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Vol. 37, No. 1

1983년 KBS 집중기획 <세계는 디자인혁명 시대>의 내용과 맥락의 재구성
Reconstructing the Content and Context of the KBS Special Feature “The World Is in an Era of Design Revolution”(1983)
  • Haecheon Park : Department of Design, Dongyang University, Associate Professor, Dongducheon, Korea
  • 박 해천 : 동양대학교 디자인학부, 부교수, 동두천, 대한민국

연구배경 1983년에 방영된 KBS 집중기획 <세계는 디자인혁명 시대>는 당시 일반 대중에게 생소했던 산업디자인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디자인계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프로그램은 1980년대 한국 디자인사를 언급할 때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지만, 본격적인 연구의 대상이 못한 상태이다. 본 연구는 이러한 배경에서 <세계는 디자인혁명 시대>를 연구 대상으로 삼고자 한다. 먼저 이 프로그램의 세부 내용을 재구성한 후, 프로그램 방영 전후 산업디자인계의 변화를 검토하면서 이 프로그램의 역사적 의미를 좀 더 명확히 밝히고자 한다.

연구방법 본 연구는 연구 방법으로 영상 분석과 문헌 연구를 택했다. 한편으로는 <세계는 디자인혁명 시대>의 총 6부, 약 330분 분량 영상 자료의 내용을 분석 정리했고, 다른 한편으로 문헌 연구를 통해 당시 산업디자인 개념, 기업 디자인, 디자인 교육의 변화상을 살펴봤다.

연구결과 <세계는 디자인혁명 시대>는 1부부터 5부까지 주요 선진 산업국을 탐방 대상으로 삼아 기업 디자인, 디자인 전문회사, 산업디자인 교육, 스포츠 산업, 쇼핑 공간 등의 최신 동향을 살펴보았고, 6부에서는 국내 산업디자인계의 현황도 점검했다. 한편 이 프로그램의 방영 이후, 대기업의 디자인연구소 설립 및 공모전 개최, 한국디자인포장센터의 우수디자인 선정제 도입, 공과 대학의 산업디자인학과 신설 등 국내 산업디자인계에도 일련의 변화가 일어났다. 물론 <세계는 디자인혁명 시대> 방영과 그 이후 사건 간에 뚜렷한 인과 관계를 규명하기란 쉽지 않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이 프로그램이 강조한 산업디자인의 개념과 산업디자이너의 역할, 그리고 새로운 디자인 교육의 필요성 등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기보다는, 1980년대 초반 산업디자인계의 젊은 여론 주도층이 디자인 매체를 통해 표명한 관점과 입장과 상당 부분 겹치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세계는 디자인혁명 시대>의 방영은 확실히 산업디자인계 내부의 특정한 관점과 입장을 외부로 증폭 확산시켜 사회 전반의 여론을 변화시키는 데 있어서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결론 <세계는 디자인혁명 시대> 방영 이후 1980년대 초중반의 변화는 국내 산업디자인계가 1980년대 후반 ‘3저 호황’에 따른 국내외 경제 상황 변화에 적극 대응하는 데 초석 역할을 했다. 이 시기의 고도성장은 이전까지 수출 진흥에만 집중되었던 산업디자인계의 관심을 내수 시장으로도 돌려놓는 계기를 제공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디자인 프로세스의 합리화와 디자인 교육의 체계화가 진행되었다. 산업디자이너들 역시 “수출 산업의 역군”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생활문화의 창조자”이자 “생활집단의 대변인”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Abstract, Translated

Background The KBS special feature “The World Is in an Era of Design Revolution” which aired in 1983, had a great impact on not only the design field but also society by covering the topic of industrial design, which was unfamiliar to the public at the time. This program is often mentioned when discussing South Korean modern design history, but it has not been the subject of full-scale research. Against this background, this study aims to examine the program. First, the details of the program are reconstructed, and the historical significance of the program is clarified by examining the changes in the industrial design field before and after the program aired.

Methods This study chose video analysis and literature research as research methods. We analyzed the contents of the six parts of the program, approximately 330 minutes of video material, and we examined the changes in the concept of industrial design, corporate design, and design education at the time through literature research.

Results The program explored the latest trends in corporate design, design firms, industrial design education, the sports industry, and shopping spaces in major industrialized countries from Parts 1 to 5. Part 6 examined the current state of domestic industrial design. After the program was aired, a series of changes occurred in the domestic industrial design field, including the establishment of design research institutes and competitions by large companies, the introduction of a good design selection system by the Korea Design Packaging Center, and the establishment of an industrial design department at an engineering university. Of course, identifying a clear causal relationship between the airing of the program and subsequent events is not easy. It is important to note that the concept of industrial design, the role of industrial designers, and the need for new design education emphasized by the program, were not completely new, but rather overlapped with the views and positions expressed by young public opinion leaders in the industrial design field in the early 1980s. The broadcasting of the program can certainly provide an important opportunity to change the public opinion of society by amplifying and spreading specific views and positions that had been confined to the design field.

Conclusions The changes in the early to mid-1980s following the broadcast of the program are pivotal in helping South Korean industrial design respond to the changing domestic and international conditions that followed the economic boom of the late 1980s. The high growth during this period provides an opportunity for the industrial design field, which had previously been focused only on export promotion, to shift its attention to the domestic market. In this condition, the design process is rationalized, and design education is systematized. Industrial designers also have begun to change their role from “practitioners of export industry” to “creators of lifestyle culture” and “spokesmen for consumer groups.”

Keywords:
“The World is in an Era of Design Revolution”, 1980s, Industrial Design, Design Education, Corporate Design, Design Culture, Korean Design History, <세계는 디자인혁명 시대>, 1980년대, 산업디자인, 디자인 교육, 기업 디자인, 디자인 문화, 한국 디자인사.
pISSN: 1226-8046
eISSN: 2288-2987
Publisher: 한국디자인학회Publisher: Korean Society of Design Science
Received: 10 Oct, 2023
Revised: 01 Nov, 2023
Accepted: 23 Nov, 2023
Printed: 28, Feb, 2024
Volume: 37 Issue: 1
Page: 353 ~ 375
DOI: https://doi.org/10.15187/adr.2024.02.37.1.353
Corresponding Author: Haecheon Park (ecri11@naver.com)
PDF Download:

Funding Information ▼
Citation: Park, H. (2024). Reconstructing the Content and Context of the KBS Special Feature “The World Is in an Era of Design Revolution”(1983). Archives of Design Research, 37(1), 353-375.

Copyright : This is an Open 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educational and non-commercial use,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1. 서론

지금으로부터 41년 전인 1983년 1월 10일 월요일 밤 10시, KBS 집중기획 <세계는 디자인혁명 시대>의 1부, <기업 디자인-새 모델에 사운을 건다> 편이 방송 전파를 탔다. 이후 총 6회에 걸쳐 매주 월요일 밤에 방영된 이 프로그램은 당시 일반 시청자들에게 생소했던 ‘산업디자인’ 분야를 심도 있게 다루면서, 1부부터 5부까지 주요 선진 산업국을 중심으로 기업 디자인, 디자인 전문회사, 디자인 교육, 스포츠 산업, 쇼핑 공간 등의 최신 동향을 소개했다. 그리고 방영 기간 도중 국내 실정도 취재해달라는 시청자 요청이 잇따르자, 급하게 6부를 추가 편성해 국내 산업디자인계 현황도 살펴보았다. 취재기자 겸 진행자 1명, 프로듀서 1명, 카메라맨 2명, 무역협회보 기자 1명 등 5명의 취재팀1)이 약 2개월의 조사·기획 단계를 거친 후 6~7만 달러의 예산을 들여 59일 동안 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스위스, 홍콩 등 8개국, 50여 개의 기업과 디자인 전문회사, 5개의 디자인 교육기관을 탐방하고, 60여 명의 디자이너, 디자인 전문가, 디자인 교육자와 인터뷰를 진행한 결과물이었다(Jung, 1983).

이 프로그램은 내용과 규모 면에서 1980년대 초반 한국인의 시선으로 작성한 ‘세계 산업디자인 견문록’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었다. 프로그램의 제작 의도는 기획을 주도한 방윤현이 취재기자 겸 진행자로서 1부 서두에 밝히고 있듯이 “선진국의 산업디자인이 어디까지 가고 있으며, 우리와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는지”를 본격적으로 살펴보겠다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1980년대 초반 세계 경제 침체와 더불어 위기를 맞이한 한국 경제의 상황에서 수출 경쟁력 제고를 위해 국내 산업디자인을 어떻게 “발전의 본 궤도”에 올려놓을 것인가라는 전략적인 문제의식이 담겨 있었다.

프로그램이 방영되자 일차적인 반응은 디자인계에서 나왔다. 디자인 전문지 『월간 디자인』은 “충격”이라고 표현했다. 무엇보다 디자인에 대한 사회 전반의 인식 수준이 그리 높지 않은 상황에서 당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지녔던 대중매체의 국영 방송이 디자인, 그것도 산업디자인이라는 특정 전문분야를 6회에 걸쳐 집중적으로 다뤘다는 것 자체가 일단 충격이었다. 물론 이때의 충격이 단순히 이전까지 디자인 잡지의 흑백 사진으로 접하던 선진국 디자인의 최신 동향을 생생하게 움직이는 컬러 영상을 통해 체험하는 것에만 그쳤던 것은 아니었다. 이 프로그램은 제작 의도대로, 중요한 해외 사례를 언급할 때면 어김없이 “우리와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는지”를 확인하면서 “발전의 본 궤도”에 진입하지 못한 한국의 현실을 환기했다. 『월간 디자인』의 기자가 표현한 대로, “일선 디자이너끼리, 업계에서는 업계끼리, 학교에서는 학계대로 늘 말해오던 문젯거리들”, 그러니까 “대화와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던 산업디자인 실무와 교육, 양쪽 현장이 직면한 문제들을 방송 전파의 힘을 빌려 디자인계 외부로 공론화했던 것이다(Jung, 1983; Kim, 2013).

불과 1년 전만 해도 서울대 응용미술과 강사 장호익은 한국에서 “디자인이 사회적인 요구로 자연발생적으로” 등장한 것이 아니며 “경제발전 과정에서 외부의 영향에 의해 필요성이 강조”되었다고 말하면서, “중산층이 결여된 경제 구조”에서 디자인의 일상화는 온전히 이뤄지기 어려우며 디자인에 대한 대중적 인식 확산 역시 기대하기 쉽지 않다고 지적한 바 있었다(Jang, 1982). 하지만 <세계는 디자인혁명 시대>는 이런 진단을 뛰어넘어, 『월간 디자인』의 표현처럼 “기대 이상의 효과”를 각계로 파급시켰다. 디자인계 외부의 반응은 TV 프로그램 리뷰 형식으로 게재된 『조선일보』 기사에 잘 드러났다. 이 프로그램을 시청한 기자는 “불모나 다름없는 디자인 분야에 TV가 관심을 보인 것에 반가움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면서 이 프로그램이 디자인 전반이 아니라 산업과의 관계에 치중하긴 했지만 획기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그 덕분에 “디자인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얼마나 큰가를 실감케 해준 것만으로 설득 효과는 매우 컸”으며, 더 나아가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지향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세계 시장을 겨냥하는 산업 전략을 비교하고 개발하는 데 좋은 참고 자료가 되었다”고 평가했다(Jung, 1983).2) 프로그램 방영 이전까지 방송뿐만 아니라 신문 역시 디자인 일반에 관해 무관심으로 일관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이러한 언급은 상당한 태도 변화를 함축하는 것이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이 프로그램이 경제적·산업적 차원에서 디자인의 중요성과 필요성에 대한 인식을 확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만큼은 분명했다. 그리고 실제로 언론계에서도 이러한 성과를 인정받아 이 프로그램은 1983년 한국방송대상 TV 보도 부문에서 작품상(문화공보부 장관상)을, 한국기자협회 주최 한국기자상에서 방송제작 부문 기자상을 수상하기도 했다(『경향신문』, 1983년 8월 17일; 『동아일보』, 1983년 9월 1일).

