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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기 왕실 생활공간 내 도배지의 실내디자인사적 의미와 디자인 재현 연구2 : 왕실의 위상에 따른 벽지 디자인의 변천
Study of Historical Meaning and Design Representing of Wall Paper in the Royal Living Space of Early Modern Korea2: Changes in Design Characteristics by the Status of Royal Family
  • Jiyoung Lee : Department of Industrial Design, Sungshin Women's University, Seoul, Korea
  • 이 지영 : 성신여자대학교 디자인과, 서울, 대한민국

연구배경 최근 궁궐 전각 및 왕실소유 가옥들의 복원정비를 위한 해체과정에서 발굴된 벽지들은 왕실의 생활공간이 다채로운 색감과 반복된 포맷의 문양으로 장식되어왔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사료들이 제작된 시기는 왕실의 위상에 있어 격변이 일어났던 조선말부터 대한민국 정부수립까지의 약 100여년의 시간을 아우르고 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근대기 왕실 생활공간의 주체였던 왕과 왕실의 위상변화를 벽지 디자인의 특수성을 형성하는 요인으로 보고, 이에 따른 왕실 벽지 디자인의 변화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연구방법 1단계 이론고찰에서는 조선말부터 대한민국 정부수립까지의 기간 동안 왕실의 위상변화를 고찰하고 그에 따른 시기 구분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시기별로 당시 왕 및 왕가가 거주하였던 생활공간이 지닌 건축양식과 의장의 특성을 살펴보았다. 2단계 사료 분석 단계에서는 1단계에서 구분한 시기에 따라 사료들을 분류하고, 각 사료들이 지닌 조형적 특성을 분석하였다. 조형적 특성은 문양의 주제, 색채, 패턴의 기하학적 특징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3단계 분석과 함의도출 단계에서는 통시적 관점의 해석을 통해 왕실의 위상변화와 벽지 디자인의 변모 양상 간의 연관성을 살펴보았다.

연구결과 왕실의 위상변화에 따라 시대를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전통적 조선왕조가 계승되었던 조선말, 고종이 독립국가의 군주로써 황제를 선언한 대한제국기, 일본황실의 일원으로 지위가 격하되었으나 왕공족 신분으로 대내적 상징성이 유지되었던 일제강점 순종재위기, 왕실의 실존이 사라짐에 따라 구심력이 급격히 와해되는 순종승하 이후까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사료들을 분류, 분석한 결과 사용자의 지위와 조영목적에 따라 상징성과 의미를 중심으로 선택되었던 문양의 주제는 점차 그 목적의식이 희미해졌고, 단색 중심으로 표현을 절제하였던 색채특성은 다채로워지는 경향을 살펴 볼 수 있었다. 또한 정방형 패턴에서 능형패턴으로, 나아가 오지형 패턴으로 변화하며 기하학적 특성이 감소되어 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결론 전통적으로 왕실 벽지의 디자인은 사용자의 지위와 위계, 그리고 각 공간의 사용목적에 따라 결정되어왔으나, 근대기 왕과 왕실의 위상 변화로 인하여 그 규범의 절대성이 점차 느슨해지고, 외부문화의 수용에 유연해져 갔다. 이를 통해 근대기 왕실 생활공간의 주체였던 왕과 왕실의 위상변화가 벽지 디자인의 특수성을 형성하는 요인임을 활인할 수 있었다.

Abstract, Translated

Background Through the wallpapers found in the royal palaces and royal houses, we can see that the palace living space and royal houses have been decorated with colorful and patterns of repeated format. However, the time of their use was about 100 years from the end of the Joseon dynasty to the establishment of 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This is the time when the status of the royal family changed drastically. Therefore, in this study, it is assumed that the change in the status of the royal family, which was the subject of the royal living space in the modern period, was the factor that formed the specificity of wallpaper design.

Methods In Step 1, the change of the status of the royal family from the end of the Joseon dynasty to the establishment of 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was identified, and the time periods were distinguished. In Step 2, I classified wallpapers according to the period of separation in Step 1, and I analyzed the design characteristics of each wallpaper. The design characteristics were divided into motif, color, and geometric features. In Step 3, I analyzed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status of the royal family and the design of wallpaper design from diachronic view.

Results The results of classifying and analyzing the wallpaper are as follows. First, the tradition of Joseon dynasty, which reflects the theme containing the symbol and meaning into the formative style, was maintained until the Emperor Sun-jong period. However, the patterns after Sun-jong tend to lack symbolism and abstraction. Second, the wallpaper of the royal family traditionally consisted of blue and white colors, and the pattern was expressed in monochromatic colors. However, it tended to vary from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hird, during the Great Han Empire period, the grid patterns and lozenge patterns coexisted. Most of the lozenge patterns were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After Emperor Sun-jong, a straight decorative line of the lozenge pattern changes into a curve, and an ogee pattern appears.

Conclusions Traditionally, the design of the royal wallpaper has been determined by the user 's status, hierarchy, and the purpose of each space. However, due to the changes in the status of modern kings and royal families, the strictness gradually loosened and became more flexible in accepting foreign cultures. This tendency was also reflected in the design of the modern royal wallpapers. The symbolism of the pattern was reduced, the color was varied, and the geometric system was also reduced.

