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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후반 · 1990년대 초반 국내 가전업체의 디자인 전략 연구 : 금성사와 대우전자를 중심으로
The Design Strategies of Korean Consumer Electronics Companies in the late 1980s and early 1990s: Goldstar and Daewoo Electronics
  • Haecheon Park : Department of Design, Dongyang University, Dongducheon, Korea
  • 박 해천 : 동양대학교 디자인학부, 동두천, 대한민국

연구배경 1980년대 후반, 국내 가전업체들은 3저 호황에 이은 임금인상과 시장개방의 위기 국면에서 경쟁력 강화를 위한 새로운 디자인 전략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디자인 조직 역시 소비 사회의 성숙기로 진입하던 내수시장의 급격한 성장에 큰 영향을 받으면서, 상품 개발 프로세스의 실질적인 변화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연구방법 본 연구는 『월간 디자인』과 주요 일간지의 기사와 인터뷰, 관련 저술과 논문 등을 검토하면서, 당시 국내 가전업체의 디자인 조직들이 행한 다양한 상품 개발의 시도를 재구성하면서, 사회경제적 맥락 속에서 그들이 시도한 전략의 내적 역학과 논리를 분석한다.

연구결과 내수시장의 성장과 분화는 시장 세분화 전략을 가능케 한 물적 토대였다. 디자인 조직들은 이 전략을 정교화 하는 과정에서 라이프스타일 연구를 기반으로 한국형 가전 개발에 나서거나, 기술의 인간적 활용에 주목해 하이터치 접근법을 발전시켰다.

결론 디자인 조직들은 라이프스타일 연구와 하이터치 접근법을 통해 마케팅 전문가와 엔지니어와 수평적 협업을 촉진하는 상품 개발 프로세스를 구축해나갔다. 여기에서 라이프스타일 연구의 '생활자' 개념은 디자이너로 하여금 일상생활의 문화적 차원을 주목하도록 이끌었고, 하이터치 접근법의 '사용자' 개념은 디지털 기술의 가능성을 탐문하도록 인도했다.

Abstract, Translated

Background In the late 1980s, South Korean consumer electronics companies began to prepare new design strategies to strengthen their competitiveness in the face of a crisis of wage hikes and market opening. At this time, design organizations in the companies also began to seek substantial changes in the product development process, influenced by the rapid growth of the domestic market which was entering the maturity stage of consumer society.

Methods In reviewing 『monthly design』, major daily newspapers, writings and papers, this study tries to reconstruct various attempts made by the design organizations and to analyze the inner dynamics and logic of their attempt's strategy in socioeconomic contexts.

Results The design organizations could implement market segmentation strategies thanks to the growth and differentiation of the domestic market. In the process of refinement of these strategies, they began developing Korean-style home appliances through lifestyle research and introduced a high-touch approach based on the human use of technology.

Conclusions Through lifestyle research and a high-touch approach, the design organizations had built product development processes that promote horizontal collaboration with marketing professionals and engineers. The concept of "living people" in lifestyle research led designers to recognize the cultural dimension of everyday life, while the concept of "user" in the high-touch approach led them to explore the possibilities of digital technology.

Keywords:
Design Strategy, Market Segmentation Strategy, Korean-Style Home Appliances, High-Touch Approach, Consumer Culture, 공공디자인, 공공디자인대상, 공공디자인문화포럼, 디자인문화.
pISSN: 1226-8046
eISSN: 2288-2987
Publisher: 한국디자인학회Publisher: Korean Society of Design Science
Received: 08 Aug, 2019
Revised: 19 Aug, 2019
Accepted: 19 Aug, 2019
Printed: 31, Aug, 2019
Volume: 32 Issue: 3
Page: 137 ~ 153
DOI: https://doi.org/10.15187/adr.2019.08.32.3.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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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nding Information ▼
Citation: Park, H. (2019). The Design Strategies of Korean Consumer Electronics Companies in the late 1980s and early 1990s: Goldstar and Daewoo Electronics. Archives of Design Research, 32(3), 137-153.

Copyright : This is an Open 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educational and non-commercial use,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1. 서론
1. 1. 연구 배경 및 목적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3저 현상으로 인한 수출 급증과 경제 호황은 국내 가전업체들에게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제공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정교한 예측에 따라 체계적으로 계획된 것이 아니라 세계 경제 체제의 전환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주어진 것이었다. 국내 가전업체들은 OEM 중심 수출전략과 일본 제품 모방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할 만큼 충분히 준비된 상태가 아니었다. 물론 성장 경로에 대한 고민은 이전에도 꾸준히 있어왔지만, 그렇다고 뚜렷한 해결 방안이 제시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국내 가전업체들에게 경쟁력 확보가 시급한 당면 과제로 부상한 것은 1989년 이후의 불황 국면이었다. 그 위기의 핵심에는 크게 두 가지 요인이 자리 잡고 있었다. 첫 번째 요인은 1987년 민주화 이행 이후 노동자 계층의 임금 인상이었다. OEM 중심 수출 전략에 집중하던 국내 가전업체들은 1989년을 전후로 저임금 기반의 가격 경쟁력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인식에 도달했다. 디자인계뿐만 아니라 산업계 일각에서 디자인을 통해 수출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이 등장한 것도 이 시점이었다. 연구개발을 통한 기술혁신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시간이 오래 걸릴 뿐더러 많은 투자가 필요하다고 지적하며 디자인의 차별화 전략이 당장의 경쟁력 확보를 위한 처방으로 효과적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두 번째 위기 요인은 1990년대 초반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에 따른 시장 개방이었다. 정부의 적극적인 전자산업 육성 시책의 보호 아래 국내 기업들이 독차지하던 내수시장에 지각 변동의 신호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국내 가전업체들은 해외시장의 경쟁에 나서야 할 뿐만 아니라, 수입 제품의 공세에 맞서 내수시장을 방어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었다. 한 언론은 우루과이 라운드를 특집으로 다룬 기획 기사에서 시장 개방으로 관세 장벽이 낮아질 경우 “일제 소니 제품이 국내 제품보다 더 싼 값에 폭발적으로 팔려나갈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특히 대만의 사례는 위기감을 증폭시켰다. 1986년 7월 시장 개방 이후, 대만의 국내 시장에서 일본 제품을 비롯한 수입 가전제품이 70%에 가까운 시장 점유율을 기록했기 때문이다(동아일보, 1990년 8월 27일).

그런데 임금 인상과 시장 개방, 이 두 요인은 위기를 불러올 뿐만 아니라 그 극복의 가능성도 내재하고 있었다. 1980년대 중반까지 국내 시장은 “계층간 소득 격차에 따른 소비계층의 제한성과 수출 위주로 경도된 소비 시장의 불완전성”(Baek, 2008)으로 인해 대량생산-대량소비의 자체적인 선순환 체제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당시 수출중심주의 관점에 선 전문가 상당수는 임금 인상이라는 변수를 수출 경쟁력을 약화시킬 생산 비용의 증가요인으로 인식했을 뿐, 구매력 향상을 통한 국내 소비의 증가요인으로서의 잠재력은 간과했다. 주지하다시피 상황은 그들의 진단과는 다르게 전개되었다. 실제로 산업 전반의 임금 인상은 계층 간 임금격차를 축소시켰고 내구 소비재와 개인 서비스 부문의 소비 지출 규모를 빠르게 증대시켰다. 국내 소비문화 역시 내수 시장의 폭발적인 성장세와 보조를 맞춰가면서 형성 단계에서 성숙 단계로 이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수시장의 성장은 국내 경제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의 약화로 이어졌다. 국내 총생산 대비 수출 비중은 3저 호황 시기에 30%대 이상을 기록했으나, 1989년 이후 1997년 IMF외환위기 직전까지 20% 중반 대를 유지했다(Baek, 2008). 이러한 경제 상황의 변화는 국내 가전업체들에게 새로운 성장 경로를 모색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본 연구는 위와 같은 맥락에서 당시 국내 가전업체의 디자인 전략을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기업의 디자인 조직들이 위기의 국면에서 내수시장의 급성장을 동력으로 삼아 어떠한 전략적 시도들을 실행에 옮겼는지 분석할 것이다. 1990년대 초반 ‘한국형 가전제품’의 개발로 이어지기도 했던 이러한 시도들은 실제로 국내 가전업체들이 디자인 조직의 역량 강화를 통해 OEM 중심 수출 전략과 일본 제품 모방에서 벗어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 2. 연구 방법 및 범위

