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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주부에게 세탁기를 허하라 : 1970년대 국내 신문의 세탁기 광고에 나타난 주부 및 가족 이미지의 문화정치학
Allow Housewives to Use the Washing Machine : The Cultural Politics of Images of Housewives and Families in Washing Machine Advertisements in 1970s Korean Newspapers
  • Haecheon Park : Department of Design, Dongyang University, Associate Professor, Dongducheon, Korea
  • 박 해천 : 동양대학교 디자인학부, 부교수, 동두천, 대한민국

연구배경 1970년대 초중반, 세탁기는 텔레비전과 냉장고 같은 가전제품과는 다른 상징적 위상과 문화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중상류층의 식모 고용, 전근대적인 주거 공간의 잔존, 정부의 강력한 소비 억제책 등과 같은 사회·경제·문화적 힘들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역사적 지형은 세탁기 보급의 장애물로 작용했다. 이에 따라 세탁기는 전기 테크놀로지의 가정화를 추구하는 가전제품의 대열에 합류하지 못한 채,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현대적인 생활양식을 상징하는 사물로서의 지위를 점유하고 있었다. 국내 주요 가전업체들은 1970년대 중반 이후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새로운 광고 전략을 모색했다.

연구방법 본 연구는 문헌 연구와 신문 광고 분석을 중심으로 진행한다. 당시 신문 광고는 광고 시장에서 가장 큰 규모를 차지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에게도 상당한 파급력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금성사와 삼성전자는 1970년대 전반에 걸쳐 다양한 형태의 신문 광고를 발표하고 새로운 소비자 집단과의 관계를 수립함으로써 세탁기 판매의 돌파구를 마련하려고 시도했다.

연구결과 1970년대 세탁기 광고의 변화 과정은 크게 세 가지 시기로 구분해볼 수 있다. ① 1971년부터 1973년까지 세탁기 광고는 가사노동의 경감에 초점을 맞췄으나 시장에서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한 단계, ② 1974년부터 1975년까지 경제성장과 함께 등장한 젊은 중산층의 가정주부를 소구 집단으로 삼아서, 이미지 중심의 형식을 통해 세탁기가 지닌 효용성의 맥락을 가정주부의 자녀 양육과 가족의 여가 활동으로 확장하는 단계, ③ 1976년부터 1979년까지 어린이를 중심으로 가족의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워, 구입 결정권을 지닌 남성 가장에 세탁기의 필요성을 설득하는 단계 등이다. 특히 세 번째 시기의 경제 호황은 세탁기 판매를 확대하는 데 기폭제 구실을 해줬다.

결론 1970년대 후반, 세탁기의 문화적 의미는 위와 같이 세 시기에 걸친 광고의 변화 과정을 통해 젊은 신중산층 가족이 구성원 간의 친밀성을 바탕으로 현대적인 일상생활을 연출하는 데 필요한 기술적인 사물로, 달리 말하자면, 그들이 실현하고자 하는 '스위트 홈'의 무대 장치로 정의되었다.

Abstract, Translated

Background In the early and mid-1970s, washing machines had a symbolic status and cultural meaning different from home appliances such as televisions and refrigerators. The unique historical landscape created by socio-cultural forces served as an obstacle to the supply of washing machines. As a result, they had not yet joined the ranks of home appliances to pursue the domestication of electrical technology, and had occupied the status of objects symbolizing the modern lifestyle of the future. Major domestic home appliance makers had sought new advertising strategies to overcome this situation since the mid-1970s.

Methods This study focuses on literature research and newspaper advertisement analysis. At that time, newspaper advertisements were not only the largest in the advertising market, but also had a significant impact on the general public. Indeed, throughout the 1970s, Goldstar and Samsung Electronics had attempted to make a breakthrough in washing machine sales by issuing advertisements in various form and establishing relationships with new consumer groups.

Results The process of changing washing machine advertisements in the 1970s can be divided into three major periods. ① From 1971 to 1973, ads focused on reducing household labor, but did not receive much response from the market. ② From 1974 to 1975, they took the young middle-class housewives who emerged with economic growth as a group of consumers, and expanded the context of the usefulness of washing machines to child rearing and family leisure activities through image-oriented forms. ③ From 1976 to 1979, they put the image of the family at the forefront, focusing on children, convincing male heads of households who had the right to make decisions about purchasing washing machines. In particular, the economic boom in the third period served as a catalyst for expanding washing machine sales.

Conclusions In the late 1970s, through the above three-period process of advertising changes, the cultural meaning of washing machines was defined as a technological object needed for young middle-class families to create modern mode of everyday life based on the intimacy of their members.

Keywords:
Washing Machine, Advertising, New Middle-class Family, 1970s, Design Culture, Design History, 세탁기, 광고, 신중산층 가족, 1970년대, 디자인 문화, 디자인사.
pISSN: 1226-8046
eISSN: 2288-2987
Publisher: 한국디자인학회Publisher: Korean Society of Design Science
Received: 13 Sep, 2022
Revised: 19 Oct, 2022
Accepted: 19 Oct, 2022
Printed: 28, Feb, 2023
Volume: 36 Issue: 1
Page: 317 ~ 339
DOI: https://doi.org/10.15187/adr.2023.02.36.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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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nding Information ▼
Citation: Park, H. (2023). Allow Housewives to Use the Washing Machine - The Cultural Politics of Images of Housewives and Families in Washing Machine Advertisements in 1970s Korean Newspapers. Archives of Design Research, 36(1), 317-339.

Copyright : This is an Open 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educational and non-commercial use,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1. 서론
1. 1. 연구 배경과 목적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 선포를 10개월 앞둔 1972년 1월, 조선일보는 한국정책개발원이 진행한 한국인의 가치관에 대한 조사 결과를 특별 연재 형식으로 게재하기 시작했다. 그 내용은 500여 명의 영호남 거주 일반 국민, 105명의 국회의원을 대상으로 진행한 면접 설문 조사의 결과를 담은 것이었다. 조사 책임자였던 이영호 한국정책개발원 원장은 1970년대 한국 사회가 과거의 어느 시기보다 급속한 변화의 소용돌이 한복판에 놓여 있다고 진단하면서, “근대화”야말로 우리가 이런 상황에서 의식적으로 지향해야 할 목표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근대화란 “행동의 결과”이며 “행동은 가치관의 발현"이기에 “올바른 근대화”란 결국 “올바른 가치관”에서 출발하는 것이었다. 이 원장은 이런 관점에 기대어 당대의 한국인이 공유한 가치관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것은 한편으로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사회와 상호작용하며 시시각각 변모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당대의 시점에서 근대화의 성공 여부를 가늠해볼 수 있는 지표로서 나름의 중요성을 지니는 것이기도 했다(『조선일보』, 1972년 1월 1일).

연재 기사는 환경 보존, 분배 의식, 경제 발전 방향, 자유 의식, 전통과 근대화 등을 주제로 삼아 한국인의 가치관을 다루다가, 9회차에 이르러 한국인이 생각하는 ‘선진국’의 의미를 분석했다. 이 원장은 선진국의 의미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한국인이 국가적 차원에서 어떤 모습의 미래를 지향하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즉 선진국의 의미에 대한 해석은 한국인이 근대화라는 발전의 시간성에 의지해 당도하고자 하는 미래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하나의 단면도(斷面圖)라는 것이었다.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선진국의 구체적 사례로 미국을 압도적으로 많이, 다음으로 일본, 영국, 서독, 프랑스 등을 떠올렸고, “경제적 또는 물량적 생활”, “특정 국가·지역”, “예술·문화”, “사고·행태”, “과학·기술” 등의 순으로 특정한 관점에서 선진국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다(Figure 1). 달리 말해 다수의 국민들에게 선진국은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예술·문화와 사고·행태의 측면에서, 그리고 과학·기술에 있어서 앞선 미국이나 서구 제국과 같은 나라”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약 31%라는 압도적으로 높은 비율로 일반 국민들은 선진국이라고 하면 “경제적 또는 물량적 생활”의 측면을 떠올렸는데, 이때 그들이 선진국을 상징하는 물질적 풍요의 대상으로 지목한 것은 “자동차”, “세탁기”, “화려한 도시”, “고속도로” 등이었다(『조선일보』, 1972년 3월 9일).


