, 이 제품은 색상이 있는 강화유리 패널을 사용한 디자인으로, “일루미네이트 블루, 드림베이지, 아쿠아실버, 아쿠아 그린” 등 4가지 색상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고, 이후에 다른 색상의 패널로 교체할 수 있었다(『한국경제신문』, 2001년 6월 24일). 본체 슬림화와 색상 다양화의 바통을 이어받은 인테리어형 가전의 다음 단계는 주방 가구를 닮은 냉장고였다. 2002년에 출시된 지펠 “내오공간”은 “다크 월넛, 체리, 화이트워시 오크” 등 무늬목 스타일의 색상과 재질을 옵션으로 채택했다(『국민일보』, 2002년 3월 28일). 당시 마감재로 무늬목 필름을 사용하는 것이 주방 가구의 시장 트렌드였는데, 이와 보조를 맞추기 위한 것이었다. “드러내지 않아도 묻어나는 자신감”이라는 광고 문구가 암시하듯이, 이 제품은 가구의 색상과 재질을 모방해 시각적인 이질감을 주지 않고 자연스럽게 주방 공간의 일부로 자리잡고자 했다. 한편, 2002년에는 LG전자가 2001년형 “인테리어 지펠”과 유사한 콘셉트로 “스페이스 디오스”를 내놓았다. 10가지 색상의 강화유리 패널과 손잡이를 선택할 수 있었고 나중에 주방을 새롭게 꾸밀 경우 패널만 따로 구입해 외관을 바꿀 수도 있었다(『매일경제신문』, 2002년 4월 2일).

Figure 6

An advertisement of “Zipel NEOGONGAN” in 2002

인테리어형 가전의 디자인 접근법은 주방이 지닌 공간 구성의 독특한 면모에 주목한 결과였다. 주방의 사물 배치에서 강력한 구심점의 역할을 하는 것은 주방 가구였다. 주방 한쪽 벽면에 붙박이 형태로 설치된 싱크대는 식탁과 함께 음식 조리와 식사 동선의 효율성을 고려해 공간을 구획하고 사물 배치의 질서를 규정했다. 이에 따라 주방은 싱크대를 중심으로 수납공간이 벽면에 붙박이 형태로 세워지는 방식으로 구성되었고, 냉장고 역시 수납공간 중 하나로서 주방 가구 사이에 자리잡았다. 여기에서 디자인의 중요한 요소로 주목할 만한 대상은 문, 즉 수납공간의 여닫이문이나 미닫이문이었다. 외관상으로 보자면 주방 공간은 바로 이 납작한 직사각형 문들에 둘러싸인 공간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수납공간의 문 색상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주방 분위기를 충분히 새롭게 연출할 수 있었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인테리어형 가전으로 양문형 냉장고의 위상을 재정의하는 한편, 생활가전 전반에 걸쳐 고급 브랜드화도 진행했다. 2002년 2월, LG전자는 아에게(AEG), 밀레(Miele), 지멘스(Siemens), 월풀 등 수입 제품이 우세하던 드럼세탁기 시장에 출사표를 던지며 새로운 브랜드로 “트롬(Tromm)”을 발표했다. LG전자가 디오스 냉장고와 휘센 에어컨의 바통을 이어받을 생활가전 제품군의 고급 브랜드 기획에 나선 지 2개월 만이었다. 삼성전자 역시 트롬의 등장에 대응이라도 하듯이 그해 7월에 김치냉장고, 에어컨, 드럼세탁기, 공기청정기 등의 제품군을 통합해 “하우젠(HAUZEN)”이라는 새로운 브랜드를 내놓았다. “지펠”과 마찬가지로 독일어의 어감을 주는 “하우젠”은 집을 뜻하는 독일어 “HAUS”와 중심을 의미하는 “ZENTRUM”의 합성어로 “생활의 중심”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삼성전자가 패밀리 브랜드 전략을 펼친 것은 “하우젠”의 의미가 암시하듯이 “인테리어형 가전” 개념의 도입을 통해 디자인 범위를 개별 제품뿐만 아니라 그 제품이 놓인 실내 공간 전체로 확대하겠다는 의도였다. 이와 함께 브랜드 선호도가 경쟁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뒤처져 있다는 판단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개별 제품군의 최고 인기 브랜드인 에어컨의 휘센, 드럼세탁기의 트롬, 김치냉장고의 딤채 등과 각각 경쟁할 경우 승산이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이었다(Park, 2005).