방영 당시의 이러한 평가는 1990년대로도 이어졌다. <세계는 디자인혁명 시대>가 방영된 지 10년이 지난 시점인 1993년, 정부는 최초로 산업디자인 부문에 훈·포장 제도를 도입했다. 당시 최고의 영예인 동탑 훈장은 서울대 김교만 교수에게 수여되었고, 그다음 영예인 대통령 표창은 박종서 현대자동차 디자인실장과 함께 <세계는 디자인혁명 시대>의 방윤현 당시 KBS 춘천총국 보도국장에게 돌아갔다. 이는 <세계는 디자인혁명 시대>의 파급력이 단발성에 그치지 않고 방영 이후에도 지속되었으며 디자인계 역시 그에 대해 높은 평가를 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한 21세기에도 이 프로그램은 1980년대 한국 디자인사를 다룰 때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이를테면, 한국디자인진흥원이 개원 50주년을 기념해 출간한 『디자인 코리아』에서 집필진은 이 프로그램의 방영을 1983년을 대표하는 디자인계의 역사적 사건으로 선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평가하기도 했다. “텔레비전을 통한 매체 파급력이 지금보다 훨씬 강하던 당시, 이 프로그램은 디자인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없었던 우리 사회에 강력한 메시지를 던지며 디자인의 가치를 이해시켰고, 정부와 관련 업계에는 한국 디자인의 현재 상황을 냉철하게 돌아보게 했다”는 것이다(Oh et al., 2020).

그런데 이렇게 국내 산업디자인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 이 프로그램은 지금까지 본격적인 연구의 대상이 된 적이 없다. 한국 디자인사를 다루는 문헌들에서 단평 수준으로 언급되는 데 그쳤거나, 당시 텔레비전으로 프로그램을 시청했거나 이후에 비디오 녹화 영상을 관람했던 이들 사이에 입소문의 대상으로 남겨졌을 따름이다. 게다가 이 프로그램이 회차별·주제별로 구체적으로 어떤 세부 내용을 담았는지 역시 문헌 자료로 정리되어 있지 않은 상태다. 본 연구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세계는 디자인혁명 시대>를 연구 대상으로 삼고자 한다. 먼저 해당 프로그램의 세부 내용을 재구성한 후, 프로그램 방영 전후 산업디자인계의 변화를 검토하면서 이 프로그램이 이러한 변화와 맺게 되는 관계의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에서 산업디자인 개념과 디자인 교육, 그리고 기업 디자인과 관련된 내용을 중점적으로 다룰 것이다.

이를 위해 본 연구는 연구 방법으로 영상 분석과 문헌 연구를 택하고자 한다. 한편으로는 KBS 아카이브를 통해 수집한 <세계는 디자인혁명 시대>의 총 6부, 약 330분 분량 영상 자료의 내용을 회차별·주제별로 분석 정리하고, 다른 한편으로 디자인 전문지 『월간 디자인』과 『산업디자인』, 관련 저술 등에 관한 문헌 연구를 통해 1980년대 초중반 국내 산업디자인계의 변화상을 알아보고자 한다. 그리고 양자 간의 영향 관계를 검토하면서 이 프로그램의 역사적 의미를 좀 더 명확히 밝히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세계는 디자인혁명 시대>는 1980년대 초반, 이제 막 1인당 국민소득 2,000달러를 넘어선 동북아시아 개발도상국의 독특한 시선으로 해외 산업디자인의 최신 동향을 기록한 아카이브 자료이면서, 동시에 문헌 자료와의 관계 속에서 당시 국내 산업디자인의 상황을 되짚어보기 위한 역사 연구의 조망대로 간주될 것이다.

2. <세계는 디자인혁명 시대>의 내용 재구성
2. 1. “예술과 산업이 만나는 새로운 분야” : 1부 <기업 디자인-새 모델에 사운을 건다>

1부가 시작되면, 하프시코드로 연주되는 바로크 음악이 들려오는 가운데 이탈리아의 밀라노 대성당(Duomo di Milano)이 화면에 등장한다.3) 진행자는 대성당 앞 광장에 서서 이 성당이 보여주는 “인간의 위대한 창조력과 예술적 감각”이 예술뿐만 아니라 산업까지 발전시켜왔다고 말하면서, “예술과 산업이 만나” “어떻게 물건을 만드느냐”라는 문제를 고민하는 전문분야로 ‘산업디자인’을 소개한다. 그에 따르면 산업디자인은 대량생산 제품의 품질을 고급화하는 데 기술 못지않게 중요한 분야다.

취재진이 밀라노 대성당 다음으로 선택한 방문지는 프랑스 파리에 위치한 세계적인 패션디자이너 피에르 가르뎅(Pierre Cardin)의 제품 전시장이다. 이곳에는 피에르 가르뎅이 독특한 스타일로 직접 디자인한 하이엔드(high-end) 제품들, 즉 책상, 텔레비전, 전화기, 가구, 주류 보관함 등이 진열되어 있고, 진행자는 그 제품들을 직접 조작해보며 디자인적 특성을 설명한다. 다음 장면에서는 피에르 가르뎅이 직접 등장해 디자인이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묻는 진행자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상품을 팔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창조가 중요합니다. (...) 상품이 인기를 누리기 위해서는 최우선적으로는 창조 정신, 즉 디자인 개발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디자인이 없는 제품은 구태의연할 수밖에 없으며 모방으로 생산자와 소비자가 만족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현재도 그렇지만 앞으로 디자인은 모든 산업의 사활을 결정하는 필요불가결한 요소로 등장할 것입니다. (...) 디자인의 역할은 제품에 창의성을 부여해 새로운 구매력을 창출해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Figure 1 Scenes from Part 1

이 프로그램에서 처음 등장하는 디자이너가 당시 국내에 널리 알려진 패션디자이너인 것은 그를 징검다리로 삼아서 일반 시청자들이 산업디자인에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도우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런데 피에르 가르뎅은 창조와 모방이라는 이분법에 근거해 디자인의 창의적 면모를 부각하고, 디자인의 역할을 “제품에 창의성을 부여해 새로운 구매력을 창출해내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니까 그는 산업디자인보다는 디자인 일반에 관해 자신의 관점을 피력하면서, 패션디자이너답게 상업적 관점에서 디자인의 예술적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다. 진행자는 이런 점을 의식한 듯, 인터뷰에 이어지는 다음 장면에서 산업디자인이 “예술과 기술이 조화를 이루는 또 다른 기술 분야”라고 부가적으로 설명하면서 그 속성으로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다양성”, “편리성”, “시장성”을 언급한다.

취재진은 이러한 속성들을 구체화한 산업디자인 사례를 살펴보기 위해 글로벌 기업의 사내 디자인연구소를 탐방하는 여정에 나선다. 먼저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가 올리베티(Olivetti)를 방문한다. 50여 명의 디자이너가 일하는 이 기업의 디자인연구소에서 제일 먼저 모습을 선보이는 것은 올리베티의 렉시콘(Lexicon) 80 타자기다. 1948년에 출시된 이 제품은 올리베티가 산업디자인의 도입을 통해 큰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첫 성과였을 뿐 아니라, 이후 일관된 디자인 정책의 추진을 통해 컴퓨터를 비롯해 사무기기 분야의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도약대 구실을 했다. 취재진은 올리베티의 디자이너들이 사무기기 디자인에 인간공학을 적극적으로 적용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들은 제품 외형에만 신경 쓰는 것이 아니라, 인체 구조와 사용 자세, 정보처리 과정과 심리 상태 같은 인간공학적 요소를 소비자 만족을 위한 중요한 변수로 활용하고 있었다.

올리베티 탐방을 마친 취재진은 이번에는 지구 반대편인 홍콩 번화가의 전자제품 판매장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일본과 유럽에서 생산된 텔레비전, VTR, 오디오 등 전자제품을 살펴본 뒤, 매장 매니저의 입을 빌려서 국산 제품이 품질은 일본 제품에 손색이 없지만 디자인이 충분히 현대화되어 있지 못하다고 지적한다. 여기에서 디자인의 현대화란 일본의 전자산업이 성취한 것으로, 소비자의 기호에 초점을 맞춰 디자인을 다양화하고 그 변화를 신속하게 이뤄내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경향은 1970년대 후반 이후 소니 워크맨을 필두로 일본 전자제품의 세계적인 열풍을 이끌어냈던 것이기도 했다. 취재진은 홍콩의 다음 행선지로 당연하다는 듯이 일본을 택한다. 그들은 당시 새롭게 부상하던 일본 전자업체 파이오니아(Pioneer)의 디자인연구소를 방문해 그곳 디자이너들이 영상·음향기기 같은 전자제품을 어떻게 디자인하는지 살펴본다. 여기에서 주요 디자인 사례로 첨단 영상기기의 리모컨, 컴포넌트 오디오의 제어 패널, 그리고 누워서 듣는 오디오 시스템 등이 등장한다. 진행자는 일본의 전자제품이 대중 지향형과 기술 과시형, 두 유형의 디자인으로 쉴 새 없이 개발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일본 업체들끼리 디자인 주도의 제품개발로 서로 경쟁을 벌이며 세계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사무기기와 전자제품 디자인의 다음 차례는 당시 ‘산업디자인의 총아’로 군림하던 자동차 디자인이다. 먼저 1982년 10월에 열린 파리 국제모터쇼의 전시장을 방문해 유행의 첨단을 달리는 다양한 형태의 콘셉트카를 보여준다. 진행자는 전시장 모습이 “달리는 조각품들의 경연장” 같다고 표현한다. 이후 취재진은 “세계 최대의 자동차업체”인 미국 제너럴모터스(General Motors)의 기술연구소로 향한다. 본래 이 업체의 방문 목적은 자동차 디자인 프로세스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제너럴모터스가 현장 공개를 꺼리고 최소한의 정보만을 제공하자 아쉬움을 표한 채로 이번에는 이탈리아 토리노의 자동차 디자인 전문업체 피닌파리나(Pininfarina)로 향한다. 당시 이 업체는 영국 롤스로이스와 프랑스 푸조 같은 유명 업체의 자동차 디자인을 담당하면서 자체 개발한 스포츠카를 직접 생산하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15명의 “창조적인 디자이너들”이 자신의 디자인 팀을 이끌며 개별 프로젝트의 디자인 프로세스를 진행하는데, 취재진은 그중에서 컴퓨터에 의해 상당 부분 자동화된 자동차 모형 제작 과정에 주목한다. 이후 진행자는 일본의 토요타(Toyota) 자동차 디자인연구소4)와 미국의 시카고 공작기계 전시회를 살펴보면서, 디자인이 주도하는 제품개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앞서 1부 중반부에서 진행자는 산업디자인의 역사를 간단히 정리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산업디자인은 18세기 후반 영국의 산업혁명 속에서 태동했으며, 20세기 초반 유럽에서 개화되었다. 전후 1950년대에는 미국이 기업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산업디자인을 도입했고, 일본도 1960년대 중반 고도성장의 물결을 타고 산업디자인 시대의 막을 열었다. 이 프로그램의 제목인 “디자인혁명 시대”란 이러한 역사적 흐름이 변곡점에 도달한 듯 보였던 1980년대의 이행기적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진행자는 1부 결말부에 이르러 글로벌 기업 탐방을 마무리하면서 “디자인혁명 시대”가 당도하게 될 산업디자인의 향후 발전 양상을 전망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그에 따르면, 산업디자인은 한편으로는 제품 부문에만 머무르지 않고 조선업과 항공산업, 우주선 개발로 계속 영역을 넓히고 비중을 높임으로써,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공학이나 컴퓨터 응용 디자인 같은 다양한 접근법을 통해 디자인 프로세스 자체를 과학화함으로써 기술과 더불어 산업의 양대 지주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었다.5) 이 전망에 따르면, 서두에서 기술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표현되던 디자인은 가까운 미래에 기술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될 것이었다.