Keywords:
Korean Interior Design, Korean Modern Design, Korean Wallpaper, 한국 실내 디자인, 한국 근대 왕실 벽지, 한국 전통 벽지, 기하학적 문양.
pISSN: 1226-8046
eISSN: 2288-2987
Publisher: 한국디자인학회Publisher: Korean Society of Design Science
Received: 13 Feb, 2019
Revised: 10 May, 2019
Accepted: 10 May, 2019
Printed: 31, May, 2019
Volume: 32 Issue: 2
Page: 153 ~ 165
DOI: https://doi.org/10.15187/adr.2019.05.32.2.153
Corresponding Author: Jiyoung Lee (aplicot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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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nding Information ▼
Citation: Lee, J. (2019). Study of Historical Meaning and Design Representing of Wall Paper in the Royal Living Space of Early Modern Korea2: Changes in Design Characteristics by the Status of Royal Family. Archives of Design Research, 32(2), 153-165.

Copyright : This is an Open 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educational and non-commercial use,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1. 서론
1. 1. 연구의 배경 및 목적

한국의 전통적 실내공간은 창과 벽이 흰색 종이로 마감된 모습으로 끊임없이 복원, 재생산되어왔다. 문헌에 채색된 도배지로 궁궐전각이나 상류층의 주택을 마감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것을 현현한 공간 이미지로 재현하기에는 정보가 너무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궁궐 전각 및 왕실소유 가옥들의 복원정비를 위한 해체과정에서 발굴된 벽지들을 조사 분석 한 여러 선행 연구들을 통해 근대기 한국의 왕실과 상류계층이 벽지를 주요한 장식재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사용자의 신분, 지위에 적절한 상징성을 공간에 투영하는 매개체로 활용하기 위해 다채로운 색감과 반복된 포맷의 문양으로 장식해왔음이 확인되었다(Lee, 2017). 그러나 이 벽지들이 제작된 시기는 왕실의 위상에 있어 격변이 일어났던 조선말부터 대한민국 정부수립까지의 약 100여년의 시간을 아우르고 있다. 즉 선행연구를 통하여 정립된 보편적 특징 이외에도 시대상에 따른 개별적 특수성이 반영되어 있을 것으로 예측된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근대기 왕실 생활공간의 주체였던 왕과 왕실의 위상변화를 벽지 디자인의 특수성을 형성하는 요인으로 보고, 이에 따른 왕실 벽지 디자인의 변화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전통 벽지 조형의 형성과 변화 요인을 규명하고, 현대 디자인으로의 맥락적 발전 가능성을 탐색하고자 한다.

1. 2. 연구의 범위 및 대상

한국 근대 왕실 벽지의 분석은 창덕궁 석복헌, 운현궁 노락당, 경운궁 준명당의 복원정비를 위한 해체과정에서 발견된 벽지의 원본을 입수하여 이루어졌으므로 연구의 공간적 범위는 창덕궁과 운현궁, 경운궁에 한정된다. 본 연구를 위해 입수한 벽지는 총 38점이며, 이 중 육안으로 문양과 패턴 구성이 구별 가능한 수준의 총 23점 16종의 분석이 이루어졌다. 이는 안료를 추출하여 색도분석 시도를 하였던 1차 연구대상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4종이 추가된 것이다. 분석 사료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848년, 가장 최근의 것은 1957년 경 도배된 것으로 추정되는바 장소의 사용 시기와 동일한 시대적 배경을 공유한다. 따라서 연구의 시대적 범위는 1848년부터 해방 전후까지로 설정하였다.

1. 3. 연구 방법

연구의 과정은 문헌 및 선행연구를 통한 이론고찰, 벽지 사료의 분류 및 분석, 함의도출의 3단계로 진행되었다. 1단계 이론고찰에서는 문헌연구를 통해 조선말부터 대한민국 정부수립까지의 기간 동안 왕실의 위상변화를 고찰하고 그에 따른 시기 구분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왕실의 위상이 공간조영에 있어 주요 변인임을 밝히고자 시기별로 당시 왕 및 왕가가 거주하였던 생활공간이 지닌 건축양식과 의장의 특성을 살펴보았다. 2단계 사료 분석 단계에서는 각 사료들의 제작 시기를 추정하여 1단계에서 구분한 시기에 따라 분류하고, 각 사료들이 지닌 조형적 특성을 분석하였다. 조형적 특성은 문양의 주제, 색채, 패턴의 기하학적 특징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이 중 문양의 주제와 색채는 선행연구를 통하여 분석된 결과를 참조하였으며, 패턴의 기하학적 특징 분석은 각 사료들이 지닌 문양의 형태와 크기, 반복의 경향과 간격의 측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3단계 분석과 함의도출 단계에서는 2단계의 분석내용을 바탕으로 각 시기별로 벽지 조형이 지닌 특수성을 도출하고, 이를 통시적 관점에서 해석함으로써 왕실의 위상변화와 벽지 디자인의 변모 양상 간의 연관성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하여 근대 왕실 벽지 조형의 변천을 종합하고자 한다.

2. 근대 왕실의 위상 변화
2. 1. 시기에 따른 왕실의 위상

1) 조선말기

조선시대 일반 백성들에게 왕실의 지위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물리적 영토의 지배 뿐 아니라 유교이념에 입각한 관념적 세계의 중심이었다. 조선말까지도 이러한 상징적 지위는 유지되고 있었으나, 정치적 대립과 열강들의 문호개방 압력으로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왕실을 대표하는 주요 인물은 흥선대원군과 그의 아들인 고종이었다. 흥선대원군은 1863년 고종이 즉위한 이후로도 모든 정사의 실권을 위임받아 섭정을 행하며, 쇄국정책을 통해 왕실의 절대적 상징성을 더욱 강화하려 한 인물이다. 그러나 고종이 ‘친정’을 선언함에 따라 흥선대원군은 1873년 하야하였다. 고종은 법궁으로서 경복궁의 위상제고와 문호개방을 통한 개화정책을 추진하며, 근대적 국제관계 속에서 평등한 지위를 지닌 근대국가의 군주가 되고자 하였다(Hwang, 2008). 1876년 체결된 강화도조약은 형식 상 조선이 근대 민국공법적 관계의 주체임을 드러낸 사건이다. 그러나 전근대적 조공관계의 주체인 청과 강화도조약의 주체인 일본은 왕실의 내정에 간섭하며 근대적인 식민지지배에 박차를 가하였다(Koo, 2005).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함에 따라 일본의 영향력은 더욱 거세졌고, 1895년 을미사변을 계기로 고종은 일본에 큰 위협을 느끼게 된다. 결국 고종은 1896년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게 된다.