본 연구는 문헌연구 중심으로 진행된다. 먼저 디자인 전문지 『월간 디자인』과 주요 일간지의 기사와 인터뷰, 그리고 관련 저술, 논문, 사사(社史)를 중심으로 1989년 이후 국내 가전업체 디자인 조직들의 움직임을 조망하면서 당시 사회 · 경제 · 문화적 맥락과의 관계 속에서 재구성하고자 한다. 특히 국내 가전업체들이 경쟁력 확보를 목표로 내걸고 새로운 상품 개발 프로세스를 실행에 옮기는 과정에서 기업 내부의 디자인 조직들은 어떻게 자신의 역할을 새롭게 정의하고 위상을 강화해 나갔는지, 어떤 방식으로 마케팅 부문, 기술 부문과 협력 관계를 조직화했는지, 그리고 이제 막 성숙기에 진입하고 있던 내수시장의 소비문화를 어떻게 해석해 상품 개발에 적용하려고 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본 연구는 1989년부터 1993년까지 5년 동안 국내 가전업체들이 상품 개발의 방법론으로 도입한 시장 세분화 전략, 라이프스타일 연구, 하이터치 접근법에 주목할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금성사(현 LG전자)와 대우전자를 중심으로 살펴보되, 가전 3사 중 하나였던 삼성전자는 부차적으로 다룰 터인데, 그 이유는 1993년 최고경영자의 “신경영” 도입 이전까지 디자인의 측면에서 시도한 변화의 움직임이 상대적으로 미약했기 때문이다.

2. 국내 가전업체의 상품 개발 전략과 디자인 조직
2. 1. 시장 세분화 전략: 혼수용 가전과 어린이용 전자제품

1980년대 중반의 3저 호황 국면에 국내 가전업체들은 혁신적인 신제품 개발보다는 기존 제품의 성능 개선과 품질 향상을 바탕으로 대형화·고성능화 전략에 주력했다. 대표적인 사례는 내수시장의 성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가전제품, 즉 컬러텔레비전, 냉장고, 세탁기였다. 실제로 이 제품군의 보급률은 급상승했다. 1980년 12월, 컬러 방송 개시와 함께 상승하던 컬러텔레비전의 보급률은 88올림픽을 거치면서 거의 100%대에 도달했고, 냉장고의 보급률은 1980년대 중반 이후 급격히 상승해 1990년에는 90%대를 넘어섰다. 세탁기는 1985년에 30%대 중반을 기록했으나 1990년에 접어들면서 70%대 중반을 넘어서는 급상승의 그래프를 그렸다. 이런 수치가 보여주듯이 이 시기에 가장 치열한 경쟁이 벌어진 품목은 냉장고와 세탁기였다. 실제로 가전업체들은 냉장고 시장의 선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서리 논쟁”, “절전 싸움”, “영하 1도 공간 논쟁” 등 치열한 홍보 경쟁을 벌였고, 1980년대 후반에는 냉장실의 공간 확장에 주력했다(동아일보, 1987년 5월 19일). 세탁기도 마찬가지였다. 1980년대 후반 이후 과열되기 시작한 경쟁은 삼성 히트세탁기와 금성 리듬세탁기 간의 2파전으로 전개되다가 1991년에 대우 공기방울세탁기가 출시되면서 3파전으로 확전되었다. 그 이후 세탁기 시장의 선두다툼은 세탁물 엉킴을 방지하고 세척력을 강화하기 위해 카오스 이론이나 유체 역학을 동원하는 기술력 경쟁 양상으로 번져나갔다(월간 디자인, 1993년 12월호).

기본적으로 가전업체들의 대형화 · 고성능화 전략은 구형 제품을 신형으로 대체하는 기존의 가전 보유 가구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고, 따라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거나 신규 수요를 발굴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미 고도성장기의 일본 가전업체들은 흑백텔레비전, 냉장고, 세탁기 등 “신종삼기 열풍”을 컬러텔레비전, 에어컨, 자가용 자동차 등 “3C 유행”으로 이어나가며 내수시장의 규모 확장을 성취한 바 있었다. 국내 가전업체들은 이런 흐름을 염두에 두고 에어컨과 VTR 등이 차세대 주력 제품군으로 주목했지만, 실제 성장세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런데 내수 시장의 성장세 속에서 젊은 중산층 주도의 시장이 새롭게 모습을 드러내자, 국내 가전업체들은 이전의 전략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장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신규 수요 창출을 위한 마케팅 중심의 시장 세분화 전략이 바로 그것이었다. 1980년대 후반에 출시된 가전 3사의 혼수용 가전제품 패키지는 이 전략을 통해 뚜렷한 성과를 거둔 사례 중 하나였다. 1989년, 금성사는 “가전제품의 토탈 패션”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베스트 콜렉션’ 시리즈를 내놓았고, 그 뒤를 이어 1990년에는 AV시스템만으로 구성된 ‘피앙새’ 시리즈를 출시했다. 이 시기에 삼성전자는 “신혼을 위한 흑과 백의 앙상블”이라는 주제로 12개의 가전제품을 세트로 구성한 ‘네오’ 시리즈를 내놓았고, 대우전자 역시 신혼부부 대상의 전담 마케팅팀을 구성해 ‘넥스트’ 시리즈를 출시했다(경향신문, 1991년 2월 27일). 이 패키지 가전들의 공통점은 신혼부부의 취향과 선호도에 초점을 맞춰 기존의 백색가전 이미지에서 탈피해 젊고 현대적인 감각의 디자인을 강조한다는 것이었다.

신혼부부와 함께 어린이층도 시장 세분화 전략의 대상으로 주목받았다. 금성사는 1989년 말에 노란색 위주의 깜찍한 디자인으로 4~7세 어린이 전용 전자제품 ‘도레미’ 시리즈'를 출시했는데, 이 시리즈는 카세트, 오르간, 보온도시락, 전동칫솔, 보온병, 빙수기, 카메라, 아이스크림 제조기 등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2년 후인 1991년에는 ‘럭비보이’ 시리즈'와 ‘유니트’ 시리즈를 출시했다. ‘럭비보이’ 시리즈는 미식 축구공의 타원형 모양을 본뜬 제품 디자인으로 카세트, 전자오르간, 전화기, 무전기, 보온도시락, 카메라, 체중계 10여 종 제품의 시리즈였고, ‘유니트(Unit)’ 시리즈는 전자회로 판을 중심으로 부품을 기능별로 조립해 특정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교육용 제품이었다. 삼성전자도 1990년에 6~10세 어린이를 대상으로 다섯 종류의 카세트 ‘제이제이(JJ)’ 시리즈를 출시했다. 기획 단계에서 어린이들이 선호하는 모양, 동물, 색상, 소리 등을 조사했고 그 결과를 토대로 악어 모양과 오토바이 형태의 빨강색 카세트를 디자인한 것이었다(월간 디자인, 1990년 7월호).