생활가전의 인테리어 지향성은 신축 아파트의 빌트인 시장이 지속적으로 성장함에 따라 한층 더 강화되기도 했다. 당시 신축 아파트의 주방에서 냉장고, 김치냉장고, 세탁기 등은 주방 가구와 함께 붙박이 형태로 설치되는 경향을 보였다. 2003년을 전후로 등장한 “시스템 가전”은 이런 흐름에 합류하면서 기존의 인테리어형 가전을 한 단계 더 진전시킨 결과였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인테리어형 가전은 주방 가구와의 조화를 고려하면서 그것이 규정한 사물 배치의 질서 내부로 편입하고자 했다. 반면 시스템 가전은 가구가 아니라 가전을 중심에 두고 주방 공간의 구성원리를 재정의하려고 시도했다. 이에 따르면 가전은 더 이상 공간에 배치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공간을 창출하는 것이었다. 양문형 냉장고는 시스템 가전의 중추로서 주방 공간의 질서 재편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떠맡아야 했다.

한편 양문형 냉장고의 경쟁 구도 한 축을 담당하던 삼성전자 생활가전 부문이 2003년 이후 연속 적자로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하다. 반도체, 정보통신, 디지털미디어, 생활가전 등 4대 사업부문 중 유일하게 적자를 기록한 사업부문이었다. 2003년에는 최소 7천억 원 이상의 마케팅비를 사용하면서 지펠과 하우젠을 앞세워 승부수를 띄우기도 했으나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양문형 냉장고를 제외한 생활가전의 전 제품군이 여전히 경쟁사에 뒤처져 있다고 평가되었다. 2004년 초에는 실적 부전을 타개하고자 생활가전 부문을 윤종용 부회장 직속으로 개편하기도 했다(『한겨레 21』, 2007년 3월 29일). 주지하다시피 삼성전자는 1990년대 후반 이후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분야에서 “신속하고 과감한 투자”와 “선도적인 제품개발”을 통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경쟁우위 창출을 위한 속도전”으로 요약될 수 있는 이 전략은 2000년대 전반에 걸쳐 혁신역량의 전파를 통해 다른 사업부에도 확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큰 성과를 거둔 사업부는 휴대폰과 디지털 텔레비전이었다. 삼성전자의 사업구조는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등 핵심부품에서 소비재 완제품까지 수직계열화가 이뤄져 있었는데, 속도전의 혁신역량은 바로 이 수직계열화의 흐름을 타고 전파되었던 것이다(Jang, 2008).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분야에서 뛰어난 사업성과를 거둔 윤종용 부회장이 생활가전총괄 사장을 맡은 것은 가전에서도 이와 같은 성공을 재연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국면전환 시도는 상황 개선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Sales and operating profit of home appliances of LG Electronics and Samsung Electronics(『한겨레 21』, 2007년 3월 29일)

2. 3. 2005~2006년, 패션 가전 대 아트 가전

2006년을 기점으로 지펠과 디오스의 디자인 경쟁은 “패션 가전” 대 “아트 가전”의 형태로 재편되었다. 변화의 시작은 2005년부터였다. 그해 1월, 삼성전자의 생활가전총괄 사장으로 부임한 이현봉은 생활가전 부문의 고급화 전략을 한층 더 강화해 “명품 디자인 전략”을 추진하겠다고 선언했다. 패션디자이너 앙드레 김, 영국의 세계적 제품디자이너 제스퍼 모리슨 등 국내외에서 명성이 높은 디자이너를 초빙해 협업을 통해 명품 가전의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이 전략은 2000년대 중반 이후 세계 휴대폰 시장에서 중요한 트렌드로 등장한 유명 명품 패션 브랜드와의 제휴 전략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시기적으로 보자면 2006년 12월 LG전자 MC사업본부가 이탈리아 패션 브랜드 “프라다”와의 제휴 하에 출시한 “프라다폰”보다 한발 앞선 것이기도 했다. 공세적인 것처럼 보였던 이 전략은 표면적으로는 해당 브랜드의 고가 제품에 지위나 신분을 상징하는 표지 상품(marker goods)의 위상을 부여하겠다는 시도였으나, 앞서 살펴봤듯이 여기에는 위기 극복을 위해 배수의 진을 치겠다는 의도도 담겨 있었다.

삼성전자의 명품 디자인 전략의 첫 성과는 패션 디자이너 앙드레 김과의 협업 디자인 프로젝트였다. 삼성전자는 2006년 4월, 삼성전자 디자인경영센터에서 이현봉 생활가전총괄 사장과 정국현 디자인전략팀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앙드레 김과의 디자인 제휴 조인식을 개최했고, 8월에 협업의 결과물인 양문형 냉장고와 김치냉장고를 발표했다.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진행된 제품 개발 프로세스에서 앙드레 김은 제품 표면에 적용할 패턴 문양, 색상, 소재 등의 공동 개발과 자문을 담당했다. 제품 디자인은 생활가전 부문의 디자이너들이 맡되, 상호협의를 통해 앙드레 김이 제안한 디자인 콘셉트나 패턴 문양 등을 반영하는 식이었다(『세계일보』, 2006년 4월 27일).