2) 대한제국기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는 동안 조선 내외부에서 자주적 근대국가에 대한 주장이 일어났고, 이는 고종의 환궁에 대한 요구로 이어졌다. 이후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하며 1897년 황제즉위식을 행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Lee, 2004). 황제를 선언한 것은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로부터 탈피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제군주제라는 지배형식은 거의 변화가 없었으며, 전통적 왕조인 조선의 전통과 풍속도 계승되었다. 즉 대외적으로는 근대국가의 일원으로써 대표적 지위를 선언하였으나, 대내적으로 고종과 왕실은 절대적 지배력을 행사하는 군주와 군주의 일가로서 상징성이 유지되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독립국가의 선포 노력에도 불가하고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친일파를 앞세워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하였다. 고종황제는 을사늑약의 무효를 알리기 위하여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하는 등 국제사회에 부당함을 알리려 노력하였지만, 이를 빌미로 한 일제의 강압에 의해 1907년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3) 일제강점 순종재위기

을사늑약 이후 대한제국은 일본 총독의 통치를 받으며 일본 제국주의 체제 아래 놓이게 되었다. 1907년 고종의 폐위와 순종의 즉위는 대한제국 황실의 권위 추락과 일제에 의한 황제권 제약이 본격적으로 진행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후 일제에 의해 이미 황실에 궁금령과 재정권의 박탈,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이 이루어졌고, 1910년 한일합방으로 대한제국 황제는 이왕(李王)으로 격하 되었으며, 대한제국 황실은 일본 궁내성에서 관리하는 왕가가 되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황실에 대한 대우를 결정하였기에 왕실 일가는 합방 후에도 그 지위를 유지하였고, 식민지 전 기간을 통해 왕공족(王公族)으로 예우를 받았다(Lee, 2016). 특히 순종은 1926년 서거하기까지 고종의 뒤를 이어 조선왕실의 의례를 주도하며 활발한 행보를 보였다. 고종이 덕수궁, 순종이 창덕궁에 거주하는 궁궐의 주인이었다는 점도 그들이 조선왕실의 대표이며, 왕실 의례의 주재자라는 것을 상징하는 요인이었다(Lee, 2014). 즉 일본 천황의 지배하에 있으나 조선의 국왕으로서 상징성은 유지되었다. 1919년 고종의 붕어(崩御)를 기화로 범국민적 독립운동인 3.1만세 운동이 일어날 정도로 대중의 인식 속에서도 왕실은 구심과 통합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현대 정치사상인 사회주의와 공화주의가 대두됨에 따라 독립이 곧 왕권국가의 회복이라 여기는 인식은 급격히 사라져갔고, 민주공화국을 표명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4) 순종 승하 후 정부수립까지

1926년 순종 승하 이후 영친왕이 이왕의 지위를 계승하여야 했지만, 이는 명목상의 지위일 뿐이었다. 황태자로 책봉 되던 1907년 일본에 유학하여 철저히 일본식 교육을 받았고, 일본 황족인 이방자 여사와 정략결혼을 하였던 그에 대한 국내 지지기반은 거의 전무하였다. 영친왕과 그의 누이인 덕혜옹주는 일본에 거류 중이었고, 국내에는 순종황제의 미망인인 윤황후가 남아 있었다. 1945년 해방으로 국권이 회복됨에 따라 일제에 의하여 명목 상 유지되었던 왕공족으로서의 지위가 1947년 일본헌법을 통해 폐위되었다(Lee, 2016). 더불어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 출범하며, 대내적으로도 왕실이 존치되어야 할 공식적인 명분은 사라지게 되었다.

2. 2. 소결

분석 대상인 벽지 사료들의 제작시기인 1848년부터 1950년대까지 한반도의 권력지형은 급변하였으며, 왕실의 대내외적 위상 또한 그 흐름에 따라 변화하였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Table 1
Changes in the status of the Korean Kingship in Modern era

국호 조선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구분 고종이전 고종재위 대한제국기 순종재위 순종승하이후
위상
변화
대외 중국의 속방 독립국가의 군주 일본 황실의 일원
대내 한반도 영토지배의 실권
왕조를 계승한 의례적 상징
의례적 상징 -
왕실 생활공간 창덕궁 운현궁
/경복궁
경운궁 창덕궁 창덕궁

3. 근대 왕실의 위상변화와 생활공간의 성격
3. 1. 근대 왕실 생활공간

1) 창덕궁 낙선재

창덕궁은 1405년 경복궁의 이궁(離宮)으로 창건되었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소실되었고, 광해군 때에 중건한 이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기 전까지 조선의 법궁 역할을 하였다. 고종은 창덕궁에서 즉위하였지만, 1868년 경복궁으로 이어(移御)하였고 아관파천 후에는 경운궁으로 환궁함에 따라 창덕궁은 다시금 이궁이 되었다. 이후 1907년 황제가 된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하며, 창덕궁은 다시 왕실의 본거지가 되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창덕궁은 조선시대 궁궐의 전형을 잘 보존하고 있으면서도, 근대기 왕실생활문화와 그 변화를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었다.