2. 2. 아이스박스에서 고속열차까지 : 2부 <디자인 전문회사-멋과 성능을 팝니다>

1부가 “디자인혁명 시대”의 변화상을 짚어보기 위해 글로벌 기업의 사내 디자인연구소를 살펴보았다면, 2부는 1부와 짝을 이루며 선진국의 주요 디자인 전문회사를 탐방한다. 2부가 소개하는 디자인 전문회사는 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의 7곳이다. 진행자는 2부 도입부에 “흔히 ‘디자인 컨설턴시(design consultancy)’로 불리는 디자인 전문회사”가 “기업의 의뢰를 받아 디자인을 개발하는데 기업에 종속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장 여건과 소비자 취향, 디자인 흐름을 냉철하게 파악해 디자인만을 개발”하는 전문업체라고 정의하면서, 기업 디자인과 더불어 디자인 발전의 쌍두마차이자 “수많은 성공작의 산실”이라고 설명한다.


Figure 2 Scenes from Part 2

먼저 진행자는 미국의 경우 디자인 전문회사가 산업디자인 발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해왔다고 지적하면서 시라큐스의 풀로스 디자인연구소(Pulos Design Associates)를 방문한다. 시라큐스 대학 산업디자인학과 교수인 아서 풀로스(Arthur Pulos)가 1959년에 설립한 이 회사는 시라큐스 대학 출신의 디자이너 4명으로 구성된 소규모 스튜디오이지만, 뛰어난 디자인 결과물로 클라이언트 업체의 매출을 신장시키고 뉴욕현대미술관의 영구 소장품으로 선정되는 등 그 나름의 성과를 거두고 있다. 여기에서는 연구소 구성원들이 직접 등장해서 자신이 디자인한 제품을 설명한다. 사용자가 간편하게 한 손으로 회전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휴대용 드릴, 단순한 형태의 리모컨으로 조작할 수 있는 소형 사무용 녹음기, 모니터의 위치와 각도를 사용자의 시선에 맞춰 바꿀 수 있는 컴퓨터 모니터, 텔레비전 카메라를 이용해 환자의 신체 부위를 진단하는 의료 기구 등 디자인 대상이 무척 다양하다.

풀로스 디자인연구소 다음은 시카고의 골드스미스(Goldsmith) 디자인연구소 차례다. 40명의 디자이너가 근무하는 이 업체는 RCA나 샘소나이트 같은 글로벌 기업의 디자인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진행자는 시장성과 디자인 트렌드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디자인 방향을 결정하는 이 업체의 디자인 프로세스와 함께, 삼각형 형태의 탁상용 RCA 텔레비전, 기존의 박스 형태에서 탈피한 휴대용 아이스박스, 홍콩의 은행을 위한 컴퓨터 시스템 등을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소개한다.

취재진은 두 곳의 디자인 전문회사를 방문한 뒤 태평양 건너 일본으로 향한다. 진행자는 일본의 산업디자인이 전후에 미국과 유럽의 제품을 모방하는 데서 출발했으나 1960년대 중반 수출 붐과 함께 디자인 전문회사를 중심으로 빠른 속도로 발전을 거듭해 이제는 세계 디자인의 흐름을 주도하는 위치에 올라섰다고 설명한다. 취재진은 도쿄와 오사카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200여 개의 디자인 전문회사 중 “일본 최대의 종합디자인회사”, GK 디자인 그룹을 찾아간다. 창업자인 디자이너 에쿠안 겐지(久庵憲司)를 중심으로 80여 명 디자이너를 포함해 200여 명 직원이 일하는 이 업체는 일본뿐만 아니라 100여 개의 글로벌 기업과 협력 관계를 맺고 있다. 에쿠안 겐지에 따르면, GK 디자인 그룹은 “귀이개에서 우주여행선까지”라는 슬로건6) 아래 “새로운 사물의 세계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을 목표로 내세운다. 진행자는 오디오 시스템과 밀링 머신 같은 디자인 사례를 살피면서, 이 연구소가 일본 디자인을 특징짓는 “단순성과 복잡성, 다기능과 다목적, 소형화의 미학”을 대표하면서도 그 나름의 “간결하면서도 세련된 디자인”을 추구한다고 평한다. 또한 1부에서 살펴본 사례에 뒤이어 여기에서도 컴퓨터를 활용한 자동차 디자인 프로세스에 주목하면서 새로운 디자인 도구로서 컴퓨터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일본에 이은 다음 행선지는 “산업디자인의 발생지”, 영국이다. 진행자는 영국 산업디자인의 특징이 “잦은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 디자인”이라고 설명하며 펜타그램(Pentagram)과 오글 디자인(Ogle Design)을 영국의 대표적인 디자인 전문회사로 소개한다. 1960년대 초반에 설립된 영국의 펜타그램은 9명의 유명 디자이너가 중심으로 건축·환경 디자인, 그래픽 디자인, 제품 디자인, 세 분야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이 특징인데, 이 업체의 주요 디자인 사례로는 동양의 전통미를 재해석한 일본 시세이도의 남성 화장품 패키지, 단순미를 강조한 파카 만년필, 유체역학을 고려한 영국의 인터씨티 125 고속열차 등이 소개된다. 펜타그램 다음은 “영화 <스타워즈>의 우주선을 디자인한 바 있”는 오글 디자인 차례다. 30여 명의 디자이너가 일하고 있는 오글 디자인은 자동차 디자인에 중점을 둔 디자인 전문회사로, 취재진은 여기에서는 모형제작실에서 다양한 재료로 디자인 모델이 제작되는 과정을 집중적으로 보여준다.

디자인 전문회사 탐방의 종반부를 장식하는 것은 프랑스의 카트린느·플로앙스(Catherine·Floans) 디자인 연구소와 이탈리아의 안토넬로(Antonello) 디자인연구소다. 두 명의 디자이너가 운영하는 카트린느·플로앙스 디자인연구소는 파리의 아파트에서 소규모 스튜디오 형태로 운영되는데, 취재진은 이들이 에르메스(Hermès) 같은 명품 패션 브랜드를 위해 직물 디자인을 진행하는 과정을 살펴본다. 한편 안토넬로 디자인연구소에서는 세 명의 디자이너가 이탈리아 고급 신발업체 라리오(Lario)를 위해 수작업으로 신발을 디자인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앞서 탐방한 미국, 일본, 영국의 디자인 전문회사들이 대량생산 체제와 밀접하게 관련된 산업디자인의 활동 양상을 예시한다면, 확실히 이 두 사례는 산업디자인보다는 오히려 패션·의류 산업과 연계된 디자인의 활동 방식을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한편, 1부가 글로벌 기업의 제품개발 프로세스를 중심으로 사내 디자인연구소의 역할과 위상을 소개하는 반면, 2부는 주요 디자인 전문회사를 다루면서 아이스박스에서 고속열차까지 산업디자인의 폭넓은 적용 범위와 다양한 성과를 보여주려고 한다. 진행자는 2부의 마지막 부분에서 탐방 내용을 바탕으로 산업디자이너의 역할 변화를 언급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그에 따르면, 이제 산업디자이너는 “단순히 물건의 외관을 어떻게 모양 있게 만드냐는 차원을 떠나 물건과 인간의 관계를 연구하고 그것을 제품에 구현하는 상품 문화의 관리자”로 변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 국제산업디자인단체협의회(ICSID) 회장의 말을 빌려서 산업디자이너는 놀라운 속도로 진행 중인 기술혁신과 보조를 맞추되 그에 휘둘리지 않고 인간 중심의 관점에서 책임 있는 자세로 신제품 개발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한다.

2. 3. 실무 중심의 디자인 교육 : 3부 <디자인 교육-기술+예술+학문>

3부는 산업 현장 일선에서 디자인 교육으로 시선을 돌린다. 앞선 2부 결말부에서 진행자는 국내 산업디자인이 아직 본궤도에 오르지 못한 것은 기업의 인식 부족 등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디자인 개발을 담당할 유능한 산업디자이너의 부족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렇다면 선진국에서는 경쟁력을 갖춘 산업디자이너를 어떻게 양성해내고 있는 것일까? 3부는 바로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구하기 위해 5곳의 교육기관을 탐방한다. 미국의 FIT(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 시라큐스(Syracuse) 대학, 일리노이 공대(Illinois Institute of Technology), 프랑스의 국립조형생활미술학교(École Nationale Supérieure des Arts Appliqués et des Métiers D’art), 이탈리아의 마랑고니 디자인학교(Istituto Marangoni)가 그것이다.

3부 도입부는 뉴욕의 자유분방한 거리 풍경을 별다른 설명 없이 짧게 보여준 후 곧바로 FIT의 의상 자료실 내부로 향한다. 진행자에 따르면, 이 의상 자료실은 “유럽 왕가의 왕비가 입었던 옷”부터 “최근에 유행했던 옷에 이르기까지 수만 가지의 옷” 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의 직물 공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옷감”도 소장하고 있다. 진행자는 “의상박물관”도 아닌 일개 대학의 의상 자료실이 이처럼 방대한 자료를 보유하고 교육에 활용하는 모습이야말로, 선진국의 디자인 교육이 지닌 저력의 원천이라고 지적한다. FIT의 의상 자료실 내부를 한참 살피던 카메라는 이내 실제 교육이 이뤄지는 실습실로 향한다. 1학년 모델 데생 수업과 2학년 재단 수업이 진행 중인 실습실 풍경을 보여준 뒤, 학생과의 인터뷰를 통해 3학년 의상 디자인 수업의 과제 진행 과정을 살펴본다. 이를 통해 실무 중심의 교육이 “교수와 학생이 격의 없는 대화를 통해” 이뤄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물론 실무 중심의 교육은 실습실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취재진은 교내의 소규모 직물 공장과 섬유 관련 실험실을 방문해 이 학교가 체험 학습을 통해 생산 공정과 기술을 습득하는 교육 환경을 갖추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산업과 연계한 기술 교육이 이루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7)

취재진은 FIT를 소개한 후 시라큐스 대학과 일리노이 공대의 산업디자인학과를 방문한다. 먼저 탐방하는 곳은 당시 “미국 산업디자인 교육의 최고 명문”으로 알려져 있던 시라큐스 대학이다. 일단 이 대학에서 취재진의 카메라는 강의실 뒤편에 자리를 잡고 수업 현장을 관찰한다. 2학년 산업디자인 원리 수업에서는 교수가 동물의 신체 움직임을 추상화해 제품 형태로 표현하는 방법에 대해 강의하고 있고, 3학년 제품디자인 개발 수업에서는 교수와 학생들이 프로젝트 주제 선정과 관련해 토론하고 있다. 진행자는 이 디자인학과의 교육과정이 타 대학과 달리 5년제 과정이며, 학과 학생들이 1학년 교양 과정을 공부한 뒤 2학년 진급 시 경쟁률 3대 1의 테스트 과정을 거쳐 선발된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리고 2,3학년 과정에서는 실습 과제 중심의 교육을 통해 제품 디자인 실무를 가르치고 4학년에서는 디자인과 사회의 관계를, 그리고 최종 학년인 5학년에서는 미래의 디자인 관리자에게 필요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교육한다고 소개한다. 당시 학과장이던 제임스 퍼클(James Puckle)은 5년제 교육과정이 “급속히 발전하는 과학기술과 다양해지는 소비자 요구를 충족시키는 제품”을 디자인할 수 있는 인재를 교육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시라큐스 대학이 교육 목표로 삼는 것은 특정 제품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디자이너보다는 폭넓은 시야를 지닌 디자인 관리자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이후 재학생과의 인터뷰를 통해 좀 더 명확하게 표현되지만, 여기에서 디자인 관리자란 “소비자와 산업의 교량 역할”로서, 디자인을 통해 마케팅과 매니지먼트를 연결할 줄 아는 전문가를 의미했다.