Figure 1 A newspaper infographic on the semantic structure of developed countries (『조선일보』, 1972년 3월 9일)

이 대목에서 본 연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당시 국민 다수의 의식 속에서 “세탁기”라는 가전제품이 차지하고 있었던 독특한 상징적 위상이다. 확실히 세탁기는 흑백텔레비전이나 냉장고와 같은 일반적인 가전제품의 대열에 합류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와는 다른 차원에서 “자동차”, “화려한 도시”, “고속도로”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선진국이 성취한 “문화생활”, 특히 미국이나 일본의 현대적인 생활양식을 환유하는 상상적 대상의 지위를 점유하고 있었다. 해외 사례와 비교해볼 때 이는 상당히 독특한 현상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일반적으로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서 텔레비전, 냉장고, 세탁기가 삼각편대를 이룬 가전제품의 보급은 전기 테크놀로지의 가정화를 통해 중산층을 중심으로 새로운 생활양식의 확산을 가시화하면서 본격 소비사회의 도래를 앞당기는 중요한 역사적 흐름이었다. 이를테면 일본의 경우, 이 세 제품은 1955년 이후 “삼종의 신기”로 불리며 빠른 속도로 보급되어 1965년에는 텔레비전의 보급률은 59%, 냉장고는 68%. 세탁기는 78%에 도달했다. 전후 고도성장의 표상으로 군림하던 이 세 제품의 보급률은 본격 소비사회에 진입한 1970년대 초에는 90%대를 넘어섰다(Kim, 2021). 이 흐름을 선두에서 이끈 것은 다름 아닌 세탁기였고 그 뒤를 냉장고, 그리고 텔레비전이 쫓고 있었다.1)

흥미롭게도 한국에서 가전제품의 보급은 일본의 사례와는 뚜렷이 구별되는 양상을 보였다. 1960년대 초반 수입 세탁기가 국내 시장에 첫선을 보인 이후, 최초의 국산 세탁기가 출시된 것은 1969년 5월이었다. 금성사가 일본 히타치제작소와의 기술제휴로 생산한 모델명 WP-181의 세탁기(Figure 2)가 바로 그것이었다. 금성사는 당초에 이 제품을 1,500대를 생산할 계획이었으나, 시장 수요를 고려해 500대를 우선 생산하기로 결정하고 1차로 195대를 생산했다. 그러나 시장에서 별다른 반응이 없자 곧바로 생산을 중단했다. 금성사가 세탁기 생산을 재개한 것은 2년 후인 1971년이었다(『조선일보』, 2010년 11월 17일). 그러나 이후에도 상황이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1970년대 전반에 걸쳐 흑백텔레비전이 중산층의 경계를 넘어서 일반 가정을 대상으로 점진적으로 보급률을 높여갔고, 냉장고는 일정한 시간 간격을 두고 그 뒤를 추격했다. 반면 세탁기는 1970년대 중반까지도 이러한 흐름과는 동떨어진 채 낙오병처럼 후위에 남겨졌다.2) 그것은 여전히 희소성 높은 가전제품이었던 것이다. 세탁기 시장이 성장기에 진입하던 1970년대 후반까지 이런 상황은 지속되었다. 실제로 1970년대 초반 세탁기의 연간 판매 대수는 1,200여 대로 추산되었고(『동아일보』, 1971년 6월 5일), 보급률은 1975년에는 1.0%, 1979년에는 11%에 불과했다. 반면 텔레비전과 냉장고의 보급률은 1975년에는 30.3%와 6.5%, 1979년에는 79.1%와 49.0%였다.


Figure 2 An advertisement for Goldstar’s home appliances including the first washing machine(Model WP-181) in February 1969

당시 평균적인 소득 수준이 높지 않고 가전제품의 주요 소비층인 중산층의 규모도 그리 크지 않은 상황을 반영한 결과였지만, 그럼에도 흑백텔레비전과 냉장고에 비해 세탁기의 보급률이 상대적으로 턱없이 낮았던 것은 확실히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는 대목이다. 실제로 세탁기는 다른 가전제품에 비해 가정 공간에 안착하기 위해 넘어야 할 장애물이 많았다. 물론 고가품이라는 것도 큰 걸림돌이었지만, 무엇보다 다양한 층위에 걸쳐진 사회·경제·정치적 힘들이 독특한 역사적 지형을 만들어내면서 높은 진입 장벽을 구축했다. 앞서 살펴봤듯이, 세탁기가 흑백텔레비전과 냉장고와는 다른 상징적 위상을 지녔던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지금 여기’의 일상용품이라기보다는 가까이하기엔 아직 시간이 필요한 근미래의 사물에 가까웠다.

본 연구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국내 가전업체들이 1970년대 전반에 걸쳐 세탁기 보급의 부정적 조건을 우회하기 위해 시도한 시장 전략의 결과들을 신문 광고의 사례 분석을 통해 검토하면서, 그러한 결과들이 현대적인 생활양식의 제안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시기 세탁기의 디자인은 세탁통과 탈수통이 별개로 분리된 이조식의 박스 형태로, 제어 패널 부분을 제외하곤 외형상의 큰 변화가 없었던 반면, 신문의 세탁기 광고는 특정 계층의 가정주부와 가족 이미지를 전유하면서 세탁기의 상징적 위상과 문화적 의미를 지속적으로 변형해 나가고 있었다.3)

1. 2. 연구 대상과 방법

본 연구는 문헌 연구를 토대로 세탁기의 신문 광고에 대한 사례 분석을 진행했다. 먼저 본 연구는 연구 목적에 초점을 맞춰 광고 사례들을 선정하기 위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 등록된 조선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등 3개의 주요 일간지에 게재된 1970년대 세탁기 광고 사례들을 수집했다. 아래 표(Table 1)는 그 수집의 결과로 가전업체들이 단독으로 세탁기 광고를 위 3개 일간지에 연도별로 게재한 횟수이다. 여기에서는 제조업체가 다른 가전제품과 함께 광고하는 경우나 유통업체가 할부 판매를 내세워 세탁기를 직접 광고하는 경우는 제외했다. 1970년부터 1979년까지 10년간 조선일보 63회, 동아일보 38회, 경향신문 27회, 세탁기 광고가 게재되었다.

Table 1
Number of advertisement for washing machines published in major newspapers per year

연도 1970 1971 1972 1973 1974 1975 1976 1977 1978 1979 총계
신문
조선일보 0 0 1 2 8 15 7 13 11 6 63
동아일보 0 1 2 1 6 6 4 11 4 3 38
경향신문 0 0 0 0 6 6 4 5 5 1 27
총계 0 1 3 3 20 27 15 29 20 10 128

아래 표(Table 2)는 금성사의 백조세탁기, 삼성전자의 은하세탁기, 대한전선의 무지개세탁기 등 주요 업체별로 신문에 게재한 세탁기 광고 횟수이다.

Table 2
Number of newspaper advertisement for washing machines by major home appliance companies per year

연도 1970 1971 1972 1973 1974 1975 1976 1977 1978 1979 총계
신문
금성사 0 1 3 3 19 17 5 2 0 3 53
삼성전자 0 0 0 0 0 6 4 4 12 3 29
대한전선 0 0 0 0 1 4 2 14 7 0 28
화신전기 0 0 0 0 0 0 3 9 1 2 15
기타 0 0 0 0 0 0 1 0 0 2 3
총계 0 1 3 3 20 27 15 29 20 10 128

위 두 표에서 드러나듯이, 1970년대 세탁기 신문 광고의 시발점은 1971년 금성사가 자사의 두 번째 세탁기 모델을 내놓으면서 게재한 것이었다.4) 이후 금성사는 1972년과 1973년에는 각각 3회씩 자사 제품을 신문 지면에 홍보했다. 제품 도입기를 거쳐 상황이 변모한 것은 1974년 이후 대한전선과 삼성전자가 각각 무지개세탁기와 은하세탁기라는 이름의 신제품을 출시하며 세탁기 시장에 진출하면서부터였다. 금성사는 1974년과 1975년, 두 해 동안 각각 19회와 17회로 광고 게재 횟수를 급격히 늘리면서 선발 주자로서 경쟁자의 등장을 견제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한편, 세탁기 시장의 경쟁 구도가 위의 가전 3사를 중심으로 형성된 것은 1976년 이후의 경제 호황 시기였다. 대한전선과 삼성전자는 1977년과 1978년, 두 해 동안 번갈아 가며 10회 이상 신문 광고를 게재하면서 본격적인 홍보전에 뛰어들었다. 흥미롭게도 금성사는 1977년 이후 신문 광고를 줄여나갔고, 1978년 하반기 제2차 석유파동 이후 전체적으로 세탁기 광고는 빠르게 감소하는 추세를 보였다. 본 연구는 위와 같은 분석을 바탕으로 연구 대상이 되는 시기를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세 시기는 ① 1971년부터 1973년까지의 시기로 금성사의 주도로 세탁기가 시장에 도입되는 시기, ② 1974년부터 1975년까지의 시기로 후발 업체의 시장 진출이 본격화되는 시기, ③ 1976년부터 1979년까지의 시기로 가전 3사를 중심으로 세탁기 시장의 경쟁 구도가 형성되면서 세탁기 보급이 활성화되는 단계 등이다.