창덕궁의 대표적 생활공간은 바로 낙선재 일곽이다. 낙선재 일곽은 헌종이 자신과 후궁, 대왕대비의 생활을 위하여 조성한 것으로 낙선재와 석복헌, 수강재를 포함한다. 왕이 기거하던 낙선재와 후궁인 경빈김씨가 기거하였던 석복헌의 종도리에는 용을 그려 넣고, 합각머리에는 용두를 얹어 왕의 영역인 궁의 일부로써 상징성을 반영하였다. 반면 생활을 위한 공간이라는 목적에 충실한 특징도 살펴볼 수 있는데, 사대부의 주택에 견줄만한 소박한 외관과 자유로운 배치 구성이 그것이다. 또한 낙선재 일곽은 여느 궁궐 전각에 비하여 길상문양으로 가득한데, 이는 거주하는 이의 장수와 자손의 번성을 기원하는 뜻이 담긴 것이다. 이러한 의도는 ‘석복헌 상량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노진하의 연구를 참고하면 ‘錫福’이라는 이름이 곧 ‘국가의 대계인 왕세자가 탄생하여 군자의 효행을 길이 전할 수 있게 되면 이는 또한 백성들에게 복을 주는 것’이므로 이를 기원하는 뜻을 담은 것이라 한다(Noh, 2014).

1907년 황제가 된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한 이후 정침(正寢)은 대조전이었으나 1917년 화재로 대조전이 전소됨에 따라 임시 어전으로 낙선재를 활용하게 된다. 당시 낙선재 일곽이 수리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 많은 부분이 개조 변형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Noh, 2014). 이로부터 순종 승하 후인 1928년부터 29년까지 대대적인 신축과 보수가 이루어지는데, 이때 낙선재 서행랑이 모두 철거되고 신관이 건립되었다. 신관 내부는 입식 공간으로 계획되었으나, 전체적으로 조선식 지붕틀이 적용되어 외형상으로는 조선 궁궐의 모습이 유지되었다. 언론에서도 낙선재 신관이 ‘순(純)조선식 전각’임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황실의 공간이 갖추어야 할 형태에 관한 사회적 기대를 의식한 것으로 해석된다(Chang, 2013). 1926년 순종이 승하한 이후에는 순종황제의 미망인인 윤황후가 낙선재에 기거하였으나 대한민국 초대정부가 황실재산을 국고로 환수함에 따라 창덕궁은 국유재산이자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왕실 생활공간으로서의 기능은 대폭 축소되었다.

2) 운현궁

운현궁은 조선 제 26대 왕인 고종의 잠저로서의 왕실의 본궁이자 친부 흥선대원군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을 당시의 사저로 구한말 정치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장소이다. 고종 등극 후 대왕대비의 교서로 고종1년인 1864년에 노안당과 노락당을 포함한 운형궁의 대략적인 경역이 완공되었다. 첫 건립시기에는 전형적인 사대부가의 상류주택 평면구성을 따르고 있었으나, 이후 주요 건축물인 이로당과 노안당, 노락당과 각 행랑들이 복도각으로 연결되어 궁궐내전과 유사한 구조를 이루며 실질적인 위엄을 갖춰 나가게 된다. 따라서 운현궁은 정궁이 아닌 왕족의 사가이지만 그 규모나 건축형식면에서 다분히 궁궐전각의 요소를 갖추었다는 점이 매우 특징적이다(Bang, 1999).

흥선대원군은 주로 사랑채에 해당하는 노안당에서 기거하였으며, 이로당은 부대부인 민씨가 운현궁의 살림을 꾸려가는 곳이었다. 중심 안채인 노락당은 운현궁의 건축물 중 가장 상징적인 장소로 1866년 고종의 가례준비를 위해 민비가 왕비 책봉전의 궁중 예절과 법도를 배우는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고종이 왕으로 즉위 한 이후 행차하여 머무르기도 하였기 때문에 별궁으로써의 격식과 규모도 갖추었다. 내부 구조와 의장적인 면에 있어서도 궁궐의 침전과 유사하며, 그 치장의 형식에도 한계를 두지 않았다. 일례로 노락당의 종도리에는 쌍룡문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당시 정궁이었던 경복궁 경회루와 자경전에 적용된 방식이었다. 류시원의 저서에는 노안당과 노락당의 준공식을 기념하여 지은 노락당 기문(記文)이 소개되어 있는데, 문헌을 통하여 추정하건데 화려하면서도 규범적이고 권위적인 표현 형태들이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Bang, 1999).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꿩깃으로 장식한 금여(金與)의 기둥이 구슬로 장식한 방과 옥돌로 꾸민 집 사이에 휘황찬란하게 비치게 되었다. (중략) 금으로 깐 바닥은 햇빛에 비치고 비단으로 장식한 두공은 무지개를 옮겨 놓은 듯 병위(兵威)와 화극(畵戟)으로 호위를 하는 등 그 체모가 매우 높다 하겠다.”