Figure 3 Scenes from Part 3

이후 취재진은 시카고로 이동해 일리노이 공대를 방문한다. 진행자는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가 설계한 크라운 홀을 배경으로 삼아 이 대학의 산업디자인학과가 “컴퓨터를 응용한 실무 중심의 디자인 교육”으로 유명한 곳이라고 소개한다. 그리고 앞선 두 대학과는 달리 실습실과 강의실이 아니라 컴퓨터실로 향해, 실제 학생들이 컴퓨터 환경에서 디자인을 진행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진행자는 일리노이 공대의 산업디자인학과가 여타 대학과 달리 공과 대학에 속해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지적하면서, 이 학과가 추구하는 디자인 교육이 공학적인 관점에서 디자인과 기술을 결합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에서 컴퓨터는 디자이너가 새로운 기술개발과 보조를 맞추도록 돕는 도구 역할을 담당한다. 컴퓨터의 역할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캐드(CAD) 프로그램을 통해 직접 디자인 실무를 진행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디자인에 필요한 정보를 컴퓨터를 활용해 분석하는 것이다. 후자의 방향은 앞서 1부 결론부에서 진행자가 언급한 ‘디자인 프로세스의 과학화’를 지원하는 것이기도 하다. 찰스 오웬(Charles Owen) 교수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 학과의 교육과정이 디자인의 기능주의적 접근을 추구하면서 다음과 같은 학생 역량의 강화를 중요시한다고 밝힌다. ①개념을 시각화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 ②디자인이 여러 유형의 정보처리에 근거를 둔 합리적인 문제해결 프로세스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 ③디자이너뿐만 아니라 엔지니어, 심리학자, 마케팅 전문가 등과 함께 일할 줄 아는 팀 중심의 협업 능력이 바로 그것이다.

취재진은 미국 대학 탐방을 마친 후, 대서양 건너 유럽의 디자인 전문학교, 프랑스의 국립조형생활미술학교와 이탈리아의 마랑고니 디자인학교를 찾아간다. 두 학교는 산업디자인과는 거리가 있는 직물 디자인과 패션디자인의 전문 교육기관으로, 실무 위주의 교육과정을 운영하면서 유능한 직물디자이너와 패션디자이너를 배출하고 있다. 이 두 학교는 그 특성에 맞게 세계적인 하이패션, 최고 수준의 유행을 선도할 수 있는 창조적인 예술 감각과 개성을 강조한다. 앞서 미국에서 살펴본 FIT의 패션디자인 교육, 두 대학의 산업디자인학과와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교육 방향이다. 마랑고니 디자인학교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두 학교의 교육 목표는 “기능적인 디자이너”가 아니라 “의상의 예술인”을 양성하는 것이다. 이 두 유럽 교육기관에 대한 소개는 직물·패션 디자인 교육에 대한 것이라서 제3부의 구성상 약간 이질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산업디자인을 포함한 디자인 교육의 다양한 면모를 좀 더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측면이 있다.

2. 4. 스포츠 산업과 쇼핑 문화 : 4부 <스포츠 산업-또 하나의 올림픽>과 5부 <전시와 상술-진열장 속의 전쟁>

1~3부의 내용이 제작 의도에 초점을 맞춘 프로그램의 본론에 해당한다면, 4부와 5부는 본론의 내용을 바탕으로 특정 분야의 디자인 현황을 조명하는 각론의 성격이 강하다. 실제로 4부는 <스포츠 산업-또 하나의 올림픽>이라는 제목으로 88서울올림픽을 준비하는 입장에서 선진국 스포츠 산업의 현황을 살펴보고, 5부는 <전시와 상술-진열장 속의 전쟁>이라는 제목으로 당시 본격 소비사회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구미와 일본의 쇼핑 공간, 즉 백화점, 쇼핑몰, 대형할인매장을 분석한다.


Figure 4 Scenes from Part 4 and Part 5

먼저 4부를 살펴보자. 서두에 진행자는 운동선수의 기록 향상을 돕기 위해 기술혁신을 거듭하고 있는 스포츠 산업이야말로 장외의 올림픽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이라고 지적하면서, 일본의 스포츠업체, 미즈노(Mizuno)를 방문한다. 진행자에 따르면, 일본은 “1964년 도쿄 올림픽을 계기로 세계무대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고 그 여세를 몰아 세계 스포츠 산업을 주도하고 있”으며, 미즈노는 “기업의 역사가 곧 일본 스포츠의 역사”라고 할 만큼 일본의 대표적인 스포츠업체이다. 1906년에 창립한 이 업체는 “과학적인 연구, 우수한 디자인, 적극적인 마케팅”으로 일본 스포츠 산업을 선도하고 있는데, 취재진이 여기에서 주목하는 것은 위 요인 중 “과학적 연구”가 어떻게 고도의 기능을 갖춘 뛰어난 품질의 제품 디자인으로 연결되느냐는 점이다. 그 대표 사례로 드는 것은 야구화다. 카메라는 투명 발판 위에서 야구 유니폼을 착용한 채 반복적으로 배트를 휘두르는 피실험자를 보여준다. 진행자는 야구화의 디자인이 타자의 하체 중심 이동에 대한 인간공학적 분석 결과에 바탕을 두고 진행된다는 점에 놀라움을 표한다. 이외에도 로봇이나 기계 장치를 활용해 다양한 스포츠용품에 대한 테스트를 진행하는 모습을 살펴본다.

취재진은 미즈노 탐방 후 서독 바이에른주의 아디다스(Adidas) 본사로 찾아간다. 먼저 아디다스 사내의 박물관에서 1920년대 이후 이 업체가 생산한 운동화의 역사를 살펴본 뒤, 샤인펠드의 공장에 방문해 자동화된 생산 설비를 통해 운동화가 대량 생산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물론 아디다스의 노력은 그저 자동화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취재진은 아디다스가 뛰어난 품질의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기술연구소에서 스포츠화의 내구성·유연성 실험부터 스포츠웨어의 섬유 흡습성 실험까지 다양한 형태의 테스트를 진행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진행자는 이 일련의 과정을 살펴본 뒤, 아디다스의 제품개발을 마무리 짓는 것이 바로 “간결하면서도 품위 있는 디자인”이라고 지적한다.

미즈노와 아디다스 다음은 “고급 스포츠웨어로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이탈리아의 휠라(FILA)다. 테니스, 스키, 골프, 요트, 수영, 등산복 등 총 6종의 스포츠웨어만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이 업체는 신제품 개발실에 60여 명의 디자이너를 두고 새로운 디자인을 끊임없이 개발하고 있는데, 취재진은 이 업체의 철저한 직물 관리 시스템을 주요하게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취재진은 스위스의 중소 스포츠용품업체 프로그래스(Progress)로 향한다. 그곳에서 이탈리아 출신의 전속 디자이너가 세계 최고가의 스포츠 가방을 디자인하고 여성 노동자들이 숙련된 솜씨로 제작하는 일련의 과정을 보여준다.

한편, 5부에서 취재진은 구미와 일본의 쇼핑 공간으로 시선을 돌려 먼저 동양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일본 라라포트(LaLaport) 쇼핑몰을 찾는다. 1981년, 부동산개발업체의 주도로 도쿄에서 1시간 거리인 후나바시(船橋)에 완공된 이 공간은 백화점과 슈퍼마켓, 220개의 전문매장으로 이뤄진 대규모 교외 쇼핑몰이다. 당시 쇼핑몰은 국내에 아직 도입되지 않았던 유형의 쇼핑 공간인 탓에 취재진은 넓은 대지 위에 펼쳐진 이 쇼핑 공간을 신기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여기에서 취재진이 주목하는 것은 동선에 따른 공간 환경의 자연스러운 구성, 상품을 매력적으로 돋보이도록 진열하는 디스플레이 디자인, 복잡한 내부 공간을 손쉽게 이동할 수 있는 안내 시스템, “마이카 시대”를 반영한 건물 면적의 5배에 달하는 주차장 등이다. 취재진에게 이 쇼핑몰은 쇼핑 공간이 상품 판매 공간에서 여가를 위한 위락 시설로 변화한 본격 소비문화의 면모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이면서, 동시에 이후 세계 곳곳의 쇼핑 공간을 탐방하는 데 출발점 구실을 한다.

이후 취재진은 도쿄 도심으로 향해 마츠야(Matsuya) 백화점을 탐방하고 이후에는 프랑스 파리로 이동한다. 그곳에서 화려한 “상품의 궁전”을 연상케 하는 라파예트(Lafayette) 백화점, 자사의 가방만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루이비통(Louis Vuitton) 본점 매장, 외국인 관광객 대상의 벤룩스(Benlux) 면세점, 우리나라의 “남대문 시장”과 유사한 대중적인 의류매장 등을 차례대로 탐방한다. 그다음에는 스위스 취리히와 영국 런던, 그리고 홍콩의 백화점들, 그리고 미국 뉴저지의 시어스(Sears) 대형할인매장을 방문한다. 취재진은 이 탐방의 여정에서 매장 특성에 따른 채광과 조명 연출, 소비자의 시선 이동을 고려한 통로 배치, 매장 내 디스플레이와 쇼윈도의 개성 있는 연출 방식, 공간 연출을 전담하는 디자인 관련 부서의 역할 등을 주의 깊게 살핀다.

4부 결말부에서 진행자는 국내 스포츠 산업이 2억 달러 규모의 수출을 기록하고 있음에도, 기술 및 연구설비 부족, 디자인 개발 낙후, 내수 시장 취약 등으로 저발전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지적하면서, 올림픽이 스포츠 산업의 각축장인 만큼 88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서는 국내 스포츠 산업의 발전이 필수적이라고 역설한다. 한편, 5부 결말부에서는 이제 쇼윈도는 한 나라의 상품 문화를 반영하는 거울이자 디자인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라고 지적하면서, 우리의 쇼핑 공간도 선진화된 모습으로 변모할 때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2. 5. 국내 디자인계의 현황 : 6부 <디자인 점검-아름다움에의 도전>

6부는 기업 디자인과 디자인 교육을 중심으로 국내 산업디자인의 현황을 점검한다. 여기에서 디자인 전문회사는 제외되었는데, 1982년 시점에 실내 디자인과 그래픽 디자인 분야의 국내 디자인 전문회사는 증가 추세였지만, 산업디자인에 특화된 업체는 사실상 전무한 실정이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8) 취재진이 기업 디자인의 실태를 살피기 위해 먼저 탐방한 곳은 의류업체, 장난감업체, 유아용품업체, 스포츠용품업체 등 주로 수출품을 생산하는 국내 중견 기업들이다. 이 업체들 상당수가 공통으로 직면한 문제는 독자적인 디자인 개발 없이 해외 바이어의 요구에 따라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디자인 개발에 소극적일 뿐 아니라 개발에 임해도 투자 규모가 그리 크지 않다. 실제로 디자인실을 운영하는 업체라도 산업디자이너의 역할에 대한 이해가 명확하지 않아서 기사들이 제품 외형을 디자인하거나 외국 제품을 모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진행자는 1960년대 후반 본격적인 산업화 정책 시행 이후 15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터라 국내 중견 기업 상당수가 디자인을 수입하거나 모방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진단한다.

한편 수출 대기업은 중견 기업과는 상황이 달랐다. 취재진은 현대자동차, 삼성전자, 금성사를 탐방하면서, 이 기업들이 일정 규모 이상의 디자인실을 운영하며 상품기획을 통해 독자적인 디자인 개발에 나선 현장을 보여준다. 비록 작업 환경은 선진국에 미치지 못하지만, 디자이너들이 제도판 앞이나 모델 제작실에서 디자인을 진행하고 있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이들이 참여한 신제품 개발 사례들을 소개한다. 유럽 스타일의 유선형으로 디자인한 소형 승용차 목업, 젊은 소비자의 선호 색상을 반영한 카세트 라디오, 인테리어와 조화를 고려한 텔레비전 수상기 등이 그것이다. 한편, 이 기업들은 조직 차원에서도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현대자동차는 독자 모델 개발을 목표로 개발실과 디자인실을 통합해 기술센터를 설립하고 42명 디자이너 규모의 디자인실을 갖추고 있다. 한편 금성사는 30여 명의 디자이너로 상품기획본부 산하의 디자인실을 운영하면서, 마케팅 담당 부사장에게 이 부서 운영의 책임을 맡겼다. 양사 모두 경영진이 디자인의 필요성을 인식한 결과로 디자인실이 점차 체계적인 모습을 갖춰가는 상황이었다.