한편, 삼성전자와 거의 동시에 LG전자 역시 꽃그림으로 유명한 서양화가 하상림 작가를 디자인의 협업 파트너로 선정해, 화이트와 와인, 두 가지 색상의 양문형 냉장고와 김치냉장고 신제품을 발표했다. “갤러리 키친”이라는 콘셉트로 디자인된 이 신제품의 명칭은 “아트 디오스”였다. “모던 플라워”라고 명명된 하상림 작가의 꽃그림이 냉장고 전면에 배열되었고,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탈이 손잡이와 로고, 꽃그림 일부에 마감재로 사용되어 보석으로 수놓은 것 같은 시각 효과를 냈다(『한겨레신문』, 2006년 8월 17일). “아트 가전” 전략을 주도하던 디자인경영센터의 신상영 상무는 하상림 작가를 협업 파트너로 택한 이유를 그의 꽃그림이 “오래 보아도 질리지 않는 은은함”을 담고 있기 때문이라면서 그의 그림을 주목하게 된 경위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월간 디자인』, 2007년 2월호).

“꽃그림을 싫어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가전제품도 기술력이 비슷해지면 디자인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제품 외관의 디자인 그 이상을 항상 염두하고 있었는데, 바야흐로 때가 온 것 같습니다. (…) 제가 잡지를 엄청 좋아합니다. 아마 국내에서 나오는 잡지란 잡지는 거의 다 볼 거예요. 하상림 작가의 꽃그림은 『가가자이』라는 아파트 멤버십 잡지에서 찾아냈어요. 모던하고 현대적인 꽃그림이 너무 강하지도 않고 적당하여 저희 제품과 어울릴 것 같다고 판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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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re Kim” refrigerator and Art Dios in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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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re Kim” refrigerator and Art Dios in 2006

흥미롭게도 ‘명품’의 지위를 점유하고자 하는 양대 가전업체의 시도는 패션 가전과 아트 가전을 경유해 모두 꽃그림이라는 시각적 어휘에 당도했다. 일차적으로는 양자 모두 냉장고의 납작한 표면을 색채·소재·마감(CMF) 디자인만으로 차별화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한 결과였다. ‘과잉 장식’이라는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더라도 합리성과 기능성의 영역에서 벗어나 소비자의 감성에 직접 호소하고 나서는 것, 그것이 냉장고 디자인에 패션디자이너와 서양화가의 꽃그림을 동원한 이유였다, 물론 양 브랜드는 ‘패션’과 ‘아트’라는 수식어의 차이만큼이나 상이한 디자인 접근법을 취했다. 패션 가전이 꽃그림을 장식적 패턴으로 냉장고 표면에 각인하려고 시도한 반면, 아트 가전은 그 표면을 캔버스 삼아 꽃그림을 회화적 도상으로 배열하려고 했다. 색채·소재·마감 디자인의 대상이던 냉장고 표면은 이렇게 패턴과 도상의 어휘로 채워졌다. 접근법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양자가 성취하려고 했던 것은 동일했는데, 그것은 시스템 가전의 다음 단계로 ‘주방의 갤러리화’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 시점에 국내 미술시장 붐과 함께 특정 계층을 중심으로 실내장식용 그림 구매가 크게 증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해보면, 주방의 갤러리화가 명품 디자인 전략의 목표로서 전혀 맥락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2006년 하반기에 펼쳐진 지펠과 디오스의 정면 승부는 판매량에서 앞선 디오스 측의 승리로 일단락되는 듯 보였다. 출시 후 한 달여 지난 시점의 일간지 기사는 “아트 디오스”가 앙드레 김 냉장고보다 3배가량 더 판매되었다고 보도했다. 판매량의 차이는 구매층의 세대 차이에서 일부 기인했다. 기사에 따르면, 백화점 관계자는 “LG전자 제품은 20·30대 젊은층이, 삼성전자 제품은 40대 이상의 중년층에서 많이 찾”는 경향을 보인다고 지적했다(『동아일보』, 2006년 10월 31일). “앙드레 김 디자인의 경우 너무 튀어서 집안의 다른 가전이나 가구와 공간적 조화가 힘들다는 점이 소비자의 선택을 끌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견해도 있었다(『매일경제신문』, 2007년 1월 19일).