3) 경운궁

경운궁은 임진왜란 직후 임시궁궐이었으나 고종이 1897년 대한제국 선포와 함께 경운궁으로 환어하면서 황제의 궁으로서 상징성을 갖게 되었다. 이 때 준명당, 함녕전 등의 전각이 새로이 건축되었는데, 준공된 지 2년도 채 되지 않아 경운궁의 전각이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다시금 대대적으로 건물들이 재건되었다(Park, 2012). 이 과정에서 경운궁은 전통적인 궁궐이 갖추어야 할 체계를 갖추게 된다. 그러나 1904년 경운궁에는 다시금 화재가 발생하였고, 이후 궁역 전반에서 중건공사가 이루어지는 사이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중건공사를 통해 경운궁이 부활하는 한편, 서양식 건축물인 석조전도 건립 중이었지만, 1907년 고종은 황제의 지위를 잃게 되었다. 이후 경운궁은 정치공간에서 왕실 생활공간으로 의미가 축소되어갔고, 고종 승하 이후 덕혜옹주와 생모 복령당 이씨마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고, 궁인들 또한 출궁함에 따라 경운궁은 빈 궁궐이 되었다(Chang, 2013). 이후 1926년 순종까지 승하하자 경운궁을 관리하였던 일제는 1930년대에 들어 공원화 계획을 진행하였고, 이를 구실로 기존의 전각, 행각, 담장들을 철거하였다.

경운궁의 생활영역은 함녕전 일곽으로 고종은 황제 즉위 후부터 1919년 승하까지 함녕전을 침전으로 사용하였다. 현재의 함녕전은 20세기 말 수차례 보수공사가 이루어지며, 조성 당시의 원형을 잃었고 중건 당시의 벽지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경운궁 전각 중 벽지가 수습된 준명당은 정전인 중화전 뒤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중화전, 석어당, 즉조당과 함께 본궐을 구성하는 주요 건물 중 하나이다. 생활영역이 아닌 정전에 인접한 것으로 보아 업무를 보았던 편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종도리에 먹으로 그린 용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궁침의 전형으로 왕의 침전으로서의 성격 또한 유추할 수 있다. 고종이 이곳에서 거처하며 외국 사신들을 접견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1907년 영친왕의 부인을 간택하는 처소로서 사용되었다는 것과 1916년 덕혜옹주를 위한 유치원을 이곳에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of Korea, 2012). 준명당은 비록 중심 생활영역은 아니었으나 고종의 황제즉위부터 양위 이후까지 일상적인 삶에 대한 기록이 남겨진 장소로 가치를 지니고 있다.

3. 2. 소결

벽지 사료가 수습된 창덕궁, 운현궁, 경운궁은 이 시기 왕 또는 왕실 일가가 거주하였던 장소로써 각 시대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는데, 조선말기의 창덕궁과 운현궁, 대한제국기의 경운궁, 일제강점기의 창덕궁을 통해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왕실의 위상변화에 따른 시기에 따라 그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Table 2
Characteristics of the Korean Royal Living Space in Modern Era

국호 조선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구분 고종이전 고종재위 대한제국기 순종재위 순종승하이후
창덕궁
낙선재
주체:헌종
목적:왕실 후사의 기원과 가족의 안위
특징: 궁(宮)의 건물로써 상징성 반영
복을 기원하는 길상문양을 활용한 장식
생활공간으로서의 소박함
- - 주체:순종
목적:조선왕실의 상징성 유지
특징: 조선전통 궁궐의 규범 유지
주체:일제
목적:조선왕실의 상징성 유지
특징: 조선 궁궐의 외형과 서구양식의 조합
운현궁 - 주체:흥선대원군
목적:왕권 위상 강화
특징: 별궁으로써 상징성 반영
왕실의 절대적 권위의 표현
- - -
경운궁 - - 주체:고종
목적:독립국가로서의 상징
특징: 조선전통 궁궐의 규범 반영
황제지위의 표현
주체:일제
목적:황궁의 상징성 해체
특징: 궁역과 전통적 질서의 해체
-

4. 근대 왕실 벽지의 조형적 특징
4. 1. 벽지 사료의 분류

이론고찰을 통하여 구분된 각 시기에 따라 사료들을 분류하였는데, 분리된 각 벽지의 제작 시기에 대한 판단은 각 벽지 사이 초배지로 활용되었던 신문지의 발행 연도를 1차적으로 참고하였다. 전통 도배에서는 초배를 한 후 그 위에 다시 치장 목적의 종이를 정배를 하게 되는데, 수습 당시의 벽지는 정배지와 초배지가 번갈아 겹겹이 붙어 있는 상태이었으며, 그 사이에서 초배지로 쓰인 신문이 발견되었다. 신문의 정보들을 단서로 발행 연도를 추적, 검증함으로써 초배지인 신문 앞뒤로 붙어있는 벽지의 제작 및 도배시기를 추정할 수 있었다. 또한 상량문 및 기록물에 나타난 각 건물의 중건시기 및 개보수 상황, 장소 고유의 역사적 사건, 시간의 흐름에 따른 벽지 외형의 연속성 등을 종합 고려하여 분류하였다. 그리고 분류된 벽지에 대하여 문양의 주제, 색채사용의 특성, 패턴의 기하학적 규칙을 분석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Table 3
Analysis of Korean royal wallpaper

국호 구분 시기별 분류




K-창(석)-01
·문양주제: 박쥐, 壽+王자문
·의미: 오복, 장수
·색채: 백(바탕), 청(문양)
·패턴유형: 정방형
·제작방식: 목판인쇄



K-운(노)-03 K-운(노)-04 K-운(노)-05
·문양주제: 모란, 당초
·의미: 부귀, 장수
·색채: 백(바탕), 청+금(문양)
·패턴유형: 능형
·제작방식: 목판인쇄
·문양주제: 국화, 당초, 고사리
·의미: 군자, 부귀, 장수
·색채: 백(바탕), 청+금(문양)
·패턴유형: 능형
·제작방식: 목판인쇄
·문양주제: 용, 卍자문
·의미: 왕, 만덕
·색채: 백(바탕), 청+금(문양)
·패턴유형: 능형
·제작방식: 목판인쇄