취재진은 중견 기업과 대기업을 두 축으로 삼아 기업 디자인의 현황을 살펴본 다음, 디자인 교육기관으로 향한다. 기업의 디자인 역량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산업디자인 교육의 수준을 가늠해보기 위해서다. 당시 산업디자인학과를 개설한 전문대가 9곳이었고, 국민대가 1982년 당시 4년제 대학으로는 최초로 산업디자인학과를 신설한 상황, 그러니까 산업디자인 교육이 4년제 대학보다 전문대에서 더 활발하게 이뤄지는 상황이었다. 진행자는 전문대의 2년제 교육과정만으로는 산업디자인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기 어렵다고 아쉬움을 표한다. 한편 4년제 대학 대부분에서는 산업디자인 교육이 독립된 학과가 아니라 응용미술학과나 산업미술학과의 하위 전공으로 이뤄지고 있으며 그조차도 미술대학에 소속된 처지라서 전통적인 미술 교육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진행자는 이런 상황이 디자인이 그저 제품의 겉모양만을 다루는 것이라는 사회적 통념을 더욱 부추길 뿐만 아니라, 시대 변화에 발맞춰 디자인 교육의 새로운 방향성을 모색하는 데에도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는 산업 현장과 밀착된 교육 환경에서 전문 디자이너 출신 교수가 주도하는 산업디자인 교육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기업 디자인과 디자인 교육, 양 부문에서 아직 본격적인 변화의 이행기, 앞서 1부의 표현을 빌려 달리 표현하자면, “발전의 본 궤도”에 진입하지 못한 국내 상황은 해외 관계자들의 인식에도 고스란히 투영된다. 당시 해외 바이어를 대상으로 진행된 무역협회의 조사에 따르면, 국내 업체의 디자인이 해외 경쟁업체에 비해 우수하다고 평가하는 경우는 전체 8퍼센트에 불과했고, 해외에서 개발한 디자인이나 바이어가 요구하는 디자인을 그대로 쓰는 경우가 72퍼센트에 달했다. 무역협회의 한 간부는 이러한 통계 수치가 국내 수출업계가 당면한 현실을 가리킨다고 지적하면서, 독자적인 디자인 개발을 통한 경쟁력 강화가 수출 여건을 개선하는 데 상당히 중요한 과제로 대두될 것으로 전망한다. 그는 해외 소비자가 만족하는 제품의 개발에 있어서 무엇보다 디자인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Figure 5 Scenes from Part 6

6부는 결론부에 이르러 프로그램 방영 전후, 그러니까 1983년 초반에 진행된 국내 산업디자인계의 변화를 간단히 소개하며 마무리한다. 먼저 정부는 상공부를 중심으로 한국디자인포장센터의 활성화 방안을 논의하고 있으며 국내 기업들 일부는 디자인실의 역량 강화를 위해 조직을 통합하거나 인원을 늘리고 있다고 언급한다. 서울대를 비롯해 주요 대학들이 컴퓨터 시스템의 도입을 서두르기 시작한 것 역시 변화의 흐름 중 하나였다. 진행자는 이러한 변화가 바로 “국내에서도 디자인에 관한 관심이 서서히 높아”지고 있는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이러한 관심이 실질적인 성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①디자인 교육의 현대화를 통한 유능한 전문 인력 양성, ②기업의 과감한 디자인 투자와 기성 디자이너의 재교육 강화, ③한국디자인포장센터의 활성화 등과 같은 구체적인 방안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3. <세계는 디자인혁명 시대>의 맥락 재구성: 1980년대 초중반 산업디자인계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3. 1. 산업디자인의 개념 확장과 디자인 교육의 현대화

<세계는 디자인혁명 시대>에서 산업디자인은 “제품 겉모양”의 조형미를 추구하는 미적 실천, 즉 ‘스타일링’으로 한정되지 않았다. 여기에서 산업디자인은 오히려 합리적 접근법에 의지해 대량생산 체제의 제품개발 프로세스 전체를 관통하는 수행적인 활동으로 의미화되었다. 물론 조형미의 추구는 산업디자인의 핵심적 속성이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1980년대 초반 세계 시장을 무대로 펼쳐진 산업디자인의 변화상을 온전하게 설명해낼 수 없었다. 당시 산업디자인은 예술, 기술, 산업을 각각 삼각형의 꼭지점으로 삼아 개념 확장을 시도하면서 그 내부에서 다채로운 통합의 결과물을 산출해내고 있었다. 1부에 등장하는 피에르 가르뎅처럼 ‘디자이너 개인의 창조성’을 강조하는 방식은 전체 사례 중에서 예술에 치우친 예외적인 경우에 속했다. 실제로 이 프로그램이 다룬 해외 디자인 사례들은 디자이너의 직관적 감각이나 개성적 표현에 의지하는 경우가 드물었고, 대다수는 기술과 산업에 근간을 둔 합리적 접근법을 거쳐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인간공학과 마케팅 리서치, 그리고 컴퓨터를 활용한 디자인은 산업디자인의 개념 확장을 돕는 합리적 접근법으로 간주되었다.

주목해야 할 대목은 <세계는 디자인혁명 시대> 방영 이전, 1980년대 초반에 국내 디자인 교육계에서도 이러한 변화에 합류하기 위한 모색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1982년, 『월간 디자인』이 주최한 한 좌담에서 명지실업전문대 교수였던 민경우는 당시의 국내 산업디자인 교육이 사실상 ‘응용미술’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서 “감성적이고 주관적인 교육, 즉 조형적인 교육에만 치우쳐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과학적이고 논리적이며 객관적인 리서치”에 근거한 디자인 프로세스 중심의 교육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당시 한국디자인포장센터에서 주임연구원으로 근무하던 정경원은 이에 호응하며 미국의 산업디자인 교육이 “보통 리서치하는 데만 70% 이상의 시간을 할애하는 데 비해 실제 아이디어 스케치나 렌더링, 모델링 하는 데에는 불과 30%의 시간밖에 할애를 안 하고 있”다면서, 민경우가 지적한 바와 같이 “조형 중심”의 국내 교육 방식과 무척 대비된다고 말한다(『월간 디자인』, 1982년 8월호).

여기에서 인간공학과 마케팅 리서치는 민경우가 지적한 “과학적이고 논리적이며 객관적인 리서치”의 대표격으로, 산업디자인을 현대적인 전문분야의 활동으로 갱신하는 데 있어 중요한 방법론적 지식으로 인식되었다. 이를테면, 1982년, 『월간 디자인』은 “디자인과 인간공학”이라는 제목의 특집기획을 게재하면서, 인간공학을 “여러 과학을 통합하여 인간-기계-환경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연구하고 인간의 편리함을 우선을 두면서 기계를 설계하고 환경을 창조해 나가는 학문”이라고 정의한 바 있었다. 편집자는 “우리가 외형적인 모양에만 치중하며 인간의 실제 생활에 도움을 주려고 만든 제품이 오히려 인간에게 불편함을 주는 일이 없”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사고에 기초해 인간공학의 성과를 디자인에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월간 디자인』, 1982년 4월호).

한편 같은 해, 국민대 교수 김철수 역시 『월간 디자인』의 좌담에서 디자이너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위해서는 그들이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객관적인 분석을 토대로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는 이론적 기반”이 필요하다며 그 기반 중 하나로 마케팅 리서치를 언급한다. 그는 마케팅 리서치에서 출발한 디자인 개발이 최종적으로는 라이프스타일 제안으로 이어져야 한다면서, 1950·60년대 일본 가전업체의 전기밥솥 개발을 사례로 지목한다. 그에 따르면, 전기밥솥은 신제품 개발이 새로운 라이프스타일 제안으로 연결된 대표적인 사례였다. 전기밥솥 개발은 입식 주방의 등장으로 인한 음식 조리 방식과 열원의 변화를 세심하게 포착한 결과인데, 이것이 다시 주방 공간을 무대로 주부 라이프스타일의 현대화를 유도해냈다는 것이다.9) 김철수가 보기에 이 일련의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사회문화적 현상을 새롭게 해석할 줄 아는 디자이너의 마케팅적 안목이었다(『월간 디자인』, 1982년 11월호).10)

흥미롭게도 이 시기에 이러한 주장을 펼친 이들 상당수는 당시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40년대 후반·50년대 초반생의 젊은 세대의 디자인 교육자들이었다. 이들은 산업디자인 개념을 ‘응용미술’이나 ‘산업미술’ 등 미술의 하위 범주로 접근하려는 기성의 방식에서 탈피하기 위해 인간공학과 마케팅 리서치 등 합리적 접근법을 교육과 실무에 적극적으로 접목하려고 시도했다. 민경우는 1989년 『월간 디자인』과의 인터뷰에서 선배 세대를 “응용미술 세대”로, 자신과 동료들을 “디자인 세대”로 구분한 바 있는데,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젊은 세대의 교육자들이란 바로 “디자인 세대”에 속하는 이들이었다(Kim, 1989). 실제로 위에서 언급한 김철수와 민경우는 둘 다 1947년생 서울 출생, 정경원은 1950년 서울 출생이었고, 세 명 모두 서울대학교 응용미술과 출신으로 1970년에 민철홍 교수의 주도로 서울대 응용미술과 대학원에 새로 개설된 공업디자인 전공 과정을 거친 이들이었다.11) “디자인 세대”론을 제기한 민경우는 이 대학원 전공 과정의 첫 입학생이기도 했다. 특히 민경우와 정경원은 각각 1970년대 후반 이탈리아의 에우로페어 디자인 인스티튜트(Istituto Europeo di Design)와 미국의 시라큐스 대학으로 유학을 다녀온 터였다. 이 “디자인 세대”의 젊은 교육자들에게는 <세계는 디자인혁명 시대>가 많은 분량을 할애해서 소개한 미국 디자인 교육기관의 사례, 즉 시라큐스 대학과 일리노이 공대의 산업디자인 교육과정은 확실히 국내 디자인 교육이 당면한 문제에 대한 해법 중 하나로 간주될 만한 것이었다. 실제로 시라큐스 대학의 산업디자인학과는 1970년대 후반 한국디자인포장센터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교육기관이기도 했다. 한국디자인포장센터는 디자인 인재 양성을 목표로 1978년부터 1981년까지 매년 1~2명의 디자인 전공자를 선발해 이 학과의 석사 과정에서 유학을 보낸 바 있었다(Oh et al., 2020).12)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이 두 미국 대학의 교육과정이 당시 1970년대 두 차례 석유파동 이후 급변하고 있던 미국의 경제 상황을 반영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세계는 디자인혁명 시대>에 ICSID 전 회장이자 풀로스 디자인연구소의 대표, 그리고 시라큐스 대학 교수로 모습을 보인 바 있는 아서 풀로스는 1980년대 초반 미국 경제 상황의 급변으로 인해 미국 디자인 교육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이전까지 산업디자이너 업무 상당 부분은 전자·가전제품을 포함한 내구 소비재와 관련되었다. 하지만, 1970년대를 거치면서 세계 경제 차원의 분업화에 따라 해당 제품의 생산이 해외로 이전되고 일본 기업이 공세적인 신제품 개발로 전자·가전제품 시장을 주도하는 과정에서, 미국 산업디자인 대학의 교육과정 역시 이전과는 다르게 변모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중심에는 정보처리 체계, 통신 네트워크, 의료기기 및 제품 기획, 운영 서비스 등의 디자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풀로스에 따르면, 이런 변화는 미국의 디자인 교육이 세 차례에 걸쳐 역사적 전환을 거듭한 결과이기도 했다. 첫 번째 전환은 1930년대 이후 사회 전반의 물질적 풍요에 기반한 스타일링 중심 디자인 교육의 도입, 두 번째 전환은 1957년 소련의 세계 최초 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 발사 성공 이후 소외 계층, 노년층, 장애인 등을 위한 성찰적인 교육 프로그램의 제안, 그리고 세 번째 전환이 바로 제품 차원에서 서비스 및 시스템 차원으로의 디자인 접근법의 재편이었다(Pulos, 1983). 시라큐스 대학과 일리노이 공대의 산업디자인학과는 바로 이 세 번째 전환의 흐름을 주도하는 교육기관이었다.