한편, 1970년대 세탁기 광고는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는데, 하나가 세탁기 자체의 기능성, 효율성, 경제성을 강조하는 제품 중심의 광고였고, 다른 하나는 세탁기가 가져다주는 생활양식의 변화를 보여주는 가족 이미지 중심의 광고였다. 금성사의 경우 이 시기의 게재 횟수 총 53회 중 제품 중심의 광고가 31회, 가족 이미지 중심의 광고가 22회를, 삼성전자의 경우 총 29회 게재 횟수 중 각각 20회와 9회를 차지했다. 확실히 전자의 광고 유형이 후자에 비해 수적으로 우세했지만, 후자 역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했다. 특히 후자의 광고 유형은 당시 다른 가전제품 광고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으로, 세탁기의 보급을 가로막던 당대의 역사적 지형을 우회할 수 있는 새로운 경로를 모색하려고 시도한 결과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흐름을 주도한 가전업체는 금성사와 삼성전자였다. 본 연구는 위에서 구분한 세 시기를 기준선으로 삼아 이 두 업체의 세탁기 광고 중 제품 기능 중심의 광고 2종과 가족 이미지 중심의 광고 8종, 이렇게 총 10종의 광고를 구체적인 분석의 대상으로 삼고자 한다.

2. 시장 진입의 높은 장벽과 세탁기 보급의 정체: 1971~1973년

1971년 8월, 금성사는 자사의 두 번째 세탁기 모델, WP-2005를 내놓았다. 2년 전인 1969년에 출시한 최초의 국산 모델 WP-181은 세탁통과 탈수통이 분리된 1.8kg 용량의 이조식 형태로 알루미늄으로 제작되었고, 4단 수위 선택 스위치와 스프링식 타이머가 부착되었다.5) WP-2005는 외형이나 기능의 큰 변화 없이 WP-181 모델을 개선한 이조식 형태로, 용량을 2.0kg으로 늘린 세탁기였다. 금성사는 이 제품의 출시 직전 시점인 7월 30일에 세탁기를 전면에 배치한 광고(Figure 3)를 동아일보에 게재하면서 본격적인 판매전에 나섰다. 이 광고는 다소 호기롭게 “빨래는 시간의 낭비입니다”라는 도발적인 문구를 크게 내걸었다. 당시만 해도 빨래를 비롯한 가정주부의 가사노동은 가족에 대한 애정과 헌신의 표현으로 미화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광고는 이런 관념에 반기를 들고 빨래가 그저 고되고 버거운 가사노동에 불과하고 선언하고 나섰다. 하지만 부가 설명에서는 강한 어조를 약간 가라앉히며 세탁기 사용의 이점으로 “시간을 절약할 수 있”고, “가정부의 도움이 필요 없어”지며, 빨래 장소가 따로 필요 없고, “빨래로 거칠어지기 쉬운 손을 보호”해준다고 강조하면서, 주요 예비 소비자 집단으로 “신혼 가정”, “아파트 생활자”, “맞벌이 부부”, “대가족” 등을 지목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광고 내용과는 무관하게 세탁기는 당시 너무 시대를 앞서 나갔던 가전제품처럼 보인다. 실제로 출시된 해의 생산량은 49대에 불과했다(『동아일보』, 2019년 6월 26일).


Figure 3 An advertisement for Goldstar Baekjo washing machine(Model WP-2005) in July 1971

금성사는 1972년에는 1971년 광고에 약간의 변형을 가해 3회에 걸쳐 신문 지면에 게재했고, 1973년에 다시 WP-2005 모델의 새로운 광고(Figure 4)를 단발성으로 조선일보에 게재했다. 후자의 광고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갓 데뷔한 20대 초반의 여배우(김영애)에게 임신 중인 신혼 주부 역을 맡기고 지면 전면에 배치했다. 그는 세탁기가 작동 중인 동안 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다. 광고는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이라는 “신혼의 꿈”을 가꾸기 위해서는 “주부의 바쁜 일손을 도와주는” 세탁기가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그러고 나선 1971년의 광고 문구를 약간 수정해 세탁기가 “시간을 벌어드리고” “경제적 생활을 가능케 하”며 “옷을 보호해”주고 “편리하고 깨끗한 생활”을 실현해줄 것이라고 덧붙인다. 광고의 구성상, 뜨개질을 하는 신혼 주부 이미지가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세탁기가 빨래의 자동화를 통해 가정주부에게 여유 시간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메시지가 그것이었다.


Figure 4 An advertisement for Goldstar Baekjo washing machine(Model WP-2005) in March 1973

이와 같이 금성사의 초기 광고들은 거칠게나마 가사노동 시간의 단축이라는 측면에서 세탁기의 유용성을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세탁기는 다른 가전제품들과 달리 국내 시장에 안착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여기에는 크게 세 가지 사회·경제·정치적 요인이 작용하고 있었다.

세탁기가 가정 공간으로 진입하는 데 가장 먼저 맞대면해야 하는 장애물은 가사보조자로서의 식모의 존재였다. 1973년 동아일보의 기사에 따르면, 서울의 경우 전체 127만 가구에서 일하고 있는 식모의 수가 24만 6천 명으로, 평균 다섯 가구 중 한 가구가 식모를 두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동아일보』, 1973년 2월 12일). 이와 같이 식모라는 가사노동을 전담하는 여성 인력 집단이 광범위하게 형성된 데에는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른 이농 여성 인구의 급격한 증가가 한몫했다. 일반적으로 시장 도입 단계에 있는 고가의 가전제품은 경제적 여유가 있는 중상류층이 먼저 구입하고 이후에 일정 기간을 거친 후 중산층으로 보급이 확산되는 경향을 보이기 마련이다. 그런데 세탁기의 경우, 중상류층 가정에 고용된 식모의 존재로 인해 이러한 과정 자체가 입구부터 봉쇄된 상황이었다. 당시 세탁기를 구입할 수 있을 정도의 구매력을 갖춘 소비자 다수는 이미 식모를 고용하고 있는 이들이기도 했다. 즉 고가의 세탁기는 저임금의 식모와 경쟁해야 하는 처지였던 것이다. 물론 식모를 고용하고 세탁기도 구입한 중상류층의 주부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런 경우, 남성 여론 주도층에 의해 ‘사치 풍조’의 대표적인 사례로 비판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식모의 영향력은 세탁기와 같이 가사노동을 자동화하는 가전제품의 보급을 더디게 만드는 것에만 그치지 않았다. 식모는 재래식의 부엌 공간을 입식의 형태로 현대화하는 데에도 큰 장애물로 작용했다(Kim, 2021).

세탁기 보급의 두 번째 장애물은 당시 광범위하게 잔존하던 전근대적 주거 공간이었다. 본래 세탁기는 급수와 배수가 용이하면서도 습기가 적은 실내 공간에 설치해야 한다. 당시 주류를 이루던 재래식 가옥에서 이와 같은 세탁기의 관리 요령을 충족시키는 장소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옥외에 설치해 나무 받침을 바닥에 깔아두거나, 사용하지 않을 때는 커버를 씌워 놓곤 했다. 서양식 단독 주택이나 아파트의 경우에도 세탁기를 놓을 자리가 따로 존재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상황은 재래식 가옥보다는 나았다. 비좁은 화장실에 겨우 세탁기 자리를 마련하거나, 배수구가 있는 베란다의 한쪽 구석을 활용해야 했다. 적어도 이후에 다용도실이 세탁기 전용 공간으로 자리잡기 이전까지 이런 상황은 반복되었다(Kim, 2021).