K-경(준)-01~06
·문양주제: 용, 봉황, 당초
·의미: 황제, 왕
·색채: 백(바탕), 청(문양)
·패턴유형: 정방형
·제작방식: 목판인쇄







K-창(석)-02 K-창(석)-07 K-창(석)-09
·문양주제: 국화, 돌림문
·의미: 군자
·색채: 청+백(문양)
·패턴유형: 능형
·제작방식: 목판인쇄
·문양주제: 거북이
·의미: 장수
·색채: 청(문양)
·패턴유형: 능형
·제작방식: 목판인쇄
·문양주제: 용, 모란
·의미: 왕, 부귀
·색채: 청+금(문양)
·패턴유형: 능형
·제작방식: 목판인쇄
K-창(석)-03/08 K-운(노)-07 K-창(석)-04/K-운(노)-08
·문양주제: 국화, 돌림문
·의미: 군자
·색채: 적+백(문양)
·패턴유형: 능형
·제작방식: 목판인쇄
·문양주제: 화초
·의미: -
·색채: 청+백(문양)
·패턴유형: 능형
·제작방식: 목판인쇄
·문양주제: 국화
·의미: 군자
·색채: 청+백(문양)
·패턴유형: 정방형
·제작방식: 목판인쇄



K-창(석)-10 K-창(석)-11 K-창(석)-12
·문양주제: 모란
·의미: 부귀
·색채: 적+녹+백(문양)
·패턴유형: 오지형
·제작방식: 목판인쇄
·문양주제: 국화
·의미: 군자
·색채: 청(문양)
·패턴유형: 오지형
·제작방식: 목판인쇄
·문양주제: 국화
·의미: 군자
·색채: 황(바탕), 흑(문양)
·패턴유형: 오지형
·제작방식: 기계인쇄
K-경(준)-07 K-경(준)-08 -
·문양주제: 장미
·의미: -
·색채: 백+녹+황(문양)
·패턴유형: 오지형
·제작방식: 목판인쇄
·문양주제: 화엽
·의미: -
·색채: 백+녹(문양)
·패턴유형: -
·제작방식: 목판인쇄

4. 2. 왕실 위상 변화에 따른 벽지의 조형적 특성

1) 조선 말 고종재위 전

고종 재위 이전의 벽지는 창덕궁 석복헌의 첫 도배지인 K-창(석)-01이 유일하며, 헌종 연간 석복헌이 처음 조영되었을 때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오복을 상징하는 다섯 개의 박쥐문양 가운데 장수를 상징하는 목숨 수(壽)와 임금 왕(王)을 합성하여 형상화 한 문자문을 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앞서 밝힌 ‘석복’의 뜻을 담은 조영목적과 그 궤를 함께 하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문양 하나에도 그에 담긴 의미와 상징성을 통해 개인과 가족의 부귀수복을 기원하는 조형문화를 발전시켜왔는데, 이러한 목적의식이 벽지의 조형에도 반영되어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K-창(석)-01의 색채의 특성을 살펴보면 백색 안료를 입힌 바탕에 단일한 청색의 문양을 찍어 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은 전통염색 방식을 통하여 다양한 청색을 만들었으며, 아주 귀한 색으로 여겨왔다. 따라서 높은 신분의 사람들의 의복이나 중요한 장소에 주로 사용된 색이 청색이다. 백색은 만물이 시작되는 바탕의 색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백청배색은 전체 사료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으로 이러한 배색이 조선시대 왕실 벽지의 전형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Lee, 2017) K-창(석)-01이 지닌 패턴의 기하학적 특성은 다섯 개의 박쥐문양이 회전반복하며 오각형의 중심문양을 이루고, 이것이 정방형의 격자체계 속에서 반복 배치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수평방향으로는 단순반복이지만, 상하 방향으로는 중심문양이 서로 대칭을 이루도록 배치한 점이 특징적인데, 이로 인해 완전대칭을 이루지 않는 오각형이 지닌 방향성이 상쇄되어 시각적 안정감이 느껴진다.

2) 조선 말 고종재위

고종재위 시기 대원군의 생활공간이었던 운현궁의 사례에서도 고결함, 부귀, 장수를 상징하는 국화, 모란, 당초 문양을 적용하여 조선 규방문화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K-운(노)-05에서는 왕을 상징하는 원형의 용 문양을 확인할 수 있는데, 운현궁이 사저임에도 불구하고 궁궐의 전각에만 허용되었던 건축양식을 적용하여 궁(宮)에 버금가는 위상을 드러내고 있다. 색채의 사용에 있어서도 이러한 의도가 확인되는데, 흰색으로 채색된 바탕에 청색과 더불어 금박이 활용되었다는 점이다. 금색은 오방색 중 황색으로 대변된다.(Ewah Color Design Research Institute, 2005)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황색을 황제의 색으로 칭하였으며, 곧 최고의 지위를 의미하므로 대내외적으로 왕권의 절대성을 강화하려 한 대원군의 뜻과도 조화를 이룬다. 이 시기의 벽지들이 지닌 패턴의 기하학적 특성은 중심문양이 사선방향으로 반복된다는 점이다. 특히 3점 중 중 2개의 사례는 (K-운(노)-03, K-운(노)-05) 사선의 기하학적 체계 속에서 직경 80mm의 원형 문양이 반복되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사선이 교차하는 지점에는 보조문양이 위치하는데, 당초 혹은 만자문이 여백을 채우듯 유기적으로 연속되는 곡선과 곡면으로 구성되는 것이 특징이다.