한편 2006년 연말, 삼성전자는 명품 디자인 전략의 두 번째 ‘작품’으로, 제스퍼 모리슨과의 협업을 통해 디자인된 냉장고를 출시했다. 이 냉장고는 장식을 완전히 배제한 모던한 스타일의 외형을 갖춰 앙드레 김의 냉장고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이 제품은 2007년 일본 굿디자인 어워드에서 금상을 수상하며 “베스트 15”에 선정되기도 했지만, 국내 시장에서는 별다른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꽃그림 유행은 ‘명품’을 지향하는 디자인 전략과 소비 심리가 빚어낸 다분히 한국적인 현상이었다. 삼성전자의 관계자는 유독 국내 시장만큼은 최신 프리미엄 가전제품에 대한 선호도가 높지만, 해외 시장은 아직도 백색, 실버 형태가 주류라고 지적하기도 했다(『한겨레 21』, 2007년 3월 29일). 그럼에도 이 시기 양문형 냉장고는 꽃그림 유행을 경유하여 기존의 일반형 냉장고를 제치고 국내 냉장고 시장의 주류 모델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특히 양문형 냉장고를 비롯한 고급 생활가전의 주요 소비자층으로 급부상한 20·30대의 젊은 주부층이 이 과정에서 큰 몫을 했다. 한 광고기획사의 조사에 따르면, 2005년 전체 냉장고 시장에서 양문형 냉장고의 비중은 전체의 28%였으나 꽃그림 유행을 기점으로 2006년 36%, 2007년 37%, 2008년 44%로 급증했다(Lee, 2009). 확실히 냉장고 제품군 자체의 세대교체가 시장에서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3. 양문형 냉장고 보급을 둘러싼 사회문화적 요인들

외환위기 이후 소비 양극화가 소득 양극화에 뒤이어 진행되었다. 중산층 전반의 구매력 감소로 실속형 제품 소비와 대형 할인점 이용이 증가한 반면, 상위 중산층을 중심으로 명품 소비 확산과 함께 고급 소비시장도 빠르게 성장했다(Nam, 2011). 1997년과 1999년 사이의 도입기, 국산 양문형 냉장고가 수입 제품과 경쟁하면서 판매량을 확대할 수 있었던 것은 소비 양극화에 따른 고급 소비시장의 성장세 덕분이었다. 하지만 양문형 냉장고가 틈새시장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시장의 중심부로 진입하는 데에는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았다. 양문형 냉장고는 기존 일반형 냉장고의 리디자인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디자인이었던 만큼, 당시 새롭게 부상하던 외부의 사회문화적 요인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느냐가 중요했다. 이런 측면에서 2000년대 전반에 진행된 중산층 주부 정체성의 전환, 아파트 주방 공간의 재편, 대형 할인점의 증가 등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이 요인들은 각각 양문형 냉장고의 소비 주체와 사용 공간, 그리고 양문형 냉장고가 보관하는 신선식품의 유통구조와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었다. 양문형 냉장고는 바로 이 요인들과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시장의 우세종으로 변모를 거듭하면서 사용자의 일상 공간에서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3. 1. 중산층 주부의 정체성 전환

앞서 살펴봤듯이 1990년대 후반 삼성전자와 LG전자는 각각 지펠과 디오스를 기획하면서 상위 중산층에 속한 30대 중후반 주부들을 소구집단 중 하나로 설정했다. 시장에서 이들이 일정 수준 이상의 구매력을 갖춘 집단으로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이들이 처음 주목받았던 것은 1990년대 초반이었다. 이 시기, 경제성장에 힘입어 소비 영역이 급팽창하고 생활양식도 다양해지면서, 가정 공간 역시 노동 재생산의 단위에서 소비의 장으로 재편되고 있었다. 젊은 세대의 중산층 주부 일부는 이런 변화를 주도하면서 ‘가사 관리자’라는 기존의 정형화된 주부 역할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가사, 육아, 패션, 미용 등의 영역에서 세련된 소비 감각으로 가족의 라이프스타일을 연출하는 적극적인 소비 주체로 자신의 주부 정체성을 재구성해 나갔다. 가계 소비의 확대 가능성을 모색하던 광고업계는 이들의 움직임에 주목했고 “미시족”이라는 명칭을 부여했다(Park, 2010). 이 명칭은 1993년 말 서울의 한 백화점 광고에 처음 등장한 이래 1990년대 중반까지 시장 트렌드의 주요 키워드로 주목받았다. 이 시기 “미시족”의 대표적 표상 중 하나는 1994년 남양유업의 이유식 “스텝로얄” 광고에 등장한 젊은 주부였다. 광고 속에서 그녀는 워커를 신고 한손으로 유아를 든 채로 “내 아기는 다르다”고 선언했다.