이와 같이 1970년대 초반, 중상류층 가정의 식모 고용과 전근대적인 주거 공간의 잔존은 세탁기의 보급을 가로막는 강력한 사회문화적 힘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제1차 석유파동 직후인 1974년 1월 1일에는 박정희 정권이 선포한 ‘국민생활안정을 위한 대통령긴급조치 제3호’가 강력한 소비 억제책을 앞세우며 세탁기 보급의 세 번째 장애물로 가세했다. 긴급조치 3호는 “국민 생활의 안정”과 “건전한 국민 생활의 기풍 진작”을 목표로, 소득에 따른 소득세 차등 감면, 주민세 및 지방세 감면, 생필품 가격과 대중 요금 안정, 고소득층 재산-사치 행위 및 물품에 대한 중과세 부과 등을 그 내용으로 담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3호를 통해 대외 경제 환경의 악화에 적극 대처하기 위해 사치성 소비 품목에 대한 소비 억제 정책을 전면화하려고 시도했다. 여기에서 사치성 소비 품목은 양주, 자동차, 귀금속, 골프 등 오락용품, 고급 장신구뿐만 아니라, 텔레비전, 냉장고, 세탁기, 청소기 등 일반 가전제품까지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긴급조치 3호에 따르면, 가전제품은 사치품으로 분류되는 것이었다. 실제로 19인치 이상 대형 텔레비전은 물품세율이 50%에서 70%로, 소형 TV는 35%에서 50%로, 냉장고, 세탁기, 청소기는 50%에서 70%로 인상되었다(Lee, 2013; Kim, 2021). 물론 이러한 소비 억제책이 대부분의 가전제품을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세탁기 판매에만 악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다. 다만 시장 진입 단계에 놓여 있던 세탁기의 구입 문턱을 크게 높였던 것만큼은 분명했다.

특히 정부의 소비 억제책과 관련해서는 그것이 국가적 차원의 가족 정책과 조응했던 대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박정희 정권은 1960년대 후반 이후 ‘1인 생계부양 4인 가족 모델’을 정상 가족의 표준으로 내세우며 ‘전업 가정주부’의 역할을 새롭게 정의해 나갔다. “총화 단결”이라는 당시의 국가적 차원의 구호가 표상하듯이 ‘국민’으로 호명되는 전체로서의 사회적 신체가 한편에 있었다면, 가정은 그 사회적 신체의 기본적인 구성단위로서 근면, 검소, 절약의 정신을 온전히 체화해야 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기혼 여성에게는 성별 분업의 논리에 따라 전업 가정주부의 자리가 배정되었는데, 그 역할이란 근검과 절약을 생활 규범으로 내면화하고 가사노동과 자녀 양육에 전념하면서 ‘화목한 가정’의 관리자로서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었다. 소비 억제책과 가족 정책, 이 양자의 결합을 통해 박정희 정권은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소비 경험이 이뤄지는 공간을 최소화함으로써 소비 지향적인 현대적 생활양식의 도래를 지연하고자 했다(Kim, 2020). 풍요로운 일상이란 일부 계층에게라도 아직은 허용되어서는 안 되는 미래였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빨래를 자동화하는 세탁기는 국가의 소비 억제책과 가족 정책을 실행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사물이었다. 국가의 관점에서 보면, 세탁기 구입은 사치였으며, 그 사치의 결과는 결국 노동하지 않는 가정주부의 신체에 새겨진 나태함이었다. 실제로 1972년의 10월 유신, 1973년의 제1차 오일쇼크, 1974년 연초의 긴급조치 3호 선포 등을 거치면서 세탁기는 사회문화적 담론의 차원에서 근면, 검소, 절약과는 대립되는 나태와 사치의 표상으로 부정적으로 의미화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Figure 5). 한 신문 기사의 표현을 빌리자면, 세탁기는 “근대화의 명분 아래” 수용에 급급했던 “사치성 문명의 이기” 중 하나였다(『동아일보』, 1974년 11월 26일).


Figure 5 A newspaper illustration in an article titled "Leisure and Women" (『조선일보』, 1976년 7월 4일)
3. 가족 이미지 중심 광고의 본격화와 세탁기의 문화적 의미 변환: 1974~1975년

흥미롭게도 1974년을 기점으로 삼성전자, 대한전선, 화신전기 등 후발 가전업체들이 일본 업체와의 기술제휴를 통해 신제품을 출시하며 세탁기 시장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앞서 살펴봤듯이 이 시점은 중상류층 가정의 식모 고용과 전근대적인 주거 공간의 잔존, 그리고 거기에 정부의 권위주의적 소비 억제책까지 가세해 세탁기 시장의 상황은 한층 더 악화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성숙 단계의 시장을 두고 경쟁이 과열되었던 것은 가전업체들이 당시 일본의 세탁기 보급률이 90%대에 도달했다는 점을 참고해 국내 세탁기 시장의 성장 가능성을 높이 평가한 결과였다(『조선일보』, 1974년 1월 18일). 선발 주자였던 금성사는 이런 상황에서 세탁기 판매의 악조건들과 직접 경합을 벌이며 정면 돌파를 시도하기보다는 독특한 광고 전략의 구상과 실행을 통해 그 조건들을 우회할 수 있는 새로운 경로를 모색하기 시작했다.6)

일단 금성사는 1974년 19회, 1975년 17회 등 주요 일간지의 광고 게재 횟수를 늘려가며 본격적인 홍보전에 나서는 가운데, 당시 새롭게 부상하던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를 포착하고 그들을 세탁기의 소구 집단으로 전면에 내세우기 시작했다. 금성사가 주목한 이들은 바로 신중산층 핵가족의 전업 가정주부였다. 1970년대 초반 이후 급속한 산업화와 보조를 맞춰 1940년 전후로 출생한 젊은 세대의 고학력자들이 사무직, 관리직, 전문직 등 화이트칼라 직종 종사자로서 빠른 속도로 계층적으로 분화하면서, 상공업 계통 종사자나 소지주 자영농 중심의 구(舊)중산층과 대비되는 신(新)중산층의 면모를 갖춰 나가고 있었다. 당시 30대 초중반의 연령대였던 이들 신중산층은 봉급생활자로서 경제적 안정성을 바탕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구매력을 갖추고 있는데다가, 무엇보다 일상생활을 현대적인 생활양식으로 재편하는 데 큰 관심을 보이면서 아파트나 단독 주택 같은 서구식 주거 공간에 거주하는 것을 선호했다. 또한 이 집단의 가정주부들은 식모를 고용하지 않고 혼자 집안일을 전담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Yoon, 1996).

따라서 세탁기 보급의 장애물로 작용했던 식모와 전근대적 주거 공간의 존재는 이들에게 큰 힘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신중산층의 가정주부가 지닌 역사적으로 특수한 면모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1960년대 후반 정부의 본격적인 산업화 추진 이후 장려되었던 ‘1인 생계 부양 핵가족’ 모델이 이 시기에 이르러 바로 이들, 젊은 세대의 신중산층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그 모델 내부에 전업 가정주부라는 새로운 주체의 자리가 마련되었다. 여기에서 전업 가정주부의 역할이란 성별 분업의 논리에 따라 남편의 경제 활동에 의존하면서 집안일을 전담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가사노동과 함께 자녀 양육이 가정주부가 도맡아야 할 중요한 과업으로 설정되었다(Yoon, 2004; Kim, 2009; Kim & Lee, 2013).

1974년 3월, WP-2015 모델을 내세운 금성사의 백조세탁기 광고(Figure 6)는 바로 이 지점, 그러니까 신중산층의 부상이 핵가족 모델의 확산과 전업 가정주부의 등장과 공명하며 만들어내는 일상성의 변화 가능성에 주목하면서, 가정주부가 세탁기 사용으로 증가한 여유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파고들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각각 1회씩 게재된 이 광고에 따르면, “우리집 세탁 시간”은 이제 더이상 1973년의 광고가 보여준 것처럼 한가롭게 뜨개질하는 시간이 아니었다. 또한 가정주부의 휴식이나 외출을 위한 시간도 아니었다. 세탁기가 “우리 집의 가정부”로 의인화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기계 가정부가 가져다준 여유 시간이 전적으로 가정주부 자신만을 위해 사용되어선 안 되었다. 그것은 유의미한 목적을 위해 효율적으로 관리되어야 하는 대상이었다. 광고는 그 여유 시간이 이제 “꼬마들과의 즐거운 시간”으로 활용되어야 한다고 천명했다. “힘겨운 빨래는 백조세탁기에 맡기”고 “즐거운 시간 속에 자녀들의 꿈을 가꾸어 주”라는 것, 즉 세탁기 사용을 통해 가사노동 시간을 줄이되 자녀 양육 시간은 늘리라는 것이었다.