따라서 이제 막 응용미술의 틀에서 벗어나 산업디자인의 개념 확장을 시도하던 1980년대 초중반 국내 상황에 비춰보면, 이 두 대학의 교육과정은 사실 먼 미래의 이야기에 가까운 것이었다. 당시 한국의 현실은 아직 본격 소비사회가 도래하지 않은 산업화사회였던 반면, 미국의 현재는 소비사회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포스트 산업사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초중반 이후 대학 차원의 교육과정 개편 혹은 교수 개인 차원의 교과목 신설이나 산학협력을 통해 시간 격차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이 거듭되었다(Lee, 1985).13)

그런 시도 중 이후 가장 광범위한 영향력을 미친 것은 1986년에 개교한 한국과학기술대학(Korea Institute of Technology)의 산업디자인학과 개설이었다. 이 대학은 교육부가 아닌 과학기술처 산하의 교육기관으로, “고급 과학기술 인재 양성”을 목표로 자연과학부, 전자전산학부, 기계재료공학부, 기술공학부 등 총 4개 학부 18개 학과로 구성된 공과 대학이었다. 주목할 대목은 이 대학의 기술공학부에 1950년 전후 태생의 젊은 유학파 출신으로 교수진을 구성한 30명 정원의 산업디자인학과가 개설되었다는 점이다. 국내 최초로 공과 대학에 속한 산업디자인학과였다. 이 학과에 따르면, 현대적 의미의 산업디자인은 실무의 차원에서는 “제품의 다양한 가치 창출을 위한 일련의 창조적인 활동을 통합 조정하는 소프트 테크놀로지”로, 그리고 학문의 차원에서는 “조형예술, 과학기술, 인문학”의 “유기적인 연계를 통해서 제품개발을 주도하는 데 관련되는 지식과 방법으로 학제적으로 연구하는 분야”로 정의되었다. 이에 따라 교육과정은 학생들이 “공학적인 기초 위에 과학적인 사고와 미적인 감각을 균형 있게 습득”하도록 편성되었다. 특히 교육과정에 컴퓨터를 전면적으로 도입해 학생들이 캐드(CAD) 프로그램과 정보 분석 수단으로 활용하도록 돕고 있었다(Choi, 1990). 3년 전, <세계는 디자인혁명 시대>는 3부에서 미국의 공대 지향적 산업디자인 교육 사례를 소개하고, 6부에서는 미술대학이 아닌 공과 대학 내 단과대로서 산업디자인학과 개설의 필요성을 제기한 바 있었는데, 이 학과는 마치 그에 대한 화답처럼 보이기도 했다. 실제로 이 학과의 신설을 주도한 이는 <세계는 디자인혁명 시대>의 자문을 담당한 정경원 교수였으며, 이 대학이 본격적으로 개교 준비에 나섰던 것은 프로그램 방영 1년 후인 1984년이었다. 또한 시라큐스 대학과 일리노이 공대에 유학을 다녀온 교수가 개교 당시의 교수진 5명 중 각각 2명과 1명이었다.14) 확실히 이 학과는 예술보다는 기술에 주안점을 둠으로써 기존의 미술대학 내 학과들과 대비를 이뤘는데, 바로 그러한 대비를 통해 국내 산업디자인 교육이 산업을 기반으로 예술과 기술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아가는 데 중요한 지표 역할을 했다.

디자인 교육을 다룬 <세계는 디자인혁명 시대> 3부 결말부에서 진행자는 선진국 디자인 교육기관의 특징을 정리하고 국내 산업디자인 교육에 대한 진단으로 마무리했다. 그에 따르면 이 교육기관들은 교육 목표, 교육과정, 교육 환경 면에서 유능한 산업디자이너를 배출할 수 있는 그 나름의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각 교육기관 별로 “어떤 디자이너를 양성할 것인가”에 대한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그에 맞춰 특성화된 실무 중심의 교육과정을 시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각 교육기관이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교수”, “컴퓨터를 비롯한 충분한 교육 시설”, “실무 중심의 적극적인 산학 협동” 등의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다고 강조했다. 1980년대 초중반 국내 디자인 교육의 변화가 위의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킬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젊은 세대의 디자인 교육자들을 중심으로 시대 변화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전환을 시도했던 것만큼은 분명했다. 앞서 살펴본 <세계는 디자인혁명 시대> 6부의 표현을 빌리자면, “디자인 교육의 현대화”가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기 시작한 것이었다.

3. 2. 기업 디자인 발전의 토대 마련

1980년대 초반, 기업 디자인의 변화를 주도한 것은 수출 대기업, 특히 <세계는 디자인혁명 시대> 6부에서 주요하게 다룬 현대자동차와 금성사였다. 먼저 테이프를 끊은 것은 1982년 3월, 현대자동차의 두 번째 독자 모델, 포니Ⅱ의 출시였다. 1976년 최초의 독자 모델인 포니 출시 이후 6년 만이었다. 현대자동차는 “1979년 이후 계속된 자동차 시장의 불황을 타개하고 구모델인 포니에 식상한 소비자들의 심리를 자극”하기 위해 신모델을 개발했다고 밝혔다. 국내 업체가 주도한 승용차 개발이었지만, 실제 자체 디자인을 담당한 것은 포니와 마찬가지로 세계적인 자동차 디자이너 조르제토 주지아로(Giorgetto Giugiaro)가 이끄는 디자인 전문회사, ‘이탈디자인(Italdesign)’이었다. 당시 현대자동차 디자인실 차장이던 박종서는 <세계는 디자인혁명 시대> 6부에 등장해 이런 상황을 의식한 듯, “외국에서 디자인된 모델들이” 사내 디자인실에 의해 “다시 세련되어지고 다시 다듬어져야지만 생산과 이어지고 기능을 만족시켜줄 수 있는 훌륭한 차가 될 수 있다”고 말하며 국내 디자이너의 역할을 강조한 바 있다. 하지만 국내 자동차업체 디자인 조직의 역량이 독립적으로 고유 모델을 개발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것만큼은 분명했다. 이런 이유로 『월간 디자인』은 포니Ⅱ의 출시를 소개하는 기사에서 “자재의 국산화, 생산체계의 국산화”만큼이나 “디자인의 국산화라는 문제가 기업과 디자이너들이 함께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라고 지적하기도 했다(『월간 디자인』, 1982년 3월호). 실제로 현대자동차는 당시 이러한 문제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사내 디자이너의 영국 디자인학교 유학을 지원하고 있었다.15)


Figure 6 Newspaper advertisement for Hyundai PonyⅡ(1982)

한편, <세계는 디자인혁명 시대> 방영 직후인 1983년 3월, 금성사는 창립 25주년을 맞아서 사내 디자인 조직의 개편 작업에 나섰다. 기존의 ‘디자인실’을 ‘디자인종합연구소’로 승격해 확대 개편한 것이었는데, 이 조직은 산업디자인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민간 기업 최초의 중앙연구소”였다(Oh et al., 2020). 본래 디자인실은 1974년 10월에 신설된 이후 부 단위의 조직으로 운영되었다. 반면 디자인종합연구소는 “디자인 연구의 산실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총 4개의 실로 구성되었는데, 1실과 2실은 제품 디자인을 중점적으로 다루었고 3실은 디스플레이, 그래픽, 광고와 관련된 업무를 맡았으며, 종합관리실은 연구소 전체를 총괄하는 관리 업무를 담당했다. 이 시기 연구소의 디자이너는 대략 40명 규모로, 1년 전 <세계는 디자인혁명 시대>의 촬영 당시보다 10여 명이 증가한 것이었다(『월간 디자인』, 1983년 12월호).16) 이러한 조직 개편은 경쟁업체에도 영향을 미쳐, 삼성전자와 대우전자 역시 같은 해에 각각 디자인연구소와 디자인실을 신설했다(Kim, 2020).17)

한편 금성사는 국내 최초로 기업 주도의 산업디자인 공모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월간 디자인』의 기자가 “1983년을 대표할 만한 큰 행사”였다고 평가한 이 공모전은 다분히 일본 소니와 독일 브라운의 공모전을 염두에 둔 것으로, ①국내 산업디자인의 중흥과 육성, ②기업과 학교 간의 산학협동체제 확립, ③창의성 있는 산업디자이너의 아이디어 발굴, ④국제 경쟁력 우위의 산업디자인 개발, ⑤소비자 요구에 부응한 제품 디자인 개발을 목표로 내세우고, 컴퓨터 및 사무기기, 비디오, 오디오, 주 생활기기, 주방기기, 총 5개 부문으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제1회 공모전에는 총 90개의 작품이 응모했다.18) 1회 공모전에서는 서울대학교 팀(유인철, 박장준, 한경하, 채민규)이 “홈 비디오 컴퓨터 시스템”으로, 2회 공모전에서는 명지실업전문대 팀(홍재언, 이인욱, 지연규, 김영선)이 “아동용 컴퓨터 시스템”으로 대상을 수상했다(Cho, 1983; Park, 1984).19) 삼성전자 역시 같은 해에 삼성 굿 디자인전을 개최했다. 금성사의 공모전과 유사한 목적을 지니고 있었으나, 운영방식은 상이했다. 삼성 굿 디자인전은 삼성이 선정한 대학생 참가팀에게 프로젝트를 의뢰하고 자사의 디자이너들이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는 형식이었다. 일체의 경비는 회사 측에서 지원했다. 물론 이전에도 산업디자인을 전문으로 다루는 국내 공모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한국산업디자이너협회가 1978년부터 주최하던 “한국공업디자인상 공모전”이 있긴 했지만, 국내 대기업의 공모전은 이전의 공모전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특히 산학 협력과 취업 특전 등의 혜택을 제공하면서 젊은 예비 디자이너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다.


Figure 7 Grand Prize Winner of the 1st Goldstar Industrial Design Competition(1983)

Figure 8 Grand Prize Winner of the 2nd Goldstar Industrial Design Competition(1984)

Figure 9 Honorable Mention of the 5th Goldstar International Industrial Design Competition(1989)20)

한편, 기업 디자인의 진흥을 위한 새로운 제도들도 한국디자인포장센터의 주도로 도입되기 시작했다. 1984년에 실시한 디자이너의 체계적 관리를 위한 디자이너 등록제가 그 시작이었다. “일정 수준 이상의 경력과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디자이너에 대해 전문 디자이너로 인정하고 이를 사회적으로 널리 공지함으로써 디자인의 전문성을 강화하고 이들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여 우수한 디자인 개발을 적극적으로 유도”하는 것이 그 취지였다. 첫해에는 12인으로 구성된 디자이너 등록 심의위원회가 구성되었고, 558명의 디자이너가 등록했다(Kim, 2020). 1년 뒤인 1985년에는 우수디자인 선정 제도가 도입되었다. 디자인이 우수한 대량생산 제품에 부여된 ‘GD’ 마크는 한편으로는 국내 기업들이 해외 제품의 모방에서 벗어나 고유 디자인 개발에 나서는 것을 독려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반 대중에게 디자인에 대한 인식을 제고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Oh et at., 2020). 일본의 굿 디자인 선정 제도 도입이 1957년이었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양국 간 발전의 격차를 고려하더라도 뒤늦은 감이 없지 않았지만, 이 시기에 디자인 진흥을 위한 제도적 여건이 새롭게 조성되기 시작한 것만큼은 분명했다.

이처럼 주요 가전업체의 디자인 조직 개편과 공모전 신설, 한국디자인포장센터의 진흥 제도 도입 등 새로운 조직적·제도적 변화가 모색되는 가운데, 기업의 젊은 산업디자이너들도 이와 보조를 맞추며 국제 교류나 연구 조사를 통해 인식의 전환을 꾀하는 모습을 보였다. 1984년, 대우자동차 기술연구소의 디자이너였던 최수신21)은 닛산(Nissan)과 마쓰다(Mazda) 등 일본 자동차업체의 생산 현장을 시찰하고 그곳 디자이너들과 대담을 나눈 경험을 정리한 글에서 “일본의 자동차 스타일이 십여 년 전에는 형태 면에서 보잘것없이 덕지덕지한 제품에서 출발하여 수년간 미국과 유럽의 스타일을 모방하는 과정을 거친 후, 이제는 일본 특유의 스타일을 창조해내고 있다는 것”에 주목한다. 그리고 일본 디자인이 경험한 발전의 역사적 과정, 즉 “피상적인 모방에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디자인"으로의 전환을 디자이너의 노력 여하에 따라 국내에서도 재연할 수 있으리라 기대를 건다(Choi, 1984).