이들은 외환위기를 전후로 30대 중후반의 연령대에 접어들며 생애과정의 새로운 단계에 진입하면서, 좀 더 넓은 주거 공간으로 이주하거나 기존에 보유한 가전제품을 교체하고 있었다. 실제로 LG전자는 국내 소비자의 냉장고 사용기간이 평균 8년이라는 점에 착안해 디오스의 소구집단 중 하나가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에 결혼과 함께 신혼살림으로 생애 첫 냉장고를 구입했던 이들이라고 가정했다. 지펠에 비해 한발 늦게 시작한 만큼 좀 더 정교하게 시장세분화 전략을 수립했던 셈인데, 그 전략의 핵심은 소구집단의 생애과정과 냉장고의 교체 주기를 동기화(synchronization)하는 것이었다. 삼성전자와 LG전자 모두 1990년대 전반에 걸쳐 다양한 소비 활동으로 라이프스타일의 동질성을 구축한 이 집단에 주목했다.

눈여겨 봐야할 대목은 지펠과 디오스가 이 집단과 맺는 관계가 초기 브랜드 기획의 소구집단 설정에만 머무르지 않았던 점이다. 이후 가전업체들은 브랜드 전략을 심화하는 과정에서도 여전히 이 집단에게 중요한 소구집단의 역할을 부여했다. 특히 이 집단 일부가 2000년대 초반 이후 실험하기 시작한 새로운 주부 정체성 모델은 이러한 관계를 지속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당시 주요 언론들이 다루던 주부 담론은 이 시기 주부 정체성의 변화상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이에 따르면, 이제 주부의 역할은 가계 소비를 주도하며 가족의 라이프스타일을 연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그들은 소비자의 자리에서 벗어나 끊임없는 자기계발로 나름의 전문성을 갖춘 가정 경영의 주체로 변모해야 했다. 경영 관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가족 구성원의 일상생활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원의 효율적 배분과 선택, 구성원 간의 소통과 타협이 필요한 의사 결정 과정의 산물이다. 세밀한 계획에 따라 관리되어야 하며, 이를 조정하는 기술도 필수적이다(Park, 2010).

이 시기에 주부가 담당해야 할 가정 경영의 대상으로 주목받은 것은 자녀 교육과 자산 증식이었다. 양극화의 흐름이 강화되는 가운데, 교육을 통한 계층 재생산은 중산층 가족의 절박한 목표가 되었고, 이에 따라 중산층 주부는 자녀의 교육을 지원하고 관리하는 “매니저 엄마”의 역할을 떠맡아야 했다. 소득이 증가할수록 교육비가 가계 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졌다는 점에서 매니저 엄마의 역할은 상위 중산층 집단에서 특히 강조되었다(Park, 2009). 이와 함께 자산 증식이 주부가 담당해야 할 일상적인 과업으로 부상했다. 절약과 저축에 바탕을 둔 소극적인 가계 관리는 과거의 유산일 뿐이었다. 주부들은 이제 금융경제에 대한 나름의 이해를 바탕으로 재테크를 통해 가계의 자산을 늘려가는 일에 나서야 했다. 2000년대 전반에 걸쳐 과열되었던 주식시장과 부동산시장은 그들이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나 자산투자자로서 역량을 펼칠 새로운 무대였다. 박혜경은 이렇게 자녀 교육과 자산 증식, 양 측면에서 주부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의하던 일련의 담론을 “주부 CEO 담론”으로 명명하면서, 당시 유행하던 능력주의 담론이 주부 정체성 형성에 크게 영향력을 행사한 결과라고 지적한다. 새로운 주부 정체성 모델의 영향력은 상위 중산층에만 머무르지 않고 이후에는 중산층 전반으로 확산되기도 했다(Park, 2010).

양문형 냉장고의 위상 변화는 그 소비 주체였던 주부의 정체성 전환과 밀접한 연관 관계를 맺고 있었다. “백색 가전”이라고 불리던 일반형 냉장고는 기능적인 측면에서 신선 식품의 보관이라는 소비자의 필요와 맞닿아 있었고 이때 소비자는 주방에서 가사를 수행하는 주부를 의미했다. 반면 양문형 냉장고는 이와는 다른 방향에서 디자인의 고급화를 통해 주부가 나름의 취향과 안목으로, 그러니까 지펠의 2002년 광고 카피대로 “그녀만의 스타일”로 주방 공간을 새롭게 연출하는 미적 오브제로 자리매김했다. 여기에서 “그녀”는 가사 관리자로서의 주부보다는 가정 경영의 전문가로서의 주부에 더 가까웠다. 실제로 지펠과 디오스는 지적이고 우아한 이미지나 도시적이고 세련된 이미지를 지닌 30대 중후반의 유명 여배우들을 광고 모델로 기용했는데, 이는 두 브랜드가 가정 경영의 전문가로서의 주부 이미지를 냉장고 사용자의 이상적인 모습으로 설정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양문형 냉장고는 이런 과정을 통해 기존의 일반형 냉장고와의 질적인 차별화를 꾀하면서 시장에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갈 수 있었다.