Figure 6 An advertisement for Goldstar Baekjo washing machine(Model WP-2015) in March 1974

광고의 논리에 따르면, 세탁기를 사용한다고 해도 주부가 집안일에 투여하는 시간의 총량은 줄어들지 않는다. 총량은 그대로이되, 다만 가사노동과 자녀 양육, 양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조정될 뿐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시간 관리였다. 가정주부는 세탁기를 활용해 합리적으로 시간을 운용하면서, 가사노동과 자녀 양육, 두 가지 과업을 균형 있게 수행할 수 있어야 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가전제품의 도입에도 불구하고 주부의 집안일 시간은 감소하지 않는다”는 미국 기술사학자 루스 코완(Ruth Cowan)의 패러독스는 아이러니하게도 위와 같은 세탁기 광고에서는 가정주부가 핵가족 모델이 부여한 제도적 역할 범위 내로 안착하도록 인도하기 위해 오히려 적극적으로 권장되어야 하는 명제였다고 할 수 있다.

1974년 7월의 금성사 광고(Figure 7)는 3월 광고의 바통을 이어받아 “꼬마들과의 즐거운 시간”을 “온 가족의 즐거운 시간”으로 확장했다. 조선, 동아, 경향 등 일간지 지면에 각각 2회씩 총 6회 게재되고 텔레비전 방송용(Figure 8)으로도 제작된 이 광고는 세탁기뿐만 아니라 그것이 가능케 하는 여유로운 일상생활 자체를 홍보의 대상으로 삼았다. 3월 광고에서는 실내에 놓인 세탁기가 지면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가정주부와 간난 아기, 그리고 유아가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모양새였다. 반면 7월 광고에서는 동일한 WP-2015 모델을 내세우되, 광고 사진의 배경은 실내의 밀폐된 공간에서 하늘이 보이는 야외의 정원으로 옮겨가고, 이전까지 세탁기 광고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남성 가장도 등장한다. 그리고 일반 대중에게 선망의 대상이 될 법한 단층의 서구식 주택을 배경으로 삼아, 정원에서 남성 가장과 가정주부, 두 아이, 이렇게 4명으로 구성된 핵가족이 시소를 나눠 타면서 즐겁게 “행복의 시간을 가꾸”고 있다. 여기에서 가정주부(엄유신 역)는 더이상 평상복에 앞치마를 두르고 있지 않았다. 그는 반팔 티에 짧은 체크무늬 치마를 착용한 자유분방한 옷차림새다. 이렇게 광고의 무대는 집안일과는 분리된 여가의 영역으로 옮겨갔고, 이에 따라 세탁기는 가족의 모습이 담긴 사진 내부가 아니라 사진 오른쪽 하단부 모서리에 걸친 채로 비스듬히 배치되었다. 세탁기의 문화적 의미는 이러한 배치를 통해 좀 더 분명해졌다. 그것은 가족의 여가 시간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지만 그 여가 시간의 증대를 뒷받침하는 기술적 사물로 자리매김했다. 달리 말하자면, 그것은 새로운 일상성의 질서를 추동해낼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가전제품이었던 것이다. 가정주부의 역할도 이와 보조를 맞추며 핵가족 모델 내부에서 좀 더 확장된 형태로 재정의되었다. 이제 그는 세탁기의 도움으로 시간을 합리적으로 경영하는 가정생활의 관리자 역할뿐만 아니라, 화목한 가족의 일상을 연출하며 삶의 질 향상을 시도하는 생활양식의 기획자 역할까지 담당해야 했다.7)


Figure 7 An advertisement for Goldstar Baekjo washing machine(Model WP-2015) in July 1974

Figure 8 A TV advertisement for Goldstar Baekjo washing machine(Model WP-2015) in 1974

한편, 1974년 하반기에 금성사는 최신 기능의 신모델 WP-2305를 출시하면서, WP-2015 모델의 가족 이미지 중심 광고와는 달리 제품 기능 중심의 광고(Figure 9)를 선보이며 경쟁 제품과의 차별화에 나섰다. 이 광고는 조선, 동아, 경향 등 일간지에 각각 2회씩 총 6회 게재되었는데, “5인 가족의 하루 세탁물을 한 번에 빨 수 있는” 2.3kg의 대용량으로 설계된 WP-2305 모델은 광고 상단부에 큼지막한 볼드체로 “모두가 새로워졌습니다”라는 문구를 내걸 만큼, 이후 시장의 표준이 될 새로운 기능들을 탑재하고 있었다. 세탁물의 종류에 따라 4가지로 세탁의 강도를 조절할 수 있는 “4단 속도 조절 장치”, 세탁물의 특성과 양에 따라 물의 양을 조절할 수 있는 “4단 수량 조절 장치”, 세탁 능률을 높이기 위해 스프레이식으로 물을 뿌려주는 “매직 샤워 기능”, 세탁과 헹굼이 끝난 것을 알려주는 “부저 장치” 등이 그것이었다. 광고는 가운데 전면에 세탁기 상단부를 배치하고, 양옆으로 삽화와 함께 이 기능들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담았다.


Figure 9 An advertisement for Goldstar Baekjo washing machine(Model WP-2305) in November 1974

금성사는 1975년 상반기에 접어들면서 WP-2305 모델의 광고(Figure 10)에 변화를 주었다. 조선일보에 4회, 경향신문에 2회, 총 6회에 걸쳐 지면에 게재된 이 광고는 “스타킹에서 청바지까지 세탁 방법이 다릅니다”라는 문구를 전면에 내걸고, 제품의 차별성을 부각하기 위해 “4단 만능 수류 기능”을 강조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바로 이 4단 수류 기능의 특징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남성 가장, 가정주부, 남아, 여아로 구성된 젊은 신중산층의 4인 가족을 등장시켰다는 점이다. 광고에 따르면, 1단 수류는 스타킹이나 레이스 등 화학섬유와 합성섬유 제품, 즉 가정주부의 세탁물에 적합한 세탁 방법이며, 2단 수류는 모직이나 울 같은 제품, 즉 여아의 세탁물에, 그리고 3단 수류와 4단 수류는 각각 와이셔츠나 내복 등 남성 가장의 면 제품, 그리고 청바지 같은 남아의 두꺼운 의류에 적합한 세탁 방법이었다. 1974년 하반기의 광고가 신모델의 주요 기능에 대한 제조업체의 자신감을 반영한 것이었다면, 1975년 상반기의 광고는 신중산층 가족의 이미지를 동원해 그 주요 기능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Figure 10 An advertisement for Goldstar Baekjo washing machine(Model WP-2305) in April 1975

이 시기 WP-2305 모델의 광고는 당시 경쟁사 광고들과 유사하게 전형적인 제품 기능 중심의 형식을 선보였다. 반면에 그에 앞서 1974년에 발표된 WP-2015 모델의 두 광고는 확실히 가족 이미지 중심의 광고 형식을 통해 세탁기가 지닌 효용성의 맥락을 가사노동의 경감에서 가정주부의 자녀 양육으로, 그리고 다시 가족의 여가 활동으로 확장했다. 이는 젊은 신중산층이 향유하고자 하는 현대적인 생활양식의 필수품으로 세탁기의 문화적 의미를 재위치시키려고 시도한 결과였다. 물론 이러한 시도는 앞서 살펴본 사회·문화·경제적 장애물을 단숨에 넘어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74년에 세탁기 생산량은 2만 대를 넘어섰으나, 세탁기 시장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했다(『조선일보』, 2010년 11월 17일). 서론에서 살펴봤듯이 실제로 1975년의 세탁기 보급률은 1%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WP-2015 모델의 두 광고가 성취한 바는 분명했다. 그것은 1970년대 중반의 경제성장과 함께 본격적으로 구매력을 갖추기 시작한 신중산층의 가정주부를 소구 집단으로 광고 전면에 부각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가정주부의 위치를 근면, 검소, 절약 등 노동 중심의 내핍 지향적 생활 규범을 내면화한 국민의 자리에서 분리해내 세탁기 구입을 통해 현대적인 생활양식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개별화된 소비자의 자리로 이동시켰다는 점이다. 이제 흑백의 생활 규범은 알록달록한 생활양식으로 대체되어야 할 차례였던 것이다.8) 따라서 광고에서라면 가정주부는 유신체제의 국가라는 초월적 권위가 부여한 소비 억제의 억압적 규율과는 일정하게 거리를 유지한 채 자발적인 욕망에 따라 일상적인 소비 행위를 통해 선택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광고는 확실히 적지 않은 젊은 여성들을 추종자로 거느릴 법한 현대적인 가정주부의 이미지를 주조해냈다.