3) 대한제국기

대한제국기에 제작된 사료는 경운궁 준명당으로부터 수습된 K-경(준)-01~06으로 용과 봉황을 각각 중심에 둔 원형의 기본단위에 주변부는 당초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봉황은 용과 함께 최고의 상서로움을 상징하며, 조선시대 왕을 상징하는 상징물로 궁궐 외전에 두루 적용되어 왔다. 이는 용이 중국의 황제를 뜻하였기에 제후국의 왕으로써 한 단계 낮은 지위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황제를 선언한 고종의 공간에 용과 봉황이 함께 있는 문양의 벽지를 사용한 것은 대내적으로 황제가 지닌 최고의 존엄을 표현하려한 의도로 짐작된다. 준명당의 벽지는 백색으로 안료를 입힌 바탕에 단일한 녹색의 문양이 찍혀있는데, 사료의 전반에서 청색이 주를 이루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한국의 청색은 파란색인 벽색(碧色) 계열과 녹색(綠色)을 포함하여 통칭하므로 그 뜻에 있어서는 청색과 동일하다 할 수 있다.(Ewah Color Design Research Institute, 2005) 즉 조선 왕실 벽지가 지닌 색채관념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K-경(준)-01~06이 지닌 기하학적 특징을 살펴보면, 정방형의 격자체계 속에서 지름 80mm가량인 원형의 용과 봉황 문양이 엇갈리며 반복되고 있다. 여백에는 중앙에 꽃을 둔 십자(+)형의 당초문이 동일한 체계 속에서 반복되고 있다. 중심문양이 원형과 오각형이라는 차이는 있으나 정방형의 체계에서 반복된다는 점에서 K-창(석)-01과 유사하다.

4) 일제강점 순종재위기

순종재위기간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벽지는 창덕궁 석복헌과 운현궁 노락당의 것이 있다. 이 시기에 사용된 문양은 국화와 화초 같은 식물문양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거북이와 용문양을 확인할 수 있다. K-창(석)-07에 사용된 거북이 문양을 전통적으로 귀갑문이라고 하며, 십장생의 하나로 장수와 복을 기리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를 통해 일제강점기까지도 조선의 전통적 조영의식이 유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K-창(석)-09는 석복헌에서 발견된 벽지들 중 유일하게 용 문양과 금박이 쓰인 것으로 고종재위 시절 운현궁의 것과 견줄만하다. 이는 대조전에서 거처하던 순종이 대조전의 화재로 1919-1921년 간 석복헌에 거처하게 되는데, K-창(석)-09이 그 시기를 반영하여 제작된 것임을 짐작케 한다.

이전 시기의 벽지들이 전체적으로 백색 안료를 입힌 바탕에 단일한 색의 문양을 찍어낸 것과 대조적으로 K-창(석)-09을 제외한 이 시기의 벽지들은 채색하지 않은 바탕 위에 백색과 청색 혹은 백색과 적색이 조합되어 하나의 모티브를 구성하는 예가 많다. 이로 인해 입체감이 부여되고 섬세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채색되지 않은 바탕면이 드러남으로써 소박함이 느껴진다. 이는 낙선재 일곽이 주로 여성의 공간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위계질서가 엄격한 조선시대의 규범이 반영된 결과로 해석된다. 특히 8엽의 국화를 모티브로 제작된 K-창(석)-02은 약간의 시기 차이를 두고 여러 차례 사용(K-창(석)-03, 08)되었으며, 동일한 벽지가 청주동헌에서도 발견되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그 사용이 궁궐에 제한되지 않고 조선의 관아에 두루 쓰이던 양식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Chang, 2013). 이에 반해 유일하게 용 문양과 금박이 쓰인 K-창(석)-09에는 왕의 공간으로서 최고의 존엄을 표현하는 종래의 전통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즉 벽지의 표현에 있어서도 사용자의 지위에 따라 개별성을 확고히 함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운현궁의 벽지가 이전의 화려함과 강한 대비를 이루는 것 역시 동일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시기의 벽지들이 지닌 패턴의 기하학적 특성을 분석한 결과 마름모꼴을 기본단위로 사선방향으로 반복되는 패턴유형이 많았다. 마름모의 중심점에 문양의 주제가 되는 중심 문양이 위치하며 네 귀퉁이에는 보조문양이 위치한다. 이 유형에 적용된 주요 모티브로 국화와 거북 문양이 있었으며, 보조문양은 정형화된 화엽문양이나 기하학적 돌림문양이었다. 작은 원형이나, 사각형, 직선의 반복으로 이루어진 장식사선이 마름모의 기본 틀을 구성하여 기하학적 특성이 두드러진다. 이처럼 마름모 형태로 전개되는 패턴형식을 전통적으로 능화문이라 한다.