Figure 1 Doremi series, Goldstar (1989)

위에서 살펴본 혼수용 가전과 어린이용 전자제품의 사례는 확실히 당시 제각각 상이한 속도로 부상 중이던 중산층 내부의 특정 집단을 소비자로 상정하고 있었다. 먼저 혼수용 가전제품 패키지를 살펴보자. 그것은 1960년대 초반 생 신혼부부의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와 밀접하게 연관된 것이었다. 이 세대는 1969년 중학교 입시 폐지, 1973년 이후 단계적인 고등학교 평준화 조치, 1981년 대학졸업정원제 실시 등, 교육열과 맞물린 교육 제도의 변화로 인해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 진학률의 대폭 상승을 경험했다. 이러한 교육 기간의 연장은 이 세대의 노동 시장 진입 시점을 늦췄고, 결혼과 출산 연령 역시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들은 산업화와 함께 성장하면서 교육, 취업, 결혼, 출산 등에 있어 이전 세대와는 구조적으로 전혀 다른 표준화된 생애 과정을 밟아가고 있었던 것이다(Moon, 2010).

흥미롭게도 이 세대의 대학졸업자들이 결혼을 준비하는 시점인 1980년대 중반부터 대리점을 중심으로 컬러텔레비전, 냉장고, 세탁기 등 가전제품을 세트로 구성해 혼수용품으로 판촉에 나섰고, 1987년 전후로는 서울의 유명 백화점들 역시 결혼 시즌이면 다양한 이벤트를 열어 혼수용 가전제품의 판매경쟁에 뛰어들었다. 이전까지 침구류나 보석류, 한복, 가구나 주방용품에 국한되었던 혼수용품의 범위가 가전제품으로 확대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부모 세대가 자산 증여를 통해 결혼한 자녀의 주거 문제를 해결해주는 문화가 1930년대 생 중산층 부모들을 중심으로 확산되는 과정과 맞물려 있었다. 물론 이런 유형의 증여는 특정 계층에게 그리 낯선 일은 아니었다. 실제로 중상류층 부모들은 결혼한 자녀에게 중형 혹은 소형 평형대의 아파트를 사주곤 했다(동아일보, 1987년 4월 9일). 그런데 당시 아파트를 중심으로 확산되던 전세 제도는 중산층 부모들에게까지 이런 유형의 자산 증여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우회로를 열어주었다. 1931년생인 소설가 박완서는 자기 또래의 중산층이 “거의 결혼과 동시에 아들 며느리를 분가시켰다”면서, “몇 달 데리고 살다가 분가시킨 경우보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즉시 미리 마련해준 전세 아파트나 전세방으로 들여보낸 경우가 더 많”았다고 지적한 바 있다(Park, 2015).

결과적으로 1980년대 후반, 1960년대 초반 생의 중산층 출신 신혼부부 상당수는 이전 세대와는 달리, 부모가 증여해준 자금으로 결혼 초기 주거 문제를 해결했고, 그에 따라 혼수의 범위 역시 가전제품으로 확대할 수 있었다. 1989년 혼수용 가전제품 시장의 규모는 약 4,500억 원 규모였으나, 3년 후인 1992년에는 7,200억 원 규모로 성장했고, 이는 당해 가전제품 전체 시장 규모인 5조 3,000억 원의 13%에 해당하는 것이었다(Kang, 2006). 매년 35~40만 쌍에 달하는 신혼부부의 규모, 그리고 그들 일부의 소득 상승과 자산 증여는 혼수용 가전 시장의 성장을 추동한 핵심 요인이었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었다. 1989년 이후 노태우 정권이 추진된 수도권 신도시 개발과 주택 200만호 건설 역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당시 신혼부부들은 이전 세대에 비해 더 더디게 결혼했지만, 결혼 후에는 이전 세대에 비해 더 빨리 아파트에 거주하거나 ‘내 집 마련’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고, 이전 세대에 비해 더 넓은 주거 공간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 세대의 혼수 시장은 가전업체 입장에서는 시장 세분화 전략을 실행하는데 최적의 시장이었다. 실제로 가전업체들은 형태, 색상, 재질 같은 디자인 요소의 차별화를 통해 혼수용 제품에 '토털 디자인' 콘셉트를 적용해볼 수 있었고, 비록 초보적인 형태이긴 하지만 브랜드 아이덴티티 구축도 시도해볼 수 있었다.

한편, 어린이용 전자제품은 소니의 ‘마이 퍼스트 소니(My First Sony)’나 산요의 ‘로보(Robo)’ 시리즈와 같은 일본 제품의 영향권 아래 놓여 있으면서, 자녀 교육의 책임을 부여받은 젊은 중산층 가정주부라는 소비자 집단의 등장과도 밀접하게 연관된 것이었다. 실제로 1980년대 후반 이후, 1980년 전후에 태어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학습 교육 프로그램이 본격적으로 개발되었고, 공문수학 눈높이 학습, 웅진 아이큐 등 컴퓨터 활용 학습법 역시 대중화되었다. 기존의 지능 개발 장난감이나 영어공부 그림책을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1987년 과외 금지 정책 폐지와 함께, 사교육 시장 역시 급격히 팽창해, 1985년과 1990년 사이 미취학 아동 대상의 사교육비는 192%, 초등학생은 151% 증가했다. 이러한 변화는 당시 구매력을 갖춘 1950년대 생 중산층 가정주부를 대상으로 교육의 상품화가 빠르게 진행된 결과였다. 이에 따라 “올바른 교육상품의 선택을 통한 자녀의 학습 지도는 엄마의 일로 굳어져가고 있”었다(Kim, Oh, & Shin, 1992). 어린이용 전자제품은 바로 이 엄마들을 구매자로 상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출시 이후 시장의 반응은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어린 자녀를 위해 고가의 전자제품을 구입할 정도의 경제력을 갖춘 부모는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이다. 『월간 디자인』의 한 기사에 따르면, 실제로 서울 시내 대리점 대상의 조사 결과 어린이용 전자제품의 판매는 강북보다는 강남에 집중되었다(월간 디자인, 1990년 7월호). 소니와 산요의 어린이용 전자제품의 출시 시기였던 1980년대 후반의 일본 경제 상황과 비교해보면 그 이유는 보다 명확해진다. 이를테면 산요의 ‘로보’ 시리즈는 사내 오디오 사업부 디자이너가 자녀에게 좋은 장난감을 선물해주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에서 시작된 프로젝트였다. 여성 디자이너들을 중심으로 진행된 이 프로젝트는 유아 심리학과 라이프스타일 연구를 근간으로, 어릴 때부터 다양한 전자제품에 노출되어 다양한 물건들에 강한 호기심을 보이는 유아들의 태도, 그리고 경제적 여유를 바탕으로 자녀에게 과감하게 투자하면서 인생을 즐기고자 하는 젊은 부모들의 라이프스타일에 주목했다(월간 디자인, 1992년 6월호). 그러니까 일본의 어린이용 전자제품은 일본의 버블 경제가 국민소득 2만 5천불을 넘어서 마지막 정점을 찍던 부동산 대폭락 직전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제 막 국민소득 5천불을 넘어선 당시 국내의 상황에서는 어린이용 전자제품은 너무 이른 시기에 당도한 신제품이었다. 모방에도 시차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시장에서 희비가 엇갈리긴 했지만, 시장 세분화 전략은 디자인에 대한 실무 디자이너들의 관점을 변화시키기도 했다. 1984년, 한국디자인포장센터의 실무 디자이너 대상 교육에서 당시 금성사 디자인종합연구소 부장이던 김철호는 디자이너가 상품 개발에서 주안점을 두어야 하는 것은 디자인의 시각적 표현을 통해 소비자의 구매욕을 자극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었다(월간 디자인, 1985년 1월호). 하지만 1988년에 이르면 김철호의 관점은 완전히 달라진다. 그는 디자인종합연구소의 소장으로서 기업의 디자인 조직에게 마케팅 중심의 시장 세분화 전략은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왜냐면 시장 세분화를 통해 제품 차별화가 가능해지며, 제품 차별화 덕분에 디자인의 다양화가 가속화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시장 세분화 전략은 기업의 디자인 조직이 신제품 개발을 통해 신규 수요를 창출하는데 있어서 매우 유용한 방법이자, “외관 치장과 스타일링 위주의 틀”에서 벗어나 한 단계 도약을 시도할 수 있는 기회로 간주되었다. 그 도약이란 “과거 엔지니어링의 종속적인 역할”에서 탈피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상품 개발 과정에서 “기술 부문과 마케팅 부문을 상호 연계하는 조정과 융합의 역할”로 나가는 것이었다. 김철호가 밝히듯이 이 과정에서 참조대상은 당시 세계 시장을 석권하고 있던 일본 기업의 디자인 성공 사례들이었다(월간 디자인, 1988년 3월호).