3. 2. 아파트 주방 공간의 재편

양문형 냉장고가 냉장고 시장의 우세종으로 부상하는 과정과 중산층 주부가 가정 경영의 전문가로 새로운 정체성을 구성하는 과정, 이 두 과정이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의 창출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양자가 좀 더 밀접하게 상호작용할 수 있는 공간이 요구되었다. 2000년 전후로 등장한 신축 아파트의 ‘대면형 주방’은 이러한 요구에 화답하는 것이었다.

외환위기 이후 정부는 침체된 건설업의 활성화를 위해 분양가 자율화를 단계적으로 시행했고 이에 따라 신축 아파트의 실내공간은 기존의 표준화된 형태에서 탈피하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를 극적으로 가시화한 공간이 주방이었다. 주방은 점차 규모를 키워가면서 이전과는 다른 형태의 가구 배치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대면형 주방’은 이런 변화를 선도하던 주방 유형으로, 크게 섬형과 반도형으로 나뉘었다. “아일랜드형 키친”이라고도 불리던 섬형은 벽면의 주방 가구로부터 분리된 아일랜드 작업대가 주방 가운데에 놓인 배치 형태였고, 반도형은 ‘ㄷ자’나 ‘ㄱ자’ 형태의 주방 가구의 한쪽 끝에 식탁이나 개수대가 부착된 배치 형태였다. 이 두 유형의 대면형 주방은 ‘-자 형’이나 ‘ㄱ자 형’으로 주방 가구를 배치한 기존 주방과는 뚜렷하게 구분되었다. 기존 주방에서 주부는 거실이나 식탁을 등진 채로 부엌일을 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주부의 시선은 주방에 갇힌 상태가 되기 마련이었다. 반면 대면형 주방에서는 싱크대나 조리대 앞의 주부가 가족과 대화를 나누거나 거실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었다(Do, 2020).

분양가 자율화 이후 중대형 평형대의 주상복합 아파트를 중심으로 선보이던 대면형 주방은 2000년대 전반에 걸쳐 중형 평형대의 신축 아파트에도 적극적으로 도입되었다. '-자형'이나 'ㄱ자형'의 주방에서 벗어나길 원하는 주부들의 요구가 반영된 결과였다. 실제로 2005년에 분양된 서울의 브랜드 아파트 27개 단지를 분석한 결과, 30평 이상 평형대 아파트 대부분이 대면형 주방을 설치한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Do, 2020). 여기에서 대면형 주방은 아파트 실내공간의 질서를 새롭게 확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실제로 인터넷 보급과 각방 문화 선호로 인해 텔레비전 시청의 공간이라는 거실의 기능은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면형 주방의 등장은 거실이 지녔던 가족 공유 공간의 기능 일부를 주방으로 이전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이렇게 대면형 주방은 거실과의 공간적 연계성을 강화하면서, 주부의 필요에 따라 가족 공간이나 홈오피스 등 다양한 모습으로 연출되었다.

그러면 대면형 주방과 양문형 냉장고의 관계를 살펴보기 위해, 『행복이 가득한 집』 1999년 8월호에 소개된 주상복합아파트 타워팰리스의 68평형 모델하우스를 살펴보자. 이 아파트에서 거실과 주방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하나의 공간처럼 트여 있다. 전형적인 섬형의 배치 형태를 취한 대면형 주방의 중심에서는 아일랜드 작업대가 위치하고 그 앞뒤로 식탁과 싱크대가 놓여 있다. 그리고 양문형 냉장고는 마치 원래부터 제 자리인양 주방의 한쪽 벽면을 차지했다(『행복이 가득한 집』, 1999년 8월호). 이후 하나의 전형으로 자리잡은 이와 같은 배치 형태는 대면형 주방이 양문형 냉장고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대면형 주방 상당수는 설계 당시부터 양문형 냉장고가 들어갈 자리를 따로 마련해놓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연유로 2000년대 전반에 걸친 대면형 주방의 증가는 자연스럽게 양문형 냉장고의 구입을 유도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가전업체들이 주방 공간의 재편 과정에서 나름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양문형 냉장고에게 실내 경관을 완성하는 역할을 부여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이다. 이에 따르면 양문형 냉장고는 아일랜드 작업대, 벽면의 싱크대와 함께 삼각형의 축으로 구성하여, 음식 조리가 요구하는 동선의 연속성뿐만 아니라, 형태, 색채, 재질의 측면에서 실내 경관의 시각적 동질성도 성취해야 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앞서 살펴본 양문형 냉장고를 중심으로 진행된 새로운 디자인 시도들, 즉 “인테리어형 가전”부터 “시스템 가전”을 거쳐 “패션 가전”과 “아트 가전”에 이르기까지 이루어진 일련의 시도들은 바로 대면형 주방이라는 새로운 공간적 조건에 적극적으로 대응한 결과이기도 했다.