5) 순종 승하 이후

순종 승하 이후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벽지는 창덕궁 석복헌과 경운궁 준명당의 것이 있다. 이 시기에 사용된 문양은 대부분 꽃을 표현한 식물문양으로 조선시대 왕실과 규방에서 두루 쓰여 온 길상문양의 전형과 구별되며, 서양의 것이 참조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왕의 지위를 상징하는 문양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도 특징적이다. 이를 통해 왕의 존재와 위상이 곧 왕실의 존엄과 위상을 결정하며, 이것이 왕실 벽지 조형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벽지들은 색채사용에 있어 더욱 다채로워지는 양상을 보인다. K-창(석)-10은 녹색, 적색, 백색의 선이 어우러져 문양을 이루고 있으며, K-경(준)-07은 백색과 황색, 녹색이 함께 사용되었다. 그러나 모티브의 표현에 있어서는 순종재위 시기에 비하여 추상성이 결여되고 구성이 치밀하지 못하다. 패턴의 기하학적 특성에 있어서는 석복헌의 것과 준명당의 것이 매우 다른 양상을 지니고 있다. 석복헌의 사례들은 (K-창(석)-10와 K-창(석)-11) 근대 유럽 벽지의 전형인 오지형에 가까운 모습이다. 분석 결과 석복헌의 오지형 패턴은 중심문양의 크기나 반복의 간격이 이전 시대의 전통적 능형패턴과 유사하였다. 단, 능형패턴의 경우 장식선이 직선인 반면 오지형의 것은 S 혹은 C형의 곡선을 이루며 연속되는 것이 특징이다. 낙선재의 경우 순종 승하 이후에도 윤황후가 기거하여 왕실의 마지막 생활공간으로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낙선재 일곽이 이 시기에 입식 공간으로 변모하였으나 전체적으로는 조선식 외형을 유지하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벽지의 조형에 있어서도 조선 전통의 양식에 서양풍이 가미되는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반면 고종 승하 이후 왕실 생활공간으로서의 기능을 잃고 일제 관리 하에서 공원화 사업이 추진되었던 경운궁의 사례에서는 (K-경(준)-07과 K-경(준)-08) 뚜렷한 기하학적 질서가 드러나는 이전의 전통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4. 3. 소결

전통적으로 왕실 벽지의 디자인은 사용자의 지위와 위계, 그리고 각 공간의 사용목적에 따라 결정되어왔으나, 근대기 왕과 왕실의 위상 변화로 인하여 그 규범의 절대성이 점차 느슨해지고, 외부문화의 수용에 유연해져 갔다. 이러한 경향이 근대 왕실 벽지 조형에도 반영됨으로써 사용자의 지위와 조영목적에 따라 상징성과 의미를 중심으로 선택되었던 문양의 주제는 점차 그 목적의식이 희미해졌고, 단색 중심으로 표현을 절제하였던 색채특성은 다채로워지는 경향을 살펴 볼 수 있었다. 또한 수직수평의 격자체계 속에서 반복되었던 정방형 패턴은 사선반복을 기본 체계로 하는 능형패턴으로, 나아가 오지형 패턴으로 변화하며 기하학적 특성이 감소되어 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


Figure 1 Changes in geometric rules of patterns of Korean royal wallpaper
5. 결론

조선말로부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까지는 왕실의 위상이 급변하던 시기로 그 위상변화에 따라 시대를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전통적 조선왕조가 계승되었던 조선말, 고종이 독립국가의 군주로써 황제를 선언한 대한제국기, 일본황실의 일원으로 지위가 격하되었으나 왕공족 신분으로 대내적 상징성이 유지되었던 일제강점 순종재위기, 왕실의 실존이 사라짐에 따라 구심력이 급격히 와해되는 순종승하 이후까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창덕궁, 운현궁, 경운궁은 이 시기 왕 또는 왕실 일가가 거주하였던 장소로써 각 시대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종합하면, 왕실이 존치되었던 일제강점기까지도 왕실 생활공간의 건축에는 조선식 궁궐 양식이 유지되었으며, 이에 따라 궁에만 허용되었던 상징적 요소들도 일관성 있게 유지되었다. 단, 순종 승하 이후부터는 조선식 외형에 서양식 건축양식과 실내장식 등이 가미되기 시작하였고, 점차 일제의 주도로 궁궐의 특성이 와해되어 갔다.

시대구분과 장소에 따라 벽지들을 분류, 분석한 결과 이러한 경향이 벽지 조형의 변화에서도 일관성 있게 나타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문양의 주제, 색채의 사용, 패턴의 기하학적 규칙의 측면에서 변화상을 살펴보면, 첫째, 용 문양, 길상문양과 같이 상징과 의미가 담긴 주제를 조형에 반영하는 조선시대의 전통이 순종 재위기까지 유지되었으나 순종 승하 이후의 문양들은 상징성과 추상성이 결여되는 경향을 보인다. 둘째, 전통적으로 왕실의 벽지는 청색과 백색 배색이 주를 이루며, 문양은 단색으로 표현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일제강점기부터 적색, 녹색 등이 가미되어 다채로워지는 경향을 보였으며, 문양의 표현에 있어서도 단일한 색이 아닌 복수의 색이 어우러져 구성되는 등의 변화가 확인되었다. 패턴의 기하학적 규칙에 있어서도 점진적인 변화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대한제국기 까지는 정방형과 사선방향의 능형 패턴이 공존하였으나 일제강점기부터는 능형 패턴이 주조를 이루었고, 순종 승하 이후에는 능형 패턴의 직선형 장식선이 곡선으로 변화한 오지형 패턴이 등장하게 된다. 아울러 왕실 생활공간으로서의 기능을 잃고 일제 관리 하에서 공원화 사업이 추진되었던 경운궁의 벽지에서는 이전 전통의 맥락이 단절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본 연구결과를 시대적 보편 양식으로 정의내리기에는 사료의 양이 부족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향후 추가로 사료들이 발굴된다면, 아카이브를 더욱 풍성하고 정교하게 발전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과들이 널리 활용되어 전통 실내공간의 재현은 물론 현대적 미감에 호소할 수 있는 한국적 실내디자인의 기획, 생산에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Acknowledgments

This work was supported by the Ministry of Education of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 (NRF-2016S1A5B5A07918612)

이 논문은 2016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16S1A5B5A07918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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