2. 2. 소비자 라이프스타일 연구: LSR 연구실과 생활자 개념, 한국형 가전

시장 세분화 전략이 특정 소비자 집단의 성장을 발판으로 삼아 상품 개발의 새로운 활로로 기능했다면, 이후에는 라이프스타일 연구가 그 바통을 이어받아 상품 개발의 체계적 방법으로 조직화되기 시작했다. 금성사가 1989년에 맥킨지 사의 자문을 거쳐 “21세기 비전 계획”을 발표한 것이 출발점이었다. “고객을 위한 가치 창조”와 “인간 존중의 경영”을 그룹의 경영 이념으로 확정한 이 계획에 따르면, 가전사업 문화 단위에 속한 금성사는 “청년 · 주부 시장 집중 소구를 통한 상품 이미지 재구축”과 “고객 이해 · 상품 기획력 향상을 통한 상품 개발력 향상” 등을 전략 과제로 설정했다. 전자의 과제는 시장 세분화 전략과, 후자의 과제는 라이프스타일 연구와 결부된 것이었다.

당시 금성사의 이헌조 사장은 기업은 제품의 품질 향상 이외에도 “사회의 문화적인 수준을 높이려는 노력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면서, “물질적으로 꽤 풍요한 생활을 누리는 만큼 문화적 수준에 있어서도 뭔가 돌파구를 찾아야 할 텐데 그게 그리 쉽지가 않다”고 토로한 바 있었다. 또한 저임금에 기반을 둔 양적 성장기의 상품 개발 방식과 관련해 “부가가치가 높은 고급 제품이라야 고객의 니즈가 무엇인지 신경 쓰기 마련인데, 싼 가격으로 팔다보니 고객에 대한 관념이 전혀 없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Lee, 2004). 그가 보기에 “선진국과의 기술 격차를 상쇄시키기 위한 방편 중 하나”는 제품의 부가 가치를 높이기 위한 “마케팅에 의한 제품 개발”이었고 그 성공 여부는 “디자인 분야의 육성”에 달려있는 것이었다(월간 디자인, 1991년 1월호). 1932년생이었던 그는 1958년에 “국내 전자업계의 영업과장 1호인 금성사 판매과장”으로 출발해 1989년에는 전문 경영인으로 사장직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었다(신동아, 2006년 11월호).

1989년 8월에 이헌조 사장 주도로 설립된 라이프소프트리서치 연구실(이하 LSR 연구실)은 신제품 기획의 출발점을 일상의 문화적 차원으로 설정해 상품 개발 역량을 혁신하려는 시도였다. 또한 금성사가 중앙연구소를 중심으로 기존의 연구개발 조직을 확대 재편하는 과정에서 전문성 확보를 위해 상품 개발과 기술 개발을 분리한 결과이기도 했다(Park, 1996). 금성사의 표현을 빌리자면, LSR 연구실의 역할은 “마케팅이 주도하고 디자인이 중심이 되”어 “고객 밀착형 소비자 리서치“를 진행해, 일상에 감춰진 고객의 잠재 욕구를 발견하고 이를 바탕으로 독창적인 신제품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대리점과 백화점의 영업사원 인터뷰, 소비자 모니터링 제도를 통한 불만 청취, 선도기업과 경쟁사 분석 등 기존의 정보 수집 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했다. 이를 위해 LSR 연구실은 초기 분화 과정을 거쳐 1992년 전후로 4개 팀으로 체계적인 진용을 갖추었다. 실제 생활 연구를 통해 소비자의 필요와 요구를 파악하는 여성기획팀, 표본 여론조사 방식으로 소비자 생활 패턴을 조사하는 생활조사팀, 아이디어의 기술적 타당성을 검토하고 신상품 콘셉트를 기획하는 상품추진팀, 중장기적 상품 기획을 담당하는 상품제안팀이 그것이었다(매일경제신문, 1992년 4월 24일).

당시 LSR 연구실 부장이었던 1949년생 김성택은 ‘생활자(生活者)’ 개념을 제안했는데, 그것은 라이프스타일 연구의 기본 프레임을 구축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개념이었다. 그는 1976년 이후 약 10년 동안 일본 소니에서 VTR, 워크맨, 자동차 CD 플레이어 등의 상품 기획에 참여한 경험을 바탕으로, 상품 개발 과정에서 소비자의 개념을 '생활자'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생활자’는 원래 1980년대 중반 일본의 마케팅 전문가들이 내놓은 개념이었다. 김성택에 따르면, 소비자가 다양한 동기와 필요에 따라 합리적 판단을 통해 상품을 구매하는 시장의 행위 주체인 반면, 생활자는 “스스로의 생활 설계에 따라 의식적으로 다수의 제품을 상호 관련시켜 구성하며, 주체적으로 하나의 라이프스타일을 형성·연출하는” 일상의 행위 주체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라이프스타일은 생활자가 일상적인 과제의 해결 과정에서 활용하는 패턴화된 체계로서, 가치관, 생활양식, 행동양식, 이렇게 세 가지 차원으로 구성된다. 따라서 라이프스타일 연구는 상품 개발을 위한 정보 수집의 측면에서 이 세 가지 차원에 접근해야 하며, “모든 현상을 TPO(시간, 장소, 경우)에 따라 이해”해야 한다(월간 디자인, 1991년 10월호).

한편, LSR 연구실 중 1991년에 조직된 여성기획팀은 독특한 활동 방식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 팀이 여성 직원만으로 운영된다는 것이 일차적인 관심의 대상이었다. 구성 인원은 사내 지원자를 선발해 4명에서 9명까지 유동적이었으며, 디자인종합연구소에서 여성 디자이너가 파견되기도 했다(경향신문, 1991년 7월 24일; 매일경제신문, 1993년 7월 14일). 물론 여성 직원만으로 구성된 상품기획팀이 이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87년, 대우전자 역시 경영진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디자인 부서와 상품기획 관련 부서의 여성 직원들로만 구성된 프로젝트 팀을 운영한 바 있었다. 이 팀이 제안한 신제품 아이디어 대부분은 실제 상품화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1955년생 여성 디자이너, 송복희 과장을 책임자로 프로젝트를 수행했다(월간 디자인, 1988년 2월호). 이 팀과 유사하게 LSR 연구실의 여성기획팀 역시 가전제품의 실제 사용자인 여성의 시선으로 신제품을 기획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큰 차이도 있었다. 무엇보다 여성기획팀은 가정주부의 일상생활을 실제 공간에서 시뮬레이션함으로써, 라이프스타일 연구의 체계적인 프레임 안에서 그들의 필요와 요구에 접근하려고 했다. 강남구 청담동에 위치한 1백 10평 규모의 ‘필드 테스팅 오피스(field testing office)’가 생활자의 시뮬레이션을 위한 공간이었다. 그곳은 일반 아파트와 유사한 구조로 안방, 작은방, 거실, 주방, 서재가 꾸며져 있었고, 50여 종에 이르는 각종 전자 제품이 구비되어 있었다. 한 신문기사는 일반 사무실과는 극히 대조적인 사무실에서 일하는 여성기획팀의 일과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오전에 신문이나 잡지에 실린 신상품 관련 정보를 수집 정리하고 오후에는 새로 나온 가전제품을 사용설명서대로 직접 써보며 불편 사항이나 개선점을 궁리”한다. 때에 따라 “인근 주택가의 주부들을 초청 혹은 방문해 제품 품평을 청취하기도 한다.”(매일경제신문, 1992년 4월 24일)