아트 디오스 출시 당시, LG전자 관계자는 주방의 트렌드가 “단순히 요리공간이 아니라 가족의 문화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다고 언급하며 “갤러리 키친”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선보이고자 했다고 말한 바 있다(『한겨레신문』, 2006년 8월 17일). 여기에서 언급된 주방의 트렌드란 바로 대면형 주방의 확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패션 가전”과 “아트 가전”의 양문형 냉장고가 주방 가구와 조화를 이룬 대면형 주방, 확실히 그것은 가전업체의 주장처럼 가사노동의 공간보다는 갤러리화된 전시공간에 더 가까웠다. 또한 그 공간에서 주부가 화사하게 꾸며진 양문형 냉장고와 주방 가구를 뒤로 한 채 식탁 앞에 앉아 자녀 교육과 자산 증식과 관련된 업무를 수행하는 것, 그것 역시 가사 관리자보다는 주부 경영자라는 새로운 주부 정체성과 더 어울렸다. 이렇게 양문형 냉장고는 주부 정체성의 전환과 아파트 주방 공간의 재편과 긴밀하게 상호작용함으로써, 대면형 주방의 경관을 새롭게 꾸미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공간을 무대로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제시할 수 있었다.

3. 3. 대형 할인점의 증가

양문형 냉장고, 중산층 주부, 대면형 주방이 만들어내는 삼각관계는 이상적인 주방 모델의 골간으로서, 양문형 냉장고가 일반 주부들에게 선망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는 기능적 측면에서 양문형 냉장고의 보급 확대를 추동하는 사회문화적 요인도 자리하고 있었다. 2000년대 전반에 걸쳐 진행된 대형 할인점의 증가가 그것이다.

1993년에 서울 도봉구에 국내 대형 할인점 1호점인 창동점을 개장해 2000년에 28개였던 이마트의 점포수는 2008년에는 119개로 급증했다. 이 시기, 홈플러스는 113개, 롯데마트는 61개의 매장을 운영했고, 이마트를 포함한 3사의 매장 수는 300개에 육박했다(『매일경제신문』, 2008년 12월 2일). 1990년대 중후반 신도시나 신시가지를 중심으로 들어서던 대형 할인점은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수도권과 지방의 도시 주요 상권에 거점을 마련하고 치열하게 경쟁을 벌이면서 몸집을 키워 나갔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대형 할인점의 쇼핑 경험은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한 국지적인 현상에 가까웠으나, 200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점차 전국적으로 보편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이와 함께 대형 할인점은 '창고형 할인매장'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다양한 부대시설을 마련해 ‘복합생활문화공간’으로 변모하기 시작했고, 그 중 상당수는 땅값이 비싼 도심 한복판에 터전을 마련하고 소비자의 일상생활과의 밀착을 시도했다. 특히 도심에 입지를 마련한 대형 할인점의 경우, 식당, 병원, 은행, 세탁소, 문화센터 등 각종 편의·부대시설을 갖춰 고객 중심의 “원스톱 쇼핑”을 내세우기도 했다. 한편에서는 주말에 승용차를 몰고 가서 일주일 치 신선식품과 생활용품을 구입하는 경향이 있었다면, 다른 한편에서는 대형 할인점에 가서 영화 관람과 외식을 포함해 거의 모든 소비 활동을 해결하려는 경향도 등장했다(『경향신문』, 2006년 3월 24일).