이러한 변화와 더불어 광고 속 가정 공간 역시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에 비추어보자면 예외적으로 외부의 정치적 힘에 휘둘리지 않고 가족의 자율성과 친밀성을 방어하는 사생활의 보루로, 더 나아가 경제적 구매력의 상승, 가사노동의 자동화, 여가 활동의 활성화 등을 동력으로 소비사회의 풍요로운 미래상에 가닿을 수 있는 역사적 경로의 진입 구간으로 자리를 굳힐 수 있었다. 세탁기의 판매 확대를 위해서는 이와 같이 당시 계층 분화에 따라 새롭게 부상하던 특정 계층과의 접점을 마련하고 그 계층의 가정주부를 세탁기의 이상적인 사용자로 내세우는 것, 그리고 그들의 가정 공간에서 이전과는 다른 일상성의 질서를 추동해낼 수 있는 기술적 사물로서 세탁기의 문화적 의미를 설득력 있게 재정의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 시기의 중요한 변화를 한 가지 더 언급하자면, 1974년을 기점으로 금성사가 “조국 근대화와 번영의 상징”이라는 자사의 슬로건을 “기술의 상징”으로 교체했다는 점이었다. 기존의 슬로건은 금성사가 1969년에 흑백텔레비전,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 등의 생산과 함께 종합가전업체로서의 면모를 갖춘 이후 줄곧 사용해왔던 것이었다. 위에서 살펴본 광고의 맥락에서 이러한 변화를 조금 과감하게 의역하자면, 조국 근대화는 생활 규범과, 기술은 생활양식과 짝을 이루는 것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조국 근대화가 권위주의적 생활 규범을 앞세웠던 반면, 기술은 이제 현대적인 생활양식을 펼쳐 보일 태세였다.

4.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광고들, 그리고 ‘스위트 홈’의 무대 장치로서 세탁기: 1976~1979년

1976년, 가정주부를 앞세우던 가족 이미지 중심 광고의 표현 방식에 변화가 일어났다. 이 시점이 되자, 가정주부는 광고 속에서 이해당사자로 직접 나서서 신문 독자의 주목을 받기보다는, 오히려 지면 바깥으로 물러난 후 자신을 대신할 수 있는 대리인을 내세웠다. 흥미롭게도 여기에서 가정주부의 대리인으로 호명된 것은 바로 그들의 어린 자녀들이었다. 1940년대생 가정주부들이 1970년 전후로 출산한 아이들, 바로 제 2차 베이비붐 세대9)에 속한 아이들은 이 시점에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다닐 정도로 성장한 상태였다. 바로 이들이 금성사와 삼성전자의 세탁기 광고에 번갈아 등장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러한 변화는 세탁기의 문화적 의미에 대해, 그리고 거기에 함축된 여성들의 욕구에 대해 거부감을 드러내곤 하던 보수적인 남성들의 시선을 의식한 결과로 보이기도 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어린 아이들에게 맡겨진 임무는 분명했다. 그것은 가정주부의 편에서 중재역을 맡아 세탁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누그러뜨리는 것이었다.

광고 속에서 이 아이들은 명랑한 분위기의 홈드라마에서 에피소드의 한 장면으로 쓰일 법한 일상의 구체적인 상황에 등장해 세 가지 배역을 순차적으로 소화해냈다. 처음에는 세탁기의 필요성을 정당화하는 대상 역할을 맡았고, 그다음에는 남성 가장에게 세탁기 구입을 직접 설득하는 발화자 역할을 연기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집안일을 돕기 위해 엄마를 대신해 세탁기를 직접 조작하는 사용자 역할을 수행했다. 1970년대 초반 이후 국내 광고 시장에 자리잡기 시작한 광고대행사들이 이 시기에 주요 가전업체의 광고 제작에도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변화가 반영된 탓인지 세탁기 광고는 확실히 이전에 비해 한층 더 정교하고 세련된 표현 방식을 선보였다.

먼저 1976년, 5월 5일 어린이날에 맞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지면에 각각 게재된 금성사의 백조세탁기 광고(Figure 11)부터 살펴보자. WP-2305 모델을 내세운 이 광고에서 개구쟁이로 보이는 사내아이는 얼굴과 옷에 얼룩을 묻힌 채로 지면의 오른쪽을 차지하고 있다. 바지 주머니에는 나무 새총이 꽂혀 있고, 발 앞에는 축구공이 놓여 있다. 오후 한나절 내내 친구들과 “힘차게 뛰놀”다가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집으로 돌아온 행색이다. 그가 입고 있는 옷은 전부 세탁기의 빨래통으로 향해야 할 것 같다. 아이 엄마가 아이를 꾸짖더라도 그리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아이는 이를 이미 예견한 듯 의기소침한 표정이다. 그런데 광고는 바로 이 순간에 끼어들어 아이 엄마에게 너무 나무라지 말라며 아이를 두둔하고 나선다. “내일의 기둥인 우리 집 꼬마”를 “방안에만 가두어 둘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그러니 차라리 아이 옷 빨래는 세탁기에 맡기고 “사내는 사내답게” 기르는 편을 택하라고 조언한다. 여기에서 세탁기는 단순히 빨래를 자동화한 기계 장치에 그치지 않고 사내아이를 활동적으로 키우는 데 보탬이 되는 자녀 양육의 필수품으로 의미화된다. 이렇게 광고는 가부장제적 남아선호 사상을 뒷배경으로 삼은 채 사내아이를 내세워 세탁기 구입의 필요성을 정당화한다. 광고 문구에 따르면, 세탁기만 있으면 사내아이에겐 “1년 365일이 어린이날”이나 마찬가지다.


Figure 11 An advertisement for Goldstar Baekjo washing machine(Model WP-2305) in May 1976

한편, 같은 해 10월 이후 조선일보에 2회 게재된 삼성전자 은하세탁기의 신문 광고(Figure 12)10)에도 어린아이가 등장했다. 광고의 대상인 2.3kg 용량의 SEW-2300 모델은 한발 앞서 출시된 금성사의 WP-2305 모델의 경쟁 제품으로, 4단 수류 조절 장치 등을 비롯해 그와 유사한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제일기획이 제작한 이 광고에서는 앞선 금성사 광고와 마찬가지로 세탁기는 왼쪽 구석을 차지한다. 세탁기 대신에 앞치마를 착용한 여자아이가 아빠와 함께 지면 정중앙에 배치된다. 아빠도 엄마의 집안일을 도우려고 나선 듯 딸과 마찬가지로 앞치마를 착용한 상태다. 외견상 그의 모습은 당시 신중산층 가장의 전형적인 이미지와는 거리를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이미지란 가정생활을 희생해서라도 직장에서 밤샘도 마다하지 않고 업무에 최선을 다하는 성취 지향적인 화이트칼라 남성 이미지였다(Koo, 2014). 반면 이 광고에서 남성 가장은 가사 분담에 적극 나설 정도로 가정에 충실한 모습으로 등장하고, 여자아이는 그런 그에게 “아빠! 엄마를 아껴주세요”라고 귓속말을 건네며 친밀감을 표명한다. 여자아이가 보기에 엄마는 “하루 종일 집안일에 시달리는”데, 그 중 “가장 힘든 일이 빨래”다. 광고에 따르면, “아이들이 있는 가정일수록” 주부의 고충은 배가되고, “저녁 늦게까지” 빨래를 해야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Figure 12 An advertisement for Samsung Eunha washing machine(Model SEW-2300) in October 1976