LSR 연구실 소속 여성기획팀의 활동이 보여주듯이 라이프스타일 연구는 확실히 이전과는 다른 접근법을 동원해 ‘생활자’의 일상생활에 주목하면서 시장 세분화 전략을 좀 더 정교한 형태로 발전시켜 나갔다. 기존의 시장세분화 전략이 내수시장에서 두각을 보이는 특정 소비자 집단의 구매 패턴에 주목해 그들의 기호나 취향, 선호도를 추론하고 이를 형태, 색채, 재질 등 디자인 요소로 번역하려고 했던 반면, 라이프스타일 연구 역시 특정 소비자 집단에 주목하되 그 집단이 일상 환경에서 가전제품을 직접 사용하는 방식을 관찰하고 그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제품의 기능과 외형, 그리고 제품들의 관계를 재정의하려고 시도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금성사의 상품 개발 전략이 LSR 연구실을 경유해 시장세분화 전략에서 라이프스타일 연구로 이어지는 가운데, ‘한국형 가전제품’의 개발이라는 새로운 단계에 도달했다는 점이다. 이는 일차적으로 시장 개방 압력에 대한 내수시장의 방어에 골몰하던 가전업체의 판단에 근거한 것이기도 했다. 즉 한국인의 생활상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는 국내 가전업체가 외국 기업이 고려하지 못하는 한국인의 일상생활에 내재된 문화적 특성을 제품의 기능과 외형에 반영함으로써 내수시장에서 차별성을 부각해 경쟁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Figure 2 Water-duster vacuum Cleaner, Goldstar (1991)

금성사가 주도한 한국형 가전 개발의 첫 시발점은 1988년에 시판된 ‘한국형 전자레인지 원터치’였으나, 실제로 라이프스타일 연구와 결합된 첫 성과물은 1991년에 발표된 ‘물걸레 진공청소기’였다. ‘한국형 전자레인지 원터치’는 “딱 한 번만 눌러주면 어떤 요리든 척척”이라는 광고 문구가 강조하는 것과 같이, 제품 하단부 컨트롤 부분의 버튼에 "데우기, 데치기, 볶음, 밥 짓기, 해동, 불고기, 생선구이, 통닭구이 등" 한국 음식의 조리법 명칭을 부여해 사용자가 복잡한 기능 선택의 고민 없이 버튼 하나만 눌러 음식을 조리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물걸레 진공청소기’는 이보다 한 단계 높은 수준에서 소비자의 주거환경을 고려한 한국형 가전의 모습을 선보였다. 1980년대 이후 아파트가 도시 중산층의 주거 모델로 확산되고 있었지만, 소비자 상당수는 아직 좌식 생활에 익숙한 상태였고, 집안을 청소할 때 빗자루로 쓸고 걸레로 바닥을 닦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물걸레 청소기는 이런 상황을 반영해 탈착이 가능한 걸레를 청소기 흡입구 옆에 장착함으로써 한 번에 쓸기와 닦기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Oh, 2015).

금성사가 1993년 1월에 출시한 ‘김장독 냉장고’는 차세대 표준이 될 만한 상품 개발 프로세스와 조직 형태를 선보인 한국형 가전의 정점이기도 했다. 먼저 프로세스를 살펴보자. 상품 개발의 첫 단계는 LSR 연구실 주도로 진행되었다. LSR 연구실은 주부들을 대상으로 아파트 중심의 주거 문화 확산과 한국인 특유의 식생활을 조사해 한국형 냉장고에 대한 잠재 수요를 확인하고, 그룹 심층 인터뷰를 통해 주부들의 김치 담그는 과정과 보관 · 숙성 방법도 철저하게 분석했다. 이와 함께 상품 개발팀은 대학과의 김치 관련 산학 프로젝트도 진행해 김치 맛의 비결과 관련된 과학적 지식을 수집했고, LSR 연구실의 조사 · 분석 내용과 종합해 신제품 콘셉트를 도출했다. “계절에 관계없이 한겨울 김장김치 맛을 실현할 수 있는 냉장고”가 그것이었다(Cho, Seo, & Hwang, 1995).


Figure 3,4 corporate advertisements, Goldstar (1992,1993)

또한 이 상품 개발팀은 1991년 7월에 활동을 개시하면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조직 형태로 운영되었다. 상품기획부, 기술부서, 마케팅부서, 디자인부서에서 각각 1명씩 참가하고 설계실의 선임 연구원이 실무팀장을 맡았다. 상품 개발 프로세스 역시 팀 구성원 모두가 수평적인 관계를 맺으며 신제품 콘셉트 도출부터 기술 설계와 제품 디자인까지 함께 참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는 기존의 프로세스와는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었다. 이전까지 신제품 콘셉트 정의는 마케팅 전문가의 담당이었고 엔지니어와 디자이너는 그 콘셉트를 이어받아 과업을 진행하는 식이었다. 디자인은 마케팅 우위의 수직적 프로세스에서 마지막 단계에 놓여 있었다(Cho, Seo, & Hwang, 1995). 앞서 살펴보았듯이, 김철호 소장은 디자인 조직의 목표가 상품 개발 과정에서 “기술 부문과 마케팅 부문을 상호 연계하는 조정과 융합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었다. 출시와 함께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둔 김장독 냉장고의 개발 과정은 그 목표가 일정 정도 성취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편, 한국형 가전 개발의 흐름은 금성사에만 머무르지 않고 가전업계 전반으로 확산되었다. 대우전자는 1990년부터 여직원만으로 구성된 상품평가연구팀을 운영하면서, ‘한국형 가전’이라는 명칭으로 초간편 VTR, 공기방울 세탁기, 저소음 청소기 등을 출시했고, 삼성전자도 1992년 서울 서초구에 생활문화연구센터를 설립하고 스팀 압력 전자레인지, 삶는 세탁기, 찬장형 식기건조기 등을 출시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할 점은 한국형 가전 개발 경쟁이 압축적 근대화가 빚어낸 역사적으로 특수한 조건의 산물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당시 가전제품 시장의 주축이 되는 소비자 집단은 전근대적 농경문화에서 성장기를 보내고 도시로 이주해 산업화의 현장에서 실무를 담당한 1940 · 50년대 생들이었다. 아파트와 같은 대도시의 주거 공간을 중심으로 일상생활의 현대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지만, 이들에게 습속의 일부로 내면화된 전통적인 생활양식은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한국형 가전이 상정한 주요 소비자층은 바로 이들이었다. 현대적 주거공간과 전통적 생활양식의 불일치가 바로 한국형 가전이 개입하고자 했던 문제적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런 연유로 한국형 가전의 미래는 김장독 냉장고 등 일부를 제외하곤 그리 밝지 않았다. 실제로 도시의 아파트에서 자라난 신세대의 구성원들이 1990년대 중후반 이후 국민소득 1만 불 돌파와 함께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선보이면서 신규 시장의 창출 능력을 갖춘 소비자 집단으로 등장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소득 수준의 향상과 내수시장의 성장은 소비문화의 구조변동을 유도해낼 뿐만 아니라, 주요 소비자 집단의 세대교체 가능성 역시 내재하고 있었다. 따라서 의식주와 관련된 전통적인 생활양식 상당 부분은 새로운 세대의 출현과 잔여적인 양상으로 부침을 거듭할 가능성이 높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한국형 가전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금성사 LSR 연구실을 비롯한 국내 라이프스타일 연구 조직들은 일본 기업의 상품 개발 부서들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았다. 1977년에 설립된 소니의 PP센터나 1985년에 설립된 샤프의 생활소프트센터가 대표적이었다. 다만 1980년대 일본 기업의 관련 조직이 “디자이너는 시장의 창조자”라는 발상에 근간을 두고 디자인 주도로 신제품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반면, 국내 기업은 내수시장의 소비문화가 이제 막 성숙기에 진입한 상태라서 아직 그와 같은 수준에 도달하기에는 아직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라이프스타일 연구를 통해 등장한 한국형 가전은 기업 내 디자인 조직의 역할을 강화하고 위상을 높이는데 중요한 기회를 제공했다. 물론 한국형 가전의 개발이 당시 "업계가 겪고 있는 불황을 근본적으로 타개할 수 있는 수습책이 못되며 보다 근원적으로 치유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의견"도 있었지만(월간 디자인, 1992년 12월호), 실제로 금성사의 김장독 냉장고 사례가 보여주듯이, 디자인 조직은 상품기획 단계부터 마케팅부서와 기술부서와 수평적인 협업 관계를 맺으며 그들의 파트너로 신제품 개발에 참여할 수 있었다. 또한 기업 내 디자이너들은 이러한 경험의 축적을 통해 시각적 표현이나 스타일링의 전문가라는 역할에 자족해서는 안 되며, 인접 분야의 지식과 정보를 습득해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과 공통의 언어로 의사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었다. 한국형 가전 개발은 비록 과도기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지만, 이후 상품 개발 프로세스가 디자인 주도의 형태로 변모하는 데 있어서 일종의 진입로 구실을 했던 것이다.