또한 금성사 디자인종합연구소 실장 유석순22)은 1985년 『월간 디자인』에 3회에 걸쳐 연재한 “소니의 디자인 철학”이라는 글에서 최수신과 유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소니의 기업사, 사내 디자인연구소인 PP센터의 운영 체계, 산업디자이너의 역할, 히트 상품의 디자인 사례 등을 살펴본다. 여기에서 그가 주목하는 것은 소니의 산업디자이너가 스타일링이나 인간공학 이외에도 마케팅 전문가로서의 감각을 가지고 일상 문화의 차원에서 “상품의 매력”을 연구하며 신제품을 기획하는 역할을 부여받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에 따르면, 일본 전자산업이 기술 주도의 제품 생산에서 마케팅 주도의 제품개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소니의 산업디자이너는 “사업부의 하청기관 같았던 의장부 시절의 역할”에서 벗어나,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시각적인 형태로 제시할 줄 아는 ‘시장 창조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유석순은 이러한 역할 변화에서 마케팅 리서치가 디자이너의 역량으로 상당히 중요시된다는 점을 강조한다(Ru, 1985).

최수신과 유석순 같은 사례는, 당시 상당수의 젊은 디자이너들이 실무 차원의 “디자인 세대”로서 일본 디자인을 표피적인 모방의 대상이 아니라, 독창적인 디자인 개발을 위한 역할 모델로, 달리 말하자면 디자인 조직·전략·방법론의 측면에서 추격을 위한 학습의 대상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세계는 디자인혁명 시대>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은 “물건과 인간의 관계를 연구하고 그것을 제품에 구현하는 상품 문화의 관리자”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 준비에 나서고 있었던 것이다.

4. 결론

1983년에 방영된 KBS 집중기획 <세계는 디자인혁명 시대> 6부작은 1부부터 5부까지는 선진국의 산업디자인계를 탐방 대상으로 삼아 기업 디자인, 디자인 전문회사, 디자인 교육기관, 스포츠 산업, 쇼핑 공간 등의 최신 동향을, 그리고 6부에서는 국내 산업디자인계의 현황을 살펴보았다. 당시 일반 대중에게 생소한 주제를 다룬 이 프로그램은 산업디자인에 대한 사회 전반의 인식 변화를 추동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고 평가받아왔다. 실제로 정경원은 방영 10여 년이 지난 시점에 이 프로그램이 방영 이후 “국내 디자인계에는 기업 부설 디자인종합연구소가 생기고 한국과학기술원23)에 산업디자인학과가 개설되는 등, 디자인 발전에 원동력이 되었다”고 평가한 바 있다(Wang, 1994). 그런데 <세계는 디자인혁명 시대> 방영과 그 이후 사건 간의 인과 관계를 명확히 규명하기란 쉽지 않다.

앞서 살펴봤듯이 이 프로그램이 강조한 산업디자인의 개념과 산업디자이너의 역할, 그리고 새로운 디자인 교육의 필요성 등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기보다는, 1980년대 초반 “디자인 세대”로 불릴만한 산업디자인계의 젊은 교육자들이 디자인 매체를 통해 표명한 관점과 입장과 상당 부분 겹치는 것이었다. 이들은 <세계는 디자인혁명 시대> 방영 전후의 시기에 그 나름의 인적·담론적 네트워크를 구성하면서 교육의 차원에서는 미국 디자인 대학의 교육 프로그램을, 실무의 차원에서는 일본 기업 디자인연구소의 조직·전략·방법론을 “발전의 본 궤도”로 진입하기 위한 핵심 참고항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이 프로그램은 뉴욕, 런던, 파리, 도쿄, 홍콩 등을 물리적으로 횡단하면서 동시대 세계 디자인의 좌표계 위에 변화의 흐름들을 그려냈고, “디자인 세대”의 교육자와 디자이너들은 바로 그 좌표계 위에서 자신의 관점과 입장을 재배치하면서 그것을 좀 더 설득력 있게 외부로 확산시킬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그 결과, 이 프로그램은 내부적으로는 디자인에 대한 ‘응용미술적’ 관점의 지배력을 약화시키고 산업디자인의 담론 지형을 세대 전환의 형태로 재편하는 데, 그리고 정부와 기업의 주요 의사결정권자에게 산업화의 다음 단계로의 이행을 위한 하나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데 중요한 매개항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산업디자인계 내외부의 새로운 흐름들과 상호구성적인 관계를 맺으며 거기에 역동성을 불어넣는 국면 전환의 계기로 작용했던 것이다. 물론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이 프로그램이 텔레비전의 강력한 영향력을 빌려서 주요 이해 관계자들의 디자인에 대한 인식을 갱신할 수 있는 역사적 경험의 공통 조건을 제공했기 때문이었다.24)

<세계는 디자인혁명 시대> 방영을 전환점으로 삼은 1980년대 초중반의 변화는 1980년대 중후반 ‘3저 호황’에 따른 국내외 경제 상황 변화에 산업디자인계가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데 발판 구실을 톡톡히 했다. 특히 고도성장에 따른 구매력을 갖춘 중산층의 증가는 본격 소비사회 진입과 함께, 이전까지 수출 진흥에만 집중되었던 산업디자인계의 관심을 내수 시장으로도 돌려놓는 계기를 제공했다. 이에 따라 1980년대 초반 <세계는 디자인혁명 시대>뿐만 아니라 디자인 교육자와 디자이너들이 조형 중심의 ‘스타일링’에 대한 보완적인 접근법으로 주목했던 인간공학과 마케팅 리서치는, 이 시점에 중산층 소비자를 소구 집단으로 삼은 주요 가전업체들의 제품개발 프로세스에서 각각 하이터치(high touch) 접근법과 라이프스타일 연구라는 좀 더 정교화된 형태로 체계화되기 시작했다(Park, 2019). 그리고 이 과정에서 산업디자이너는 “수출 산업의 역군”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한편으로는 “생활문화의 창조자”이자 “생활집단의 대변인”으로서 시장 세분화와 제품 다양화를 주도하는 기획자 역할을,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술 부문과 마케팅 부문을 상호 연계하는 조정과 융합의 기능”을 갖춘 조정자 역할을 새롭게 부여받기 시작했다(Kim, 1988; Park, 2022). <세계는 디자인혁명 시대>의 표현을 빌리자면, “디자인을 통해 마케팅과 매니지먼트를 연결할 줄 아는” “디자인 관리자”로서의 정체성을 구축해 나갔던 것이다. 한편 대학에서도 산업디자인학과 신설이 일반화되기 시작했고, 디자인 조직·전략·방법론이나 컴퓨터 활용과 관련된 교과목 개설이 기존 교육과정을 보완하는 방편으로 확산되었다. 특히 1986년에 개교한 한국과학기술원 산업디자인학과는 이런 변화의 흐름에서 중요한 촉매제 역할을 했다.

본 연구는 영상 자료와 문헌 자료를 중심으로 관련 저술과 논문 등을 참고해 진행했다. 기본적으로 자료의 해석에 기반을 둔 연구로서 아쉬운 점이 분명한데, 이를 보완하기 위해 <세계는 디자인혁명 시대> 방영 전후에 산업디자인 실무와 교육을 담당하던 주요 관련자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나 구술 채록을 추후에 진행할 필요가 있다. 이는 <세계는 디자인혁명 시대>뿐 아니라 1980년대 초중반 산업디자인계의 변화상을 좀 더 역동적으로, 그리고 좀 더 다채롭게 그려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Acknowledgments

본 연구는 2021년도 동양대학교 학술연구비의 지원으로 수행되었음.

This study was supported by grant from Dongyang University in 2021

Notes

1) 프로그램 크레디트에 등장하는 취재팀은 무역협회보 기자를 제외한 총 4명으로, 기획·취재의 방윤현, 촬영·편집의 이상만, 장익환, 구성·연출의 양성수였다.

2) 이 기사에 따르면, 프로그램의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 기자는 “디자이너라면 의상 디자인이라고 단정하는 시청자가 많”은 상황에서 일반 시청자가 이해하기에는 다소 그 내용이 어려웠다고 아쉬움을 표하면서, “디자인에 대한 일반의 이해를 넓히는 입문 또는 개괄적인 프로그램”이 따로 준비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3) 참고로 프로그램의 시작을 알리는 1부의 오프닝 타이틀 시퀀스에서는 현대적인 전자음악과 함께 핀란드 디자이너 타피오 비르칼라(Tappio Wirkkala)의 다음과 같은 말이 화면 위로 지나간다. “지금부터 50년 전만 해도 선배 디자이너들은 디자인을 이해시키기 위해 거리를 헤맸다. 20년 전만 해도 우리는 디자인을 팔기 위해 정부 기관과 업체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만나기에는 너무 바쁘다.” 시대에 따른 디자인에 대한 서구 사회의 인식 변화를 압축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이다.

4) 당시 토요타 디자인부서의 총인원은 420명, 이중 디자이너는 200명이라고 언급된다.

5) 미국 산업디자인협회의 로버트 스미스 회장은 이런 주장에 맞장구를 치듯이 산업디자인의 전망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한다. “수년 내로 산업디자인에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기업체들은 날이 갈수록 확장될 것이고 그럼으로써 산업디자인 문제 역시 그 영역이 확장되어 나가고 복합적인 기능으로 변화해 나갈 것입니다. 그래서 산업디자이너는 디자인의 제반 문제를 책임 경영자와 직접 의논하고 (...) 제품의 생산 활동에 깊숙이 개입할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기업의 경우 디자인은 엔지니어링 부문과 똑같은 중요성과 독립성을 부여받고 있는 실정이며, 엔지니어링의 큰 기능적 측면으로 고려되고 있기도 합니다.”

6) 흥미롭게도 이 슬로건은 1950년대 일본 디자인계에 큰 영향을 끼쳤던 미국 디자이너, 레이먼드 로위(Raymond Loewy)의 1951년 저서 『절대 있는 그대로 두지 말라(Never Leave Well Enough Alone)』의 부제인 “립스틱에서 기관차까지”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에쿠안 겐지는 방송에는 소개되지 않은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Bang, 1987). “옛날 내가 학생 시절에 미국 디자이너인 레이먼드 로위가 지은 <립스틱부터 기관차까지>라는 책을 읽었는데, 일본어 제목이 상당히 매력적인 데다가 내용도 디자인을 전공하던 나에게 좋은 안내서가 되었습니다.” 로위의 책은 미국 출판 이후 2년만인 1953년에 일본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당시 책 제목은 미국판의 부제였던 『립스틱에서 기관차까지』였다.

7) FIT 탐방의 종반부에서는 뉴욕 패션 산업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FIT 출신 디자이너의 현황을 살펴보기 위해, 한국인 디자이너 이수영의 디자인 스튜디오를 방문해 패션디자이너로서의 성장 과정을 짚어보기도 한다.

8) 국내에 산업디자인 분야의 디자인 전문회사가 설립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의 일이었다. 1987년에 한국프리즘(대표: 김철주)과 탠덤디자인(대표: 권영성), 1989년에 212디자인(대표: 은병수)과 프론트디자인(대표: 구성회) 등의 산업디자인 전문회사가 문을 열었다(Oh et al., 2020).

9) 에쿠안 겐지 역시 방송에는 소개되지 않지 않았지만 <세계는 디자인혁명 시대>의 촬영 당시 인터뷰에서 일본의 전기밥솥을 사례로 들면서, “전기밥솥이 새로운 스타일의 식사문화를 떠받치고 있다”고 지적하고 “새로운 디자인은 새로운 생활을 만”든다는 점을 강조한다(Bang, 1987).

10) 김철수의 이와 같은 관점은 1970년대 후반 이후 꾸준히 제기되었던 것이기도 했다. 그는 1978년 월간 디자인과의 인터뷰에서 산업디자인을 “문화 창조의 수단”으로 볼 수 있다면서 그것이 “생활의 충족을 위해 편리함만을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생활의 양식을 제시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월간 디자인』, 1978년 10월호).