이렇게 대형 할인점을 통한 소비 활동이 보편화되면서 가정에서는 새롭게 해결해야 문제가 대두되었다. 대형 할인점에서 다량으로 구입한 갖가지 신선식품을 보관하기에는 기존 일반형 냉장고의 내부 공간이 너무 협소했다. 새로운 대용량의 냉장고가 필요했는데, 양문형 냉장고는 바로 이런 요구에 기능적으로 부응하는 제품이었다. 대형 할인점의 증가는 앞서 살펴본 주부 정체성의 전환이나 대면형 주방의 등장과 같은 요인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지는 않았지만, 양문형 냉장고의 보급을 일반 가정 전반으로 확대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4. 결론

2007~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양문형 냉장고를 비롯한 고급 생활가전 브랜드들은 뚜렷한 굴곡 없이 현상 유지의 상태를 지속해 나갔다. 냉장고의 표면을 장식하던 화려한 꽃그림 유행은 경기 침체의 부침 속에서 천천히 잊혀갔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1997년 지펠 냉장고의 첫 출시 이후 10년의 시기는 비록 외환위기의 국면에서 출발하긴 했으나 고급 브랜드화를 필두로 다양한 시도들이 거듭된 국내 생활가전 디자인의 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국산 양문형 냉장고의 변화상을 살펴보고자 했다. 연구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1997년 외환위기 직전부터 2007~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전까지 양문형 냉장고의 변화 과정은 크게 세 가지 단계로 구분해볼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1997년부터 1999년까지 지펠과 디오스가 출시되어 수입 제품과 경쟁을 벌이며 시장에 안착하는 단계이고, 두 번째 시기는 2000년부터 2004년까지 양문형 냉장고가 “인테리어형 가전”과 “시스템 가전” 등으로 디자인의 변화를 시도하면서 생활가전의 고급화를 선도하고 시장 점유율을 높여가는 단계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시기는 2005년부터 2006년까지 양문형 냉장고가 “패션 가전” 대 “아트 가전”의 대결 구도를 형성하면서 냉장고 시장의 주류 모델로 등극하는 단계이다.

둘째, 위와 같은 변화 과정은 매 단계마다 소비의 양극화, 주부 정체성의 전환, 아파트 주방 공간의 재편, 대형 할인점의 증가 등과 같은 사회문화적 요인들과 긴밀하게 상호작용한 결과였다. 양문형 냉장고는 외환위기 이후 소비 양극화의 영향 아래 시장 경쟁력을 키워나갔고, 이후에는 소비 주체와 사용 공간과 역동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냉장고 시장 재편을 위한 나름의 경로를 만들어 나갈 수 있었다. 확실히 양문형 냉장고는 ‘주부 경영자’라는 새로운 주부 정체성 모델과 연대했고 ‘대면형 주방’이라는 새로운 주방 공간의 질서와 공명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백색가전의 틀에서 벗어나 생활가전 전반의 고급화를 주도하면서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선보일 수 있었다. 이와 함께 2000년대 전반에 걸친 대형 할인점의 증가세는 양문형 냉장고의 대중화를 추동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셋째, 본 연구는 잡지와 신문의 기사 자료를 중심으로 관련 논문과 저술 등을 참고해 진행되었다. 문헌 자료의 해석에 기반을 둔 연구로서 미흡한 점이 명확한데, 이를 보완하기 위해 지펠과 디오스와 관련해 실무를 담당했던 디자이너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나 구술 채록을 추후에라도 진행할 필요가 있다.

Acknowledgments

This study was supported by grant from Dongyang University in 2019

본 연구는 2019년도 동양대학교 학술연구비의 지원으로 수행되었음.

Notes

Citation: Park, H. (2021). Changes in Refrigerator Design of Zipel and Dios from the late 1990s to the mid-2000s. Archives of Design Research, 34(4), 285-303.

Copyright : This is an Open 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educational and non-commercial use,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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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1

Figure 1
Refrigerator advertisements by major home appliance companies in 1995

Figure 2

Figure 2
Refrigerator advertisements by major home appliance companies in 1995

Figure 3

Figure 3
Refrigerator advertisements by major home appliance companies in 1995

Figure 4

Figure 4
A positioning map for Zipel at the planning stage (Her, 1999)

Figure 5

Figure 5
An advertisement named “Zipel Sinjak” in 1998

Figure 6

Figure 6
An advertisement of “Zipel NEOGONGAN” in 2002

Figure 7

Figure 7
“Andre Kim” refrigerator and Art Dios in 2006

Figure 8

Figure 8
“Andre Kim” refrigerator and Art Dios in 2006

Table 1.

Sales and operating profit of home appliances of LG Electronics and Samsung Electronics(『한겨레 21』, 2007년 3월 29일)

구분 LG전자 삼성전자
매출액 영업이익 매출액 영업이익
2002년 4조 3000억원 3852억원 3조 7000억원 1285억원
2003년 5조 6400억원 4967억원 3조 4050억원 -1108억원
2004년 6조 200억원 4480억원 3조 2580억원 -536억원
2005년 5조 8500억원 4726억원 3조 3800억원 -914억원
2006년 5조 8300억원 4297억원 3조 4000억원 -1800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