2. 3. ‘테크노피아’에서 ‘하이터치’로: 기술의 인간 중심적 활용

1980년대 중반 이후, 금성사와 삼성전자는 각각 자사가 보유한 기술력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기업 이미지 광고를 시작했다. 금성사는 1985년부터 “테크노피아-인간과 기술의 만남”이라는 카피 문구를 내걸고 컴퓨터 그래픽을 활용한 미래주의적 광고를 신문과 텔레비전을 내보냈고, 삼성전자는 그보다 1년 늦게 “휴먼테크-인간과 호흡하는 기술”이라는 카피 문고를 내세워 금성과 유사한 광고 캠페인에 뛰어들었다. 이 광고 캠페인들은 컴퓨터와 반도체로 표상되는 디지털 기술의 구체적인 미래를 제시하며 기업의 비전을 보여주는 방식이라기보다는 당시 대중에게 낯설었던 컴퓨터 그래픽스의 시각 효과를 극대화해 기술적 이미지의 화려함과 새로움에 주목을 집중시키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그럼에도 주목해야할 대목은 이 광고의 이미지들이 “한국 전자제품 시장에서 기술 발전의 유토피아적 전망을 선전하는 데 있어서 인본주의적 가치”를 강조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김한상(Kim, 2015)의 지적대로, 1980년대 중후반의 시점은 국내 가전업체들이 “기술 위주의 슬로건 싸움에서 벗어나 인간과 기술의 조화를 강조”하는 이미지 경쟁을 시작한 전환기였다. 그리고 바로 이 시점에 디자인을 “인간과 호흡하는 기술”의 일부로 인식하려는 움직임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Figure 5 'Technopia' advertisement, Goldstar (1986)

‘하이터치’는 이 과정에서 등장한 개념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이 개념은 본래 미국의 미래학자 존 나이스비트(John Naisbitt)가 1982년 저술 『메가트렌드(Megatrends)』에서 제안한 10가지 메가트렌드 중 하나로, “기계 위주의 단순 기술에서 인간 중심의 첨단 기술”로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 개념이었다. 기업 경영진, 마케팅 전문가, 디자이너 등은 한국의 상황에 맞춰 이 개념을 전유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했다. 가전 부문에서 첫 포문을 연 것은 1989년 금성사의 텔레비전 광고였다. 금성사는 ‘미라클 a 텔레비전’의 광고를 통해 영화관에서나 감상할 수 있었던 슈퍼 입체 음향 시스템을 탑재한 해당 제품이 하이터치 개념의 적용을 통한 “TV의 진화”라고 홍보했다. 극장식 서라운드 효과와 라이브 스테이지 서라운드 효과로 입체 음향을 즐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레탄 신소재와 벨벳 칼라”, “첨단 인테리어 감각의 TV 받침대”, “평면 사각 브라운관”, “컨트롤 부위의 하이-클린 터치” 등을 통해 하이터치 디자인을 실현했다는 것이다. 금성사는 이 광고를 통해 ‘하이터치’가 “각종 하이테크 제품의 세계적인 추세인 인간공학적 사상을 바탕으로 기술적인 첨단화에서 더 나아가 사용자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설계 · 디자인된 미래형 첨단 제품”을 의미한다고 소개했다. 첨단 기술과 인간을 매개하는 방법이자 그 산물이라는 것이었다.


Figure 6 'Kobo' computer, Daewoo electronics (1990)

대우전자 역시 1990년에 유아용 컴퓨터 ‘코보’, 만능 리모컨, 노인용·청소년용 전화기 등 신제품을 발표하면서 상품 개발의 새로운 방법론으로 하이터치 개념을 소개했다. 당시 대우전자의 1935년생 김용원 사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하이터치 개념 도입의 현실적인 이유를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동아일보, 1989년 8월 28일), 첨단 기술개발에 바탕을 둔 하이테크 제품이 “연구개발의 투자규모가 방대하고 많은 연구 인력이 필요”한 반면, 하이터치 제품은 소비자의 필요에 대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기존의 기술을 활용한 결과물이기 때문에 개발 투자 부담이 그리 크지 않다. 하이테크 제품이 기술 혁신의 성과인 반면, 하이터치 제품은 소비자의 잠재 욕구 충족을 강조하는 수요 추적의 결과물이라는 것이었다.

대우전자가 하이터치 접근법을 상품 개발 방법론으로 도입한 것은 1988년이었다. 경영진에게 이 접근법의 도입을 제안했던 서울대학교 산업공학과 이면우 교수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45년생이었던 그는 서울대 산하 공학연구소 연구원 15명과 대우전자 상품기획, 엔지니어링, 디자인 부문 사원 10명 등 총 25명으로 하이터치 팀을 구성해 상품 개발을 진행했다(Lee, 2004, 1992). 상품기획 전문가는 소비자 성향 연구를 담당하고, 엔지니어는 제품의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고, 디자이너는 디자인과 함께 제품 경쟁력을 소구하는 역할을 맡았다. 먼저 하이터치 팀의 상품 개발 프로세스는 요인 분석 매트릭스 작성에서 출발했다. 이 매트릭스에서 x축은 제품 요인, y축은 인간 요인으로 설정하고 그 요인을 각각 500개씩 분류하고 각각의 축 위에 배열한다. 인간 요인은 체력, 한계 기능 등으로, 제품 요인은 오디오, 비주얼 기능, 재질, 컬러등과 같은 세부 항목으로 분류되었다. 이면우 교수에 따르면, 이 요인들을 교차시키면 총 25만 개의 속성이 도출되는데 이 속성 중 일부를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시킨 후, 그 결과를 신제품에 대한 아이디어로 발전시켰다. 하이터치 팀은 이런 과정을 거쳐 신제품 콘셉트를 제시했고, 대우전자 본사는 이에 대한 사업성 검토 작업을 진행했다.