11) 서울대 응용미술과 대학원의 공업디자인 전공 신설과 함께 이 시점에 주목해야 할 것은 서울대 민철홍 교수의 주도로 1972년 6월에 창립한 한국인더스트리얼 디자이너협회(KSID)이다. 창립회원은 민철홍 교수를 포함해 총 9명으로, 부수언, 이순혁, 안종문, 김길홍, 배천범, 민경우, 김철수, 최대석이었다. 이중 민경우, 김철수, 최대석은 바로 서울대 대학원의 공업디자인 전공 출신이기도 했다. 이 단체는 1972년 11월에 신세계 5층 화랑에서 자유 주제로 창립전을 열었고, 1973년에는 “전기전자”를, 1974년에는 “어린이의 세계”를, 1975년에는 “여성을 위한 디자인”을 주제로 회원전을 개최했다. 회원수도 점차 증가해, 1974년에는 12명, 1975년에는 17명, 1977년에는 38명에 이르렀다(Oh, 2011). KSID는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지만, 1980년대 초반 “디자인 세대”의 출현을 예비하는 거점 구실을 했다.

12) 이 제도는 1981년 12월 국비 유학생 선발 파견 제도에 디자인 분야가 신설되면서 폐지되었다.

13) 참고로, 1985년 3월 시점에 디자인 계열의 4년제 학과 명칭에 ‘산업디자인’이나 ‘공업디자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대학은 총 7개뿐이었다. 국민대가 ‘공업디자인’을, 군산개방대, 대전개방대, 경기개방대, 울산대, 청주대, 상명여대가 ‘산업디자인’을 학과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었다(Lee, 1985).

14) 한편, 1989년 11월 코엑스 국제회의장에서는 ‘국제 디자인 세미나’가 한국과학기술대학 산업디자인학과 첫 졸업전의 부대 행사로 개최되었는데, 이때 일리노이 공대의 찰스 오웬 교수가 초청되어 “정보화 시대의 디자인 교육”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진행했다(Owen, 1990).

15) <세계는 디자인혁명 시대>에서 이 유학 연수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언급된다. “(이 회사의(인용자 주)) 디자이너들 중 한 명은 영국의 자동차 디자인 학교에서 2년 동안 디자인 교육을 받고 왔고, 다른 한 명이 현재 가 있습니다.”

16) 금성사 디자인종합 연구소는 1987년에 다시 큰 변화를 겪었다. 연구소의 제1실 부장으로 있던 김철호가 해당 연구소의 소장으로 승진한 것이었다. 『월간 디자인』은 그의 소장 승진이 “디자인이 산업에 있어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을 경영층으로부터 인정받았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이 시점이 되면, 디자인종합연구소의 총인원은 4년 전보다 두 배가 늘어서 80명 규모였고, 내부 조직은 총 3개 실로 구성되었다. 제1실과 제2실은 각각 전자제품과 전기제품의 디자인 실무를 맡았고, 제3실은 디자인 연구개발(R&D)을 담당했다(Lee, 1987).

17) 금성사는 1958년에 디자인 관련 조직으로 ‘의장실’을 신설했고, 1963년에는 ‘공업의장과’로, 1970년 이후, ‘공업의장실’, ‘디자인실’로 확대 개편했다. 삼성전자는 1973년부터 디자인부서를 기술개발실 소속으로 두기 시작했고, 대우전자의 전신인 대한전선은 1973년에 ‘의장개발과’를 신설했다(Oh, 2011).

18) 제1회 공모전에는 총 90개의 작품이 응모했다.

19) 전자는 텔레비전, VTR, 컴퓨터, 키보드 등을 컴포넌트 시스템을 구성한 것이었고, 후자는 어린이의 신체적 발달 과정을 반영하되 그들이 친근감을 느낄 수 있는 형태로 디자인한 것이었다.

20) 한국과학기술대학 산업디자인학과 1기로 구성된 팀(남정욱, 민진영, 안영진, 이경희, 허성철)의 “어린이를 위한 제품 디자인 연구”로, 제5회 금성 국제 산업디자인 공모전의 특별상을 수상했다.

21) 최수신은 1957년 서울 출생으로 1978년에 경기공업전문대학 공업디자인과를 졸업했다. 1984년 당시 대우자동차 기술연구소의 디자이너로 근무했다. 이후 기아자동차를 거쳐 퍼시스와 일룸에서 디자인연구소 소장으로 일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2003년부터 신시내티대학교 디자인학부 산업디자인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22) 유석순은 1950년 서울 출생으로 1973년 홍익대학교 응용미술과와 1985년 동 대학 산업미술대학원 산업디자인과를 졸업했다. 1975년에 금성사에 입사했으며, 1985년 당시 디자인종합연구소 제2실 실장을 맡고 있었다.

23) 앞서 살펴본 한국과학기술대학(KIT)은 1989년 7월 한국과학기술원(Korea Advanced Institute of Science and Technology)과 통합되었다. 이후에는 한국과학기술원으로 표기했다.

24) 방윤현은 취재 당시 일본 산업디자인협회의 한 간부로부터 “일본서도 국영TV가 디자인 문제를 특집으로 다루어 본 적이 없었는데 당신네들이 하는 걸 보니 놀랍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Jung, 1983). 텔레비전의 대중적 파급력을 빌려서 디자인 진흥의 계기를 마련한 것은 확실히 1980년대 초반 한국적 상황의 특수한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References
  1. 1 . Bang, Y. (1987, February). 에쿠안 겐지와의 인터뷰-디자인은 사물의 혼과 인간의 대화 [Interview with Genji Ekuan - Design is a Human Conversation with the Soul of Things]. Monthly Design, 107-109.
  2. 2 . Cho, H. (2013). 에쿠안 겐지의 일본 도시락의 미학 [Issues in the 1980 Japanese Design : Ekuan Kenji's The Aesthetics of Japanese Lunchbox (1980)]. Art History, 27, 449-471. [https://doi.org/10.14769/jkaahe.2013.08.27.449]
  3. 3 . Cho, W. (1983, December). 제1회 금성산업디자인 공모전 [The 1st Goldstar Industrial Design Competition]. Monthly Design, 91-96.
  4. 4 . Choi, B. (1990, January). 탐방-한국과학기술대 산업디자인학과 [Visits-Department of Industrial Design, KAIST]. Monthly Design. 60-63.
  5. 5 . Choi, S. (1984, February). 자동차 선진국의 길을 달린다 [Driving Down the Roads of the Automotive Developed World]. Monthly Design, 78-80.
  6. 6 . Jang, H. (1982, March). 디자인 교육과 외적 환경 [Design Education and the External Environment]. Monthly Design, 90.
  7. 7 . Jung, J. TV 주평 [TV Reviews]. (1983, January 24). Chosun Ilbo.
  8. 8 . Jung, S. (1983, March). <세계는 디자인 혁명시대> KBS 경제부 방윤현 기자 인터뷰 [<The World Was in an Era of Design Revolution> Interview with Yoonhyun Bang, KBS Economics Reporter]. Monthly Design, 22, 28-32.
  9. 9 . Kim, C. (1988, March). 생활문화의 창조자, 생활집단의 대변인 [Creators of Living Cultures, Spokespeople for Living Groups]. Monthly Design, 36-37.
  10. 10 . Kim, J. (1989, June). 모나지 않은 세련미를 추구하는 합리주의자, 민경우 [Product Designer, Kyungwoo Min]. Monthly Design, 29-35.
  11. 11 . Kim, J. (2013). 한국의 디자인 [Design in Korea]. Paju: Ahn Graphics.
  12. 12 . Kim, S. (2020). 1980년대 우수디자인(GD)과 국가의 디자인 정책 [Good Design (GD) and National Design Policy in the 1980s]. 디자인 코리아 : 50가지 키워드로 본 한국 디자인 진흥 50년 [Design Korea: 50 Years of Korean Design Promotion in 50 Keywords]. Sungnam: KIDP.
  13. 13 . Lee, H. (1985, March). 디자인 교육제도의 현황과 그 진단 [The State of Design Education and Its Diagnosis]. Monthly Design, 107-111.
  14. 14 . Oh, C. (2011). 제로에서 시작하라-민철홍과 한국의 산업디자인 [Starting From Zero-Chulhong Min and Korean Industrial Design]. Seoul: Designflux.
  15. 15 . Oh, C. (2021). 국형 제품과 기묘한 근대성 [Korean-style Products and Pechliar Modernity]. 올림픽 이펙트: 한국 건축과 디자인 8090 [Olympic Effect: Korean Architecture and Design from 1980s to 1990s]. Seoul: MMCA.
  16. 16 . Oh, G., Kim, J., Kim, S., Kang, H., Kim, S., Choi, M., Son, J., & Lee, S. (2020). 디자인 코리아 : 50가지 키워드로 본 한국 디자인 진흥 50년 [Design Korea: 50 Years of Korean Design Promotion in 50 Keywords. Sungnam: KIDP.
  17. 17 . Owen, C. (1990, January). 정보화 시대의 디자인 교육 [Design Education in the Information Age]. Monthly Design, 102-107.
  18. 18 . Park, H. (1984, October). 공모전의 성격, 목표, 범위가 뚜렷 [The Nature, Goals, and Scope of the Competition Are Clear]. Monthly Design, 63-35.
  19. 19 . Park, H. (2019).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 국내 가전업체의 디자인 전략 연구-금성사와 대우전자를 중심으로 [The Design Strategies of Korean Consumer Electronics Companies in the late 1980s and early 1990s- Goldstar and Daewoo Electronics]. Archives of Design Research, 32(3), 137-152. [https://doi.org/10.15187/adr.2019.08.32.3.137]
  20. 20 . Park, H. (2022). 성숙기 소비사회의 도래와 라이프스타일 개념의 도입-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 한국의 디자인, 광고, 영화 사례를 중심으로 [Introducing Lifestyle in the Consumer Society in South Korea: Cases of Design, Advertisement, and Film in the Late 1980s and Early 1990s]. Archives of Design Research, 35(1), 347-365. [https://doi.org/10.15187/adr.2022.02.35.1.347]
  21. 21 . Pulos, A. (1983, July/August). 미국의 산업디자인 교육 [Industrial Design Education in the United States]. Industrial Design, 68, 27.
  22. 22 . Ru, S. (1985, August). 소니의 디자인 철학 (1) [Sony's Design Philosophy (1)]. Monthly Design, 62-67.
  23. 23 . Ru, S. (1985, September). 소니의 디자인 철학 (2) [Sony's Design Philosophy (2)]. Monthly Design, 71-75.
  24. 24 . Ru, S. (1985, October). 소니의 디자인 철학 (3) [Sony's Design Philosophy (3)]. Monthly Design, 76-79.
  25. 25 . Uchida, S. (2023). Sengo Nihon Design Shi [일본 현대 디자인사] (Roh, J. Trans.). Seoul: Somyong Publishing.
  26. 26 . Wang, M. (1994, May). 디자인 초대석: 정경원 교수 [Design Guest Seat: Professor Kyungwon Jung]. Monthly Design, 123.
  27. 27 . Industrial Designer, Chulsoo Kim [공업디자이너, 김철수]. (1978, October). Monthly Design, 42-43. [https://doi.org/10.2307/1250530]
  28. 28 . Hyundai Motor Introduces the New Pony Ⅱ [현대 자동차 신모델 포니 2 선보여]. (1982, March). Monthly Design, 13.
  29. 29 . Design and Ergonomics [디자인과 인간공학]. (1982, April). Monthly Design, 83.
  30. 30 . Design and Professional Books, Conversation-What's the Problem [디자인과 전문서적, 좌담-무엇이 문제인가]. (1982, August). Monthly Design, 98-103.
  31. 31 . Conversation-To Improve the Social Status of Designers [좌담-디자이너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위하여]. (1982, November). Monthly Design, 103-106.
  32. 32 . Korean Journalist Award Ceremony [기협 창립 19돌 한국기자상 시상식]. (1983, August 17). Kyunghyang Shinmun.
  33. 33 . Announced the 10th Korea Broadcasting Awards [10회 한국방송대상 발표]. (1983, September 1). Donga Ilbo.
  34. 34 . Conversations-Industrial Designers, It's Time to Wake Up to Mechanics [좌담-산업 디자이너, 이제 메카니즘에 눈을 떠야 할 때]. (1983, December). Monthly Design, 97-100.
  35. 35 . Awarded 47 Medals for Industrial Design Achievements [산업디자인 유공자 47명 훈포장]. (1993, September 1). Maeil Business Newspap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