여기에서 가정주부는 지면 바깥으로 밀려나 있을 뿐만 아니라, 소비 주체의 자리에서도 뒤로 물러서 있다. 실제로 세탁기 구입의 최종 결정권을 쥐고 있는 것은 그의 남편이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대목은 이들 사이에서 중재자로 나서는 이가 바로 엄마의 일과를 곁에서 지켜본 어린 딸이라는 점이다. 확실히 앞선 광고의 말썽꾸러기 사내아이에 비해 훨씬 더 조숙해 보이는 그는 그저 엄마의 집안일을 돕는 데 그치지 않고, 아빠에게 세탁기 구입을 설득하고 나선다. 그는 광고에서 적극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발화자의 역할을 부여받은 것이다. 광고는 이 화자의 메시지에 호응하면서 남성 독자를 향해 새로 구입한 세탁기가 아내에게 “결혼 후 최대의 선물”이 될 것이라고 부연한다. 가정주부는 바로 이런 메시지 전달 과정을 거치면서 남편의 아내이자 아이의 엄마로서 애정 어린 정서적 유대 관계의 중심축으로 자리잡는다. 그는 광고에서 보이지 않지만 방치되지는 않는다.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광고는 1978년 10월에 발표된 삼성전자의 은하세탁기 광고(Figure 13)에서 한 단계 더 진화된 모습을 선보였다. 조선일보에 4회, 경향신문에 1회 게재된 이 광고에서 “우리집 개구쟁이” 철수는 최신형 완전자동 세탁기, 모델명 SEW-250A의 사용자로 등장한다. 그는 자신 있게 “엄마! 빨래는 내가 해줄께요”라고 말한다. 제어 패널 왼편에 자리한 큼지막한 “다이얼만 한번 맞춰 놓으면”, “세탁에서 헹굼까지 완전 자동”인 세탁기 덕분이다. 철수는 바로 이 자동화 과정에서 시작 버튼을 누르는 사용자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니까 그는 자동 세탁기의 손쉬운 사용성을 보증하는 행위자로 지면에 불려 나온 것이었다. 앞선 두 광고의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철수 역시 제2차 베이비붐 세대에 속하는 어린이였다. 비록 다른 업체이지만, 세탁기 광고의 연속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1976년 금성사 광고의 말썽꾸러기 사내아이가, 좀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1974년 동일 업체 광고에서 가족과 함께 시소를 타던 어린아이가 불과 몇 년 사이에 엄마를 돕는 초등학생으로 성장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Figure 13 An advertisement for Samsung Eunha washing machine(Model SEW-250A) in October 1978

한편, 1974년부터 시작된 신중산층 가족을 내세운 세탁기 광고의 흐름은 1979년 12월에 발표된 금성사의 백조세탁기 모델명 WP-3007 광고(Figure 14)에 이르러 기존의 광고 내용을 종합하는 단계에 도달했다. 3개 일간지에 각각 1회씩 총 3회 게재된 이 광고에서는 그동안 제 모습을 드러내기 주저하던 가정주부가 남편을 앞세워 지면에 나선다. 자녀의 보조 출연 없이 드디어 부부 단둘이다. 남편(오지명 역)은 흡족한 듯 활짝 웃고 있고 아내(오미연 역)는 미소를 지으며 그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들 앞에는 방금 집에 배송된 듯 보이는 신형 세탁기가 놓여 있다. 광고는 부부의 오붓한 모습을 전시하면서, 세탁기 위에 “애처지수 100점”이라는 문구를 크게 배치한다. 그리고 “금성 백조세탁기로 당신의 ‘아내 사랑’을 표현하세요”라고 남성 독자에게 말을 건넨다. 이 광고 문구의 논리에 따르면 세탁기는 “아내의 힘든 일손을 덜어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부부의 애정을 확인하는 사물로서의 독특한 위상을 점유하는 것이었다. 앞서 살펴본 1976년 삼성전자 광고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세탁기 구입의 결정 권한을 지닌 주체는 남성 가장이었고, 가정주부는 사용자에 불과했다. 가계부를 작성하며 가정 경제를 합리적으로 운영하는 것은 가정주부의 몫이었지만, 세탁기는 가정주부가 재량권을 가지고 지출할 수 있는 금액의 상한선을 훨씬 넘어선 고가의 제품이었다. 가정 경제의 최종 결정권은 남성 가장의 몫이었다. 광고는 그에게 그 권한을 행사하라고 조언했다.


Figure 14 An advertisement for Goldstar Baekjo washing machine(Model WP-3007) in December 1979

흥미롭게도 1980년 1월, 조선일보의 독자 투고란에는 바로 이 광고를 비판하는 어느 주부의 짧은 글이 게재되었다. 이 주부는 세탁기 구입 여부로 가장의 “애처지수”를 확인하는 광고 내용을 문제 삼았다. 그는 “집안일에 무관심하면서도 세탁기만 구입”해주면 “100점짜리 남편”이 되는 것이냐고 따져 물으면서, 광고 내용이 결국에는 “황금만능주의”를 부추긴다고 비판했다(『조선일보』, 1980년 1월 27일). 이 주부가 문제의 핵심으로 지적한 것은 이 광고가 내세운 ‘세탁기 구입=남편의 애정 지수 100점’이라는 등식이었다. 그가 이 등식에 거부감을 표명한 이유는 명확했다. 당시 세탁기는 여전히 일반 소비자가 접근하기 어려운 고가의 제품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세탁기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나 다름없었고, 광고의 논리에 따르자면 “애정지수 100점”의 남편, 그리고 그런 남편의 사랑을 받는 가정주부 역시 그 계층의 구성원일 따름이었다. 이러한 관점은 당시 대중의 인식 속에 자리잡고 있던 지위재(positional goods), 즉 차이 표시 기호로서의 세탁기의 상징적 위상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위상이 단순히 수직적인 계층적 위계로 곧바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1976~1978년 동안 국내 경제는 중동 진출로 인한 오일머니의 유입으로 10% 이상의 성장률을 기록하며 호황기를 맞이했고, 부동산 시장 역시 강남 개발 등을 통해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였다. 이에 힘입어 텔레비전과 냉장고 시장뿐만 아니라 세탁기 시장도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텔레비전 판매량은 1977년 1백35만 대에서 1978년 1백80만 대로 33.3%, 냉장고는 37만 대에서 85만 대로 129.7%로 증가했다. 세탁기 판매량도 텔레비전과 냉장고에 비하면 규모가 크지 않았지만 괄목할 만큼 늘었다. 실제로 1977년 12만 대에서 1978년 26만 대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동아일보』, 1978년 12월 26일). 중산층 중심의 전반적인 소득 향상에 식모 고용 감소와 현대적 주거 공간 확산 등이 가세한 결과였다.11)

이와 같이 가전제품을 비롯한 내구소비재 구입이 중산층을 비롯해 사회 전반으로 광범위하게 확산되면서, 개별 가전제품의 상징적 위상도 변모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텔레비전과 냉장고는 상류층의 전유물이자 일종의 차이 표시 기호로 소비되었다. 하지만 텔레비전은 1970년대 초반부터, 냉장고는 1970년대 중반 이후 중산층의 필수품으로 대중화되기 시작했다(Lee, 2013). 반면 세탁기는 아직 이 두 가전제품의 상징적 위상에는 도달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1979년에 텔레비전과 냉장고의 보급률은 각각 79.1%와 49.0%였으나, 세탁기의 보급률은 11.4%에 불과했다. 세탁기는 바로 이런 이유로 차이 표시 기호로 기능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낮은 보급률이 곧바로 세탁기가 상류층의 전유물이라는 사실을 지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앞선 광고들이 보여주듯이 경제적 안정성을 확보한 젊은 신중산층 가족이 식모를 두지 않고 구성원 간의 친밀성을 바탕으로 화목한 가정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보조적 사물로, 달리 말하자면 그들이 연출하고자 하는 ‘스위트 홈’의 무대 장치로 의미화되고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앞서 살펴본 세탁기 광고에 대한 어느 주부의 불만이 담긴 비판은 신중산층의 생활양식과 밀접한 관계에 놓인 세탁기의 문화적 의미를 표적으로 삼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세탁기가 도드라지게 강조하는 생활양식의 격차에 위화감을 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5. 결론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세탁기 보급률은 꾸준히 증가해 1984년에는 30%, 그리고 1989년에는 그보다 두 배 넘게 성장한 65%를 기록했다. 1989년에 각각 104%와 103%에 도달한 컬러텔레비전과 냉장고의 보급률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세탁기는 이 두 제품을 빠르게 추격하면서 필수 내구소비재의 대열에 진입했다. 그러나 앞서 살펴봤듯이, 이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1970년대 초반만 해도 세탁기는 텔레비전과 냉장고와는 다른 차원에 놓인 가전제품이었다. 그것은 선진국의 현대적인 생활양식을 상징하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사물이었다. 특히 중상류층의 식모 고용, 전근대적인 주거 공간의 잔존, 국가의 강력한 소비 억제책이 만들어낸 독특한 역사적 지형은 세탁기 보급을 더디게 만드는 장애물로 작용했다.