흥미롭게도 이면우 교수는 아이디어의 적절성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일본 업체와의 경쟁 가능성 여부를 활용했다. 요인 분석 매트릭스에서 제품 요인과 인간 요인을 교차시킨 xy 좌표 상의 속성을 신제품 콘셉트로 전환하는데 있어서 일본 제품보다 장점이 있으면 태극기를, 그렇지 못하면 일장기를 좌표 위에 부착하는 식이었다. 그는 이런 접근을 통해 일본 제품이 아직 점유하지 못한 시장의 빈 공간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다. 당시 국내 가전업체들은 기껏해야 해외 시장의 저소득층 소비자를 상대하고 있었고, 한국산 제품에 대한 해외 소비자의 최대 찬사란 고작해야 “얼핏 보니 일본제품 같다”는 것 정도였다. 그의 진단에 따르면, 미국 기업의 기술 개발 역량, 그리고 일본 기업의 디자인 역량은 도저히 따라 잡을 수 없는 대상이었다. 따라서 미국이나 일본의 제품이 선점한 시장에서 정면승부를 벌이는 것은 무모한 짓이나 다름없었다. 이를테면 매트릭스 상에서 인간의 시각 기능과 텔레비전의 디스플레이가 만나는 xy 좌표는 이미 소니의 ‘트리니트론’이 차지하고 있어서 국내 기업이 승부를 걸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식이었다. 이면우 교수가 제품 디자인의 뱡향에 있어서 일본 제품이 보여주는 “경박단소의 미학”을 포기하고 “한국 특유의 여유와 투박한 멋”을 추구했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그가 보기에 중저가 시장에서 치열한 가격 경쟁을 벌이는 것보다는 독특한 기능과 색다른 디자인의 신제품 개발로 선도기업과의 직접적인 경쟁을 우회하면서 주인 없는 미래 시장을 개척하는 것이 훨씬 성공 가능성이 높은 합리적 전략이었다(월간 디자인, 1992년 4월; 1993년 10월호).

이면우 교수의 하이터치 팀은 2년의 연구기간 동안 이런 방식의 상품 개발로 총 1,500여 개의 신제품 아이디어를 제안했고 180여 개의 특허를 취득했으며 20여 개의 시제품을 내놓았다. 시청자의 자세에 따라 화면이 움직이는 인공지능 TV, 라디오 방송을 재생해주는 타임머신 기능의 하루방 오디오 세트, 팔목 자세를 고려해 설계된 인간공학 키보드, 운전자의 몸 치수대로 자동 조절되는 자동차 운전석 의자, 리모컨으로 염도와 당도를 측정하는 에디쿠커, 사물놀이에서 착상한 타악기 제품 등이 그 시제품이었다. 그리고 이 중 5개의 제품, 앞서 언급했듯이 유아용 컴퓨터 ‘코보’, 만능 리모컨, 노인용·청소년용 전화기 등이 상품화되었는데(월간 디자인, 1992년 4월호), 이중 가장 큰 주목을 받은 것은 유아용 컴퓨터 ‘코보’였다. 이면우 교수는 1990년 8월, 이 신제품의 개발 보고회에서 "아이들에게 컴퓨터를 사줘도 사용법이 어려워 전자 오락기로나 쓰"이지만, "이 유아용 컴퓨터를 우리 나이로 3살짜리 아이에게 주었더니 30분 만에 가지고 놀았"다고 강조했다. 그는 “기계에 인간이 적응하라는 것은 횡포”라고 주장하면서, 하이터치의 개념적 정의를 기술의 인간 중심적 활용이며 인간 친화적 디자인으로 확장하기도 했다(한겨레신문, 1990년 8월 18일).

이와 같이 하이터치 접근법은 한편으로는 당시 국내 기술력 수준에 눈높이를 맞춘 상품 개발의 방법론으로 주목을 받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술의 인간 중심적 활용이라는 측면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 접근법이 제시하는 '사용자'라는 개념이 그 가능성의 핵심이었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전자제품 외형은 블랙박스로 변모하고 사용법 역시 복잡해지면, 수많은 버튼들 중 어떤 버튼을 눌러야 할 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기 마련이다. ‘버튼 공포증’이 일반화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제품과의 원활한 상호작용을 설계하기 위해 사용자의 개념이 중요해진다. 여기에서 사용자의 정의는 사용법 매뉴얼의 지시에 따라 제품을 조작하는 행위자에 그치지 않고, 특정한 유형의 인지 과정을 통해 정보를 처리하고 도구를 활용해 해결안을 모색하는 행위자로 확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은 후자의 사용자 개념이 주목 받기에는 너무 이른 시점이었다. TV 리모컨, VTR 조작 부위, 다기능 전화기, 현금 출금기 등이 일반인들이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사용자 인터페이스였다. 그 대부분은 버튼들로 구성되었고, 인터페이스보다는 컨트롤 패널이나 입출력 장치로 불리는 것에 익숙한 대상이었다. 따라서 사용자에 대한 이해 역시 인지과학의 차원에 진입하지 못한 채 인간공학의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 하이터치의 사용자 개념이 사용자 친화적 디자인 혹은 사용자 경험 디자인으로 변용되기까지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1990년대 후반, 그래픽유저인터페이스를 탑재한 개인용 컴퓨터들이 인터넷으로 서로 연결되기 시작하던 시점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실제로 하이터치 접근법은 라이프스타일 연구와는 달리 시장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따라 대우전자의 실험은 빠른 속도로 약화되었고, 하이터치 팀은 2년간의 활동을 마치고 1990년에 해체되었다. 그해 말, MIT공학박사 출신 배순훈 교수가 신임 사장으로 부임했고, 그로부터 1년여의 시간 지난 1993년 1월, 대우전자는 품질 제일 실현을 목표로 삼아 ‘탱크(TANK)주의’를 경영 이념으로 발표했다. 여기에서 탱크주의란 “튼튼하고(T) 안전한(A) 신한국형(NK) 제품”이라는 우리말과 영문 복합어의 머리글자로 이루어진 어휘로, “복잡한 기능을 필요 이상으로 많이 채용해 오히려 사용하기 불편한 제품보다는 반드시 필요한 기본 기능을 강화하고 탱크처럼 튼튼하고 고장 없는 제품을 만들어내자”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하이터치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사장이 직접 광고에 출연해 대대적으로 홍보하면서 자사의 기존 히트 제품들을 탱크주의의 사례로 소개하기도 했다. “화질과 음질을 일대 혁신한 임팩트 TV, 획기적 세탁 방식의 세계 최초 공기방울 세탁기, 버튼 세 개로 간단하게 예약 녹화되는 초간편 VTR, 오존층을 보호하는 신냉매 냉장고” 등이었는데, 이 제품 중 일부는 이전까지 한국형 가전이나 하이터치 제품으로 홍보되던 것이기도 했다.

확실히 ‘하이터치’에서 ‘탱크주의’로의 전환은 금성사와 삼성전자의 양강 구도 속에서 후발주자로 경쟁해야 했던 대우전자의 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한 그 전환은 부분적으로는 일본 소니의 B · B 캠페인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했다. 1992년, 소니는 기존의 첨단 기술 제품 개발 전략과는 거리를 둔 채 “기본으로 돌아가자(Back to the Basic)”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사용에 편리한 제품의 개발에 나섰다. 표면적으로 불필요한 기능과 비싼 가격의 첨단 제품에 대한 소비자들의 불만에 대처하려는 움직임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1989년 부동산 대폭락 이후 일본의 경기침체 양상에 대한 대응책이기도 했다. “기본으로 돌아가자”란 소니가 제시하는 저성장 시대의 라이프스타일이었던 셈이다(한겨레신문, 1993년 1월 16일). 확실히,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 버블 경제와 장기 불황의 교차로에 놓여있던 일본 가전업체들은 국내 기업에게는 과거, 현재, 미래가 혼재된, 말 그대로 포스트모던한 참조대상이었다. 시장 세분화 전략과 라이프스타일 연구가 1980년대 일본 기업들의 상품 개발 전략을 참고한 것이라면, 대우전자의 ‘탱크주의’는 1990년대 초반에 탈 버블 시대를 준비하던 소니의 움직임을 염두에 둔 결과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선두주자는 일본의 가까운 과거를, 후발주자는 일본의 현재를 선택했던 셈이다.

3. 결론

본 연구의 범위 내에서 결론을 내리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국내 가전업체의 디자인 조직들은 1989년 이후의 불황 국면에 대응하기 위해 시장 세분화 전략, 라이프스타일 연구, 하이터치 접근법 등을 수용하면서 새로운 상품 개발의 방법론을 마련해 나갔다. 특히 라이프스타일 연구와 연계된 한국형 가전 개발은 상품 개발의 초기 단계에 디자이너의 참여를 고무하는데, 그리고 기업 내에서 디자인 조직의 역량을 강화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 아직 충분히 만족할만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디자인 조직은 이를 계기로 마케팅 부문과 기술 부문과 수평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상품 개발 프로세스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전까지 이 두 부문과는 종속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상품 개발 프로세스의 마지막 단계에 놓여 있었던 반면, 점차 그 단계에서 벗어나 디자인의 중요성을 가시화하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었다. 이와 함께 디자이너들은 시각적 표현이나 스타일링 역량뿐만 아니라 상품 개발이 요구하는 학제적 지식, 정보 수집·분석 능력, 의사소통 역량의 필요성을 자각하면서, 엔지니어와 마케팅 전문가와의 관계 재정립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1995년, LG전자의 김철호 소장이 『월간 디자인』과의 인터뷰에서 가장 애착을 가지고 있는 제품으로 한국형 가전의 대표 제품들, 즉 "김장독 냉장고, 뚝배기 전자레인지, 물걸레 청소기"를 꼽았던 것도 이런 성과 때문이었을 것이다(월간 디자인, 1995년 6월호).

둘째, 라이프스타일 연구의 ‘생활자’ 개념과 하이터치의 '사용자' 개념은 디자인 조직이 기존의 '소비자' 개념에서 탈피해 상품 개발의 다양한 가능성을 모색하는데 중요한 매개체 역할을 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생활자’는 자신의 계획에 따라 실내에 제품들을 배치 · 사용하고 주체적으로 라이프스타일을 연출하는 일상의 주체를 뜻했고, ‘사용자’는 특정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나름의 인지 과정을 거쳐 다양한 형태의 도구들을 조작·제어하는 행위자를 의미했다. 디자이너들은 ‘생활자’의 개념을 경유해 일상생활의 문화적 차원을 주목할 수 있었고, ‘사용자’의 개념을 통해서는 디지털 기술의 변화와 보조를 맞추며 기술의 인간 중심적 활용을 모색할 수 있었다. 즉 전자는 디자인을 문화 내부에 위치시켰고, 후자는 기술과의 접점을 제공했던 것이다. 실제로 이 두 개념은 1980년대 중반 이후 지속적인 정교화와 변형 과정을 거치면서, 디자이너들이 시대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돕는 개념적 인터페이스로 자리 잡았다.

셋째, 국내 가전업체의 디자인 조직들이 시장 세분화 전략, 라이프스타일 연구, 하이터치 접근법 등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일본 기업들은 중요한 참고 대상이기도 했다. 한국의 대기업 대다수가 본격적인 산업화 이후 일본을 기술 정보와 시장 정보의 수집 창구이자, 경영 방식과 기업 문화의 벤치마킹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Kim, Y. 2013) 이 시기에 국내 가전업체의 디자인 조직들이 일본의 선도 기업을 대상으로 모방을 통한 학습 전략을 지속해 나갔던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모방의 대상과 방법이 이전과 달라졌다는 점이다. 디자인된 제품이 아니라, 상품 개발 프로세스와 디자인 조직 형태가 모방의 대상이었다. 여전히 외관 상 유사한 제품들이 존재했지만, 그것은 단순히 제품 이미지를 참조하거나 디자인 요소를 모방한 결과라기보다는, 원본이 되는 상품 개발 프로세스와 디자인 조직 형태를 나름의 방식으로 전유한 결과에 가까웠다.

넷째, 이 시기 국내 가전업체의 디자인 조직에서 변화를 주도한 이들은 주로 1960 · 70년대에 대학을 다니며 ‘응용미술’이나 ‘산업미술’을 전공했던 1940년대 후반 · 1950년대 초반 태생의 디자이너들이었다. 그리고 조직의 재편은 자연스럽게 젊은 세대 디자이너의 채용으로 이어졌다. 1995년 5월 기준으로, 금성사에서 사명을 바꾼 당시 LG전자의 디자인연구소 소속 디자이너는 약 150명, 삼성전자 디자인연구소 소속 디자이너는 약 160명, 프로젝트별로 10개의 팀을 운영한 대우전자의 디자이너는 100명이었다. 500명 이상의 디자이너들이 가전 3사에서 근무했는데, 1980년대 후반과 비교하면 2배 이상 증가한 수치였다. 이 시기에 입사한 젊은 세대의 디자이너들은 2000년대 이후 국내 가전업체들이 세계 시장을 무대로 디자인 경영 전략을 본격화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60년대 생이 주축이었던 이 디자이너들은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디자인 주도의 신제품 개발에서 실무자로서 두각을 나타내며 변화를 선도했다. 이를테면 LG전자는 2006년에 디자인 경영을 선포하고 2006년과 2008년 두 차례에 걸쳐 5명의 “슈퍼 디자이너”를 선정했는데, 30대 중반의 여성 디자이너를 제외한 나머지 4명이 1990년대 초반에 입사한 40대 초중반의 남성 디자이너였다. 그들은 프로젝트 리더로서 휴대폰, 세탁기, 홈시어터 등 주력 제품군의 디자인 개발을 주도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1980년대 후반 · 1990년대 초반의 성과는 이후 인적 자원의 성장을 통해, 그리고 세대 간에 전승된 경험의 축적을 통해 2000년대의 변화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 변화의 의미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디자인종합연구소와 LSR 연구실의 위상 변화였다. 디자인종합연구소는 1995년 디자인연구소로, 2000년 디지털디자인연구소로 두 차례 명칭을 변경했고 2002년에는 디자인경영센터로 승격했다. 한편 LSR 연구실은 1993년 2월에 연구소로 독립했다가 2002년에는 디자인경영센터의 산하 조직으로 통합되었다.

다섯째, 본 연구는 잡지 · 신문의 기사 자료를 중심으로 관련 논문과 저술, 사사(社史) 등을 참고해 진행되었다. 문헌 자료에 기반을 둔 연구로 한계가 분명하기에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해당 시기에 국내 가전업체에서 실무를 담당했던 디자이너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나 구술 채록을 진행해 연구 내용을 좀 더 면밀하게 검토 · 보완할 필요가 있다. 또한 과학기술사, 기업경영사, 시각문화연구 등의 이론적 성과를 바탕으로, 디자인사 서술의 관점에서 이 시기 기업 디자인 조직의 변화상을 좀 더 심도 깊고 정교하게 분석할 수 있는 개념적 프레임을 구성하는 것 역시 요구된다. 물론 이때의 연구는 다양한 시선으로 한국 디자인 문화의 역사적 구조 변동을 살피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Acknowledgments

This study was supported by grant from Dongyang University in 2018

본 연구는 2018년도 동양대학교 학술연구비의 지원으로 수행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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