1970년대 전반에 걸쳐 금성사와 삼성전자 등 주요 국내 가전업체들은 이러한 악조건을 우회하기 위해 나름의 광고 전략을 모색했다. 그 과정은 크게 세 가지 시기로 구분될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1971년부터 1973년까지 세탁기의 시장 도입 단계로, “빨래는 시간의 낭비”라는 광고 문구가 보여주듯이 단순히 가사노동의 경감에 초점을 맞춰 기능적 차원에서 세탁기의 유용성을 강조하는 단계였다. 시장의 선발 주자였던 금성사의 이러한 시도는 소비자들로부터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고 시장 진입에도 난항을 겪었다. 두 번째 시기는 1974년부터 1975년까지 후발 업체들의 시장 진출 단계로, 주요 가전업체들이 경제성장과 함께 등장한 신중산층의 가정주부를 세탁기의 소구 집단으로 주목하면서 가족 이미지 중심의 광고 전략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한 단계였다. 이 시기의 광고들은 세탁기가 지닌 효용성의 맥락을 가정주부의 가사노동 경감에서 자녀 양육 시간 증대로, 그리고 다시 가족이 함께하는 여가 시간 증대로 확장했다. 이와 더불어 가정주부의 위상도 재정의했다. 이 광고들에 따르면, 가정주부는 이제 세탁기의 도움으로 시간을 합리적으로 경영하는 가사 관리자 역할뿐만 아니라, 가족의 행복한 일상을 연출하는 현대적인 생활양식의 기획자 역할도 담당해야 했다. 세 번째 시기는 1976년부터 1979년까지 세탁기 보급의 활성화 단계로, 어린아이와 남성 가장이 가정주부를 대신해 광고 모델로 등장한 광고들이 두각을 나타낸 단계였다. 신중산층의 자녀 세대에 속하는 어린아이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세탁기 구입의 필요성을 설득하고 나섰고, 그들의 아버지인 남성 가장들은 가정적인 모습을 보이며 아내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한 방편으로 세탁기 구입을 고민하거나 결정했다. 이 지점에 도달하면 세탁기는 사실상 가족 구성원 간의 애정을 확인시켜주는 상징적 사물로서의 위상까지 획득했다.

바로 위와 같은 과정을 거친 덕분에 1970년대 후반 이후 세탁기의 문화적 의미는 신중산층 가족이 친밀성을 바탕으로 현대적인 생활양식을 연출하는 데 필요한 기술적 사물로, 달리 말하자면, 그들이 실현하고자 하는 ‘스위트 홈’의 무대 장치로 정의될 수 있었다. 그것은 세탁기가 1980년대 이후 본격적인 대중화의 궤도에 올라서는 데 도약대 구실을 해주었다.

Acknowledgments

본 연구는 2020년도 동양대학교 학술연구비의 지원으로 수행되었음.

This study was supported by grant from Dongyang University in 2020

Notes

1) 미국의 경우, 가전제품의 보급은 1930년대 초반 냉장고와 세탁기를 중심으로 시작되어 냉장고가 선두를 이끌고 세탁기가 그 뒤를 따랐다. 텔레비전의 보급이 본격화된 것은 1950년대 이후였다.

2) 실제로 한 언론은 “국내 가전제품이 일본의 유형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전반적인 경향”에도 불구하고 세탁기 보급이 더디게 진행된 것을 두고 이변으로 꼽기도 했다(『매일경제신문』, 1975년 11월 12일.).

3) 당시 신문 광고는 광고 시장에서 가장 큰 규모를 차지하고 있었고, 가전업체들은 지속적으로 광고 투자를 늘려나가 1976년에는 금성사가 광고비 지출 기업 순위 10위권에 들어갔고 삼성전자는 11위를 차지했다(Sung et al., 2007).

4) 참고로, 금성사는 1959년 12월, 자사의 첫 제품인 A-501 라디오 출시 이후 광고 활동을 개시했다. 당시 광고 업무는 자매 회사인 락희화학의 서울사무소 판매 3과가 맡았다. 이 부서는 금성사 제품의 판매 업무와 함께 광고 업무까지 담당했다. 1960년대에 전반에 걸쳐 금성사는 흑백텔레비전, 냉장고, 선풍기 등 가전제품 출시를 본격화했는데, 이 과정에서 광고 업무 담당 부서가 자주 변경되었다. 1960년대 초반에는 락희화학의 선전실, 1966년 1월 이후에는 금성사 사내에 신설된 선전과, 1968년 1월부터는 판매 전담 회사인 금성판매주식회사 선전부가 광고 업무를 담당했다. 1978년 4월에는 금성사를 포함한 럭키그룹의 모든 광고 업무가 그룹 산하의 광고대행사인 희성산업으로 통합 이관되었다. 광고대행사 체제 도입 이전까지 1960,70년대 과도기에 금성사의 광고 디자인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이는 문달부(1927년생)였다. 1956년 한국 최초의 CF 애니메이션 ‘OB 시날코’를 제작한 바 있는 그는 1960년 입사 후 15년간 금성사의 광고 업무를 담당했다. 1975년 퇴직 당시, 그의 직함은 금성판매주식회사 선전부 부장이었다. Figure 2의 제품 펜화는 바로 문달부의 작업이다(Park, 1999).

5) 이 제품은 2013년 문화재청이 국가등록문화재 제562호로 지정하기도 했다.

6) 1970년부터 약 2년간 금성사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한 바 있는 한국갤럽의 창업자 박무익(1943년생)은 1974년에 독립해 KSP(Korea Survey Polls)라는 여론조사업체를 설립한 바 있는데, 이때 맡은 첫 프로젝트가 1974년 금성사의 <세탁기 광고 효과 측정 조사>였다. 당시 금성사가 비록 초보적인 형태일지라도 세탁기 광고에 대한 전략적인 접근을 시도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Park, 2018).

7) 앨런 럽튼에 따르면, 미국의 세탁기 제조업체들이 이 가전제품이 가정주부에게 여가 시간 증가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광고하기 시작한 시점은 전후 1940년대 후반이었다. 이 시점의 광고들은 세탁기가 가정주부들이 가사노동의 짐을 덜고 자유롭게 쇼핑, 오락, 휴식과 같은 여가 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한편, 세탁기가 미국 중산층 가정의 필수품이 된 것은 1950년대였다(Lupton, 1993).

8) 실제로 1974년 7월에 발표된 금성사의 WP-2015 모델 광고(Figure 6)는 총 6회의 광고 횟수 중 딱 한 번 조선일보 지면에 컬러로 게재되기도 했다. 당시 신문 광고로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9) 제 2차 베이비붐 세대는 1968년과 1974년 사이에 출생한 이들로, 638만 명에 달했다.

10) 이 광고는 제일기획의 이충호(기획), 신성완(디자인), 김완태(카피), 이용정(촬영) 등이 담당했다(『월간 디자인』, 1977년 9월호).

11) 참고로, 1976년, 고급 공무원, 교육계, 전문직, 기업계 등에 종사하는 생활수준이 높은 중산층 이상 5백 명을 대상으로 가전제품 보유 실태 조사를 진행한 결과에 따르면, 당시 세탁기의 보급률은 31.5%로 나타났다. 텔레비전은 97.6%, 전기밥솥이 89.6%, 냉장고가 77.0%의 보급률을 기록한 것에 비하면, 상당히 낮은 수치였다. 한편, 업체별 보급률에서는 금성사가 경쟁 우위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금성사는 텔레비전 43%, 냉장고 44%의 점유율을 기록했으며, 세탁기의 경우 75%로 압도적인 점유율을 보였다(『매일경제신문』, 1976년